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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Jan 23. 2022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허지웅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고.

허지웅 작가의 팬이 아니라면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책 띠지다. 그의 날카롭고 차가운 콧날과 회의감에 빠져 빛을 잃은 듯한 염세주의적 눈빛. 심지어 띠지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 사진은 그의 정면 모습이 아닌 측면을 담고 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더욱 읽어내기가 어렵다.

<살고 싶다는 농담>의 띠지. 날카로움이 돋보이는(?) 작가님의 인물 사진 (portrait)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작가의 에세이집이다. (허지웅 방송인? 허지웅 전 기자, 허지웅 씨 중 어떤 호칭이 가장 나을지 고민했으나 "작가"가 가장 나을 것 같다. 결국 이 독후감이 업로드될 공간이 작가님들로 가득한 브런치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허지웅 작가님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사실이 많지 않았다. 대중들에게 그의 대표작(?)으로 인식되고 있는 TV 프로그램은 아마 2013년부터 2년 간 JTBC에서 방영되었던 <마녀사냥> 일 것이다. 프로그램 기본 정보를 다시 검색해보니 다소 당황스러운 소개 글이 눈에 띈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뒤흔드는 마성의 여자들, 마녀! 그녀들에게 놀아나 무기력한 남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좀 놀아 본 네 명의 남자들이 나선다!" 본격 여심 토크 버라이어티라고 하는데... 프로그램 취지 실화인가...? 싶다. 9년 전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JTBC에서 매력적인 여성을 "마녀"라고 일컬으며 그녀들에게 "놀아나 무기력해진" 피해자 남성들을 "구해주기 위해" 네 명의 "형아들이" (즉 진행을 맡은 출연자 신동엽, 성시경, 유세윤 그리고 허지웅 작가가) 고민 상담을 해준다는 내용인데... 흠 원래 <마녀사냥> 프로그램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공유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다. 완연히 느끼지는 못했지만 지난 10년 정도의 시간 동안 세상이 꽤 바뀌긴 했나 보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마녀사냥>을 허지웅 작가의 대표작으로 인식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 중 한 명으로서 나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해당 프로그램을 열심히 챙겨본 것도 아니었으며 가끔씩 화제가 되는 에피소드를 "짤"로만 소비했을 뿐이고, 공유되는 에피소드에 대한 남성 출연진의 "드립"과 "견해"를 보며 확실히 "세다"라고 느꼈던 것 같다. 양측 입장을 듣지 못한 채 끝없는 평가를 내뱉는 프로그램의 분위기도 불편하게 느껴졌고 말이다. 이런 인상 때문인지 허지웅 작가가 왜 "살고 싶다"는 "농담"까지 내뱉으며 에세이 집을 출간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실제로 이 책은 내가 직접 골라서 호기심에 읽어본 책이 아니라 더욱 감이 안 오기도 했다. 항상 대화의 끝을 책 추천으로 마무리하는 한 친구가 문득 책 한 권을 보내줬다. 서로 진로 고민, 인생 고민을 나눈 후였는데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궁금해서 <살고 싶다는 농담>을 읽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나는 선물 받은 책은 반드시, 꼭 읽어보는 편이다. 어떤 동기부여를 갖고 나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 정성이 고마운 마음에 책 선물에 대해선 꼭 "독서"와 "독후감"으로 보답하곤 한다.)


그렇게 첫 번째 챕터를 펼치자마자 그가 항암치료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망했는데. 세 번째 항암 치료를 하고 나흘째 되는 날 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앤디 위어의 소설 <마션>의 첫 구절이 생각나는 시작이었다. (화성 탐사 중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고 화성에서 죽을 최초의 인간이 될 수도 있는 주인공은 "X 됐다. (I'm fucked)"라는 말로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구실에서 자가면역과 암 연구를 아우르는 면역학에 대한 논문을 읽으며 항암 치료가 얼마나 끔찍한지 조금이나마 상상을 해본 대학원생으로서 허지웅 작가가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 (malignant lymphoma)이라는 큰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악성 종양, 즉 암세포가 한 자리를 지키며 자라나도 전이의 위험이 있고 특정한 부위에서 자라고 있는 종양 세포 역시 표적 치료 성공률이 아직 아쉬운 정도인데, 온몸을 떠다니는 혈액 세포에 암이 생기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치료는 또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픈 시련이었다. 그렇게 그가 불행한 일을 겪으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고 오늘의 젊은이들은 본인보다 좀 더 현명하고 훨씬 더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써낸 스물다섯 편의 에세이 집이다. 허지웅 작가의 <살고 싶다는 농담>을 나에게 건넨 친구의 의도나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보며 책을 읽다가 가장 위로가 되었던, 그리고 모호했던 깨달음에 대해 명확한 언어로 풀어서 설명해주었던 몇 가지 부분에 대해 공유해보려고 한다.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서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명확한 건 오직 시작과 끝뿐이다. 나머지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다. 거기서 선명한 원인 한 가지를 찾아내겠다고 애쓰는 건 이미 먹고 있던 국수 그릇에서 처음 삼킨 면과 마지막에 삼킬 면의 시작과 끝을 찾아 이어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행의 기준이라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하겠으나 모두가 불행한 일을 겪었을 때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 그리고 그 불행에 대한 반응은 비슷한 것 같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심란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때 생각의 회로가 흘러갈 수 있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좌절하는 것과 이런 일이 실제로 "나에게"만 일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쉽게 예상 가능하겠지만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더 생산적이고 덜 파괴적이다. 나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자기 연민에 빠지기 굉장히 쉬운 회로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라는 질문에 휩싸이게 되면 불행으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는 출구와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잘못의 화살표, 비난의 대상을 "스스로"로 정해버리면 내 행동과 생각, 그리고 판단을 위해 본인이 세워둔 논리의 흐름마저 탓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허지웅 작가는 어서 빨리 그런 회로에서 탈출하라고 조언한다. 책임 전가를 위한 요소를 찾거나 "누구의 잘못이다"라고 탓하기 위한 대상을 찾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사건을 대상으로 시간 순서대로 (chronologically) 생각해봤을 때 그 사건의 시작과 끝밖에는 없다.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불행을 맞닥뜨렸을 때 온몸이 축 처지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삶에선 애초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변수는 정말 극소수에 다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저 내가 얼마나 그 타격으로부터 굳건히 영향을 덜 받을 수 있고, 상처받더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resilient) 능력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좀 더 현명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법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다.


나는 스스로 자기 객관화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잘하는 건 자기 객관화가 아니라 자기 탓, 그리고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려는 자기 연민인 것 같기도 하다. 계속 마음이 복잡해지고 언젠가부터 주어진 일이 명확하지 않고, 삶의 목적 자체가 뿌옇게 서리가 낀 것처럼 투명하지 않고 확고한 단 하나의 진실조차 기대하기 어려워진 느낌이다. 그래서 그 이유는 내가 나의 삶을 살지 않아서이라고, 내가 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소들이 무엇 일지에 대해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고 시나리오 작가로 빙의하여 내가 미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하고 아쉬워했던 것이다. 이런 자기 연민적 사고 회로는 남들과의 비교가 불가피할 때 한층 더 심각해지곤 하는데 그때마다 기억해야 하는 점 역시 명확하다. 그 누구의 삶이든 다 서로만큼 비범하고, 서로만큼 초라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을 우리만큼 초라하다.

이 모든 내용은 사실 말이 가장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만큼 불행을 벗어나기 위해 내가 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피해의식"이라는 점을 허지웅 작가는 명확하게 제시해주었다. 행복해 보이는, 적어도 멀리 서는 모든 게 다 완벽해 보이는 타인의 삶과 나의 초라함, 모호함, 그리고 불투명함을 비교해선 안된다. 애초에 공평한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상처는 피하고 가두고 벗어나야 할 악의 존재가 아니라 공생해야 하는, 오히려 잘 다뤘을 때 우리 삶의 동기가 될 수도 있는 무언가 이기 때문이다.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준다.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낙인찍는 대신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나 역시 최근에 연구실 선배와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계속되는 논문 리젝트 소식과 연구를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화딱지"가 난적이 많았다. 괜한 어리광일 수도 있지만 전부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드라마틱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이루고 싶은 꿈을 뒤로한 채 원치 않는 집단에 속해있다.

남들은 열정을 찾아 매일 같이 고군분투하는데 나는 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나.

쉽게 주어진 삶을 살았을 때 나에게 약속되는 것은 무엇이지?

왜 나만 열정 없는 생활을 계속해서 영위해야 하는 것일까?

(윽.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오글거리는 생각 회 로긴 하다.)


나만 열정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나만 원치 않는 곳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불행하다는 거만함은 아니었을까. 연구실 선배는 나에게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라고 조언해줬다.


논문 리젝트가 너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니?

우리 분야에서 (생명과학/공학) 첫 번째 논문을 게재하는 시기가 너만 늦어지는 거니?

네가 했을 때만 실험의 재현성이 떨어지는 일이니?


그 어떤 질문에도 "네"라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대학원에서 누구나 "논문 게재"라는 멀고도 험난한 배움의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 과정을 절대 쉽지 않다. 오히려 쉽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너무 쉬운 저널에 내 소중한 연구 결과를 공유했다는 뜻이거나, 누군가 제대로 오해를 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논문 게재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최소한 우리 분야에서는 논문 게재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우리 지도교수님 역시 포스트닥 (post-doc) 지원서를 직접 살펴보면 1 저자 논문 한 두 편과 그 외 발표 실적 등을 바탕으로 유학행을 고려하고 있는 박사 지원자가 많다고 알려주셨고 박사 3-4년 차 때까지 열심히 시행착오를 겪어야 그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좋은 논문을 묶어낼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실험의 재현성 (reproducibility) 역시 마찬가지다. 생물을 다루는 연구실은 어쩔 수가 없다. (컴퓨팅/시뮬레이션을 제외한, 아니 심지어 포함하고도 다른 분야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믿음직스러운 데이터를 만드는 일은 결국 재현성과의 실험이고 변수를 줄여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며 직접 실행에 옮기는 일이야 말로 참된 연구자가 해내야 하는 일이다.

나에게 주어진 당연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대신 살짝 힘을 빼고 그 자체를 즐겨보려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올해 목표는 ‘하루씩 살기’다.

그렇다면 나는 왜 스스로에게만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며 피해자 프레임에 잠식되어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더 이상 내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또다시 과거를 회상하고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어떤 요소를 찾기 위해 에너지를 쓰고 싶지는 않다. 그저 주관적인 자기감정에 심취하여 현실감을 잃지 않도록 객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마음이 속상할 때는 충분히 내 마음을 돌보고 지나가되, 앞으로는 그 회복 시간을 점차 줄여나갈 수 있는 연습을 묵묵히 해나가고자 하는 다짐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같다.

나는 프로이트의 제자인가, 아들러의 제자인가? 또는 포퍼와 팀을 이뤄 열등감과 트라우마에 대한 반론을 늘어놓을 사상가인가?
<버티는 삶에 관하여>도 읽어 보고 싶게 만들었던 구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즉 다른 책이 또 궁금해지게 만드는 책을 좋아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피해의식에 점령당해 객관성을 잃는 순간 괴물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예리하고 애정 깊은 메시지들로 본인의 사례와 함께 삶에 대한 고찰을 나눈 허지웅 작가의 에세이는 그렇게 내가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워 간지러움을 느끼던 부분에 대해 시원하게 정리하여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이게 바로 이 책을 선물한 친구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허지웅 작가 역시 더 예민하기 때문에 더 많이 공감했으나 그만큼 더 많은 슬픔을 느끼며 인생을 되돌아보고 곱씹으며 수많은 깨달음을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전한 희망적 메시지로 독후감을 마무리하고 싶다.


뿌옇게 서리가 낀 것처럼 투명하지 않고 확고한 단 하나의 진실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내게는 천금과도 같은 약속이었다. 가장 힘들 때마다 저 말은 나를 구했다.


내가 삶에 대해 품고 있는 수많은 궁금증에 대해 그 답이 투명해지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객관성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며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슬럼프 극복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다. 이 글을 빌어 책을 선물해준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허지웅 작가님께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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