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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컨추리우먼 Jun 15. 2022

뱅갈 고무나무에 싹이 나다.

25년 차 직장인


벌써 6개월 전의 일이다. 연초에 이쪽 사무실로 출근했을 때만 해도 내 옆에 화분이 있다는 걸 신경 쓰지 못했다. 새로운 부서에 와서 업무 파악하랴 사무실 적응하랴 여력이 없었다. 우리 팀과 우측 옆 팀 사이에 커다란 화분이 있는데 화분 높이는 약 50센티에 나뭇가지는 40센티 정도 되었고 연두색 이파리가 서너 개는 나와 있었다.


 


난 그 화분이 옆 팀장님 개인 화분인 줄 알았다. 만약 내 전임 팀장 화분이었다면 나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므로 화분 주인이 알아서 잘 키울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달 두 달이 지났을까, 마지막 이파리 하나만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 시간에 과장님은 내게 화분을 잘 키우라고 말씀하신다. 알고 보니 그 화분은 작년에 기증받았다고 한다. 그랬구나, 화분을 기증받았으니 개인 소유가 아니었다. 그러니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거다.


 


아침마다 물을 주던 어느 날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졌다. 아이고 큰일이네. 이젠 어쩌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물은 계속 주었다. 나무는 점점 말라 가는 느낌이었고 이제 포기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진작 내가 챙겼으면 좋았을걸, 그냥 한번 물어나 볼걸. 주인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 바로 물을 주었을 텐데,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랬는데 오늘 아침에 무심하게 물을 주려고 하니 나무 기둥 아래에 작은 혹처럼 연둣빛 싹이 보였다. 아니 세상에, 나무가 죽지 않았구나, 살아 있었구나,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구나. 기특하다, 기특해. 연신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고 들여다보았다. 두꺼운 나무 기둥에서 어떻게 저런 연한 싹이 나올 수 있을까?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나는 것처럼 뱅갈 고무나무 에게도 이제 새로운 봄이 찾아온 거다.


작년까지 근무했던 학교 뒤편에는 아주 오래된 모과나무가 있었다. 나무 기둥도 두껍고 껍질이 벗겨져서 흙으로 발라놓았던 모과나무는 겨우내 고목처럼 서 있다가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 모과 열매가 달렸다가 노랗게 물들면 떨어지고 가을이 되면 이파리가 하나둘 떨어지고 눈이 내리면 앙상한 나뭇가지가 눈꽃으로 바뀌었다.


 


운동장 벤치에 드리웠던 등나무 줄기들도 겨우내 서로 엉켜서 휑하니 있다가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잎이 돋아나고 연보랏빛 예쁜 꽃을 커튼처럼 매달다가 가을이 되면 씨주머니를 매달고 씨주머니가 탁 열리면 바둑알만 한 등나무 씨가 사방으로 퍼진다. 벤치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사부작사부작 밟으면 경쾌한 소리가 난다.


 


나무는 참 고마운 친구다. 무심한 듯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봄이 되면 꽃을 피워주고 여름이 되면 그늘을 만들어준다. 가을이 되면 예쁜 단풍을 보여주고 겨울이 되면 눈꽃을 만들어준다. 나무는 아무 말이 없어도 내 말은 잘 들어준다. 나는 나무로부터 위로받고 사랑받는다. 나무는 내어주기만 하는 어머니 품 같다.


 


나무의 루틴을 따라 하고 싶다. 잊어버린 나의 루틴은 언제 다시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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