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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Oct 02. 2021

요가적 라이프스타일의 뭉클한 유대감

정우성 작가의 요가 에세이 <단정한 실패>를 읽고

3년 전 봄, 처음으로 요가 수업에 가게 되었다.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달려온 후 처음으로 여유와 마음 돌봄을 도모하고 싶은 마음에 등록한 교내 수업이었다. 교내에는 체력단련실도 많고, 운동 동아리도 다양하고, 근처에 조깅이나 산책을 위한 작은 강가도 있지만 그 많은 선택지 중 나는 요가 수업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궁금한 마음도 있었고 좀 더 조용하게 내면을 돌아보는 수련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친한 친구와 함께 첫 수업을 등록했다. 같이 수업에 등록한 친구와는 “우리 한 달 8회 수업 중 반 만이라고 참석하자”는 다짐을 했다. 지금까지 꾸준히 운동을 한적도 없고, 운동 수업에 참여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렇게 가볍고 게으른 마음으로 요가 수련을 시작했다.


한 달 8회 수련 중 네 번이라도 참석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머쓱하게도 나는 단숨에 요가 수련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선생님과 옆사람들의 동작을 흘겨보며 요가 자세를 따라 하기도 벅찼다. (그래서 “수련했다”는 동사를 사용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제보다 오늘 더 발꿈치가 매트에 한 마디 더 가까워지고,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등허리의 움직임을 느끼고, 눈을 감고 명상하며 그날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다 보니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뭉클함을 느끼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요가를 처음 접하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선생님 또한 정말 중요한 것 같은데 역시나 운이 정말 좋았다. 그렇게 일주일 두 번 저녁 수련, 그리고 한 번은 아침 수련을 다니며 본인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선사하게 되었다.

코로나 이후 교내 단체 수업이 어려워졌을 땐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 1:1 수련을 하기도 했다. 너무 뿌듯하고 시원했던 순간이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이후 교내 요가 수업 개설이 어려워져 한동안 요가 수련을 쉬어가야 했다. 그래도 최대한 개인 시간을 할애해서 스트레칭도 하고 학교 옆 아쉬탕가 요가 수련원을 찾아가 마이솔 수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공이 부족해서인지 혼자 하는 수련에는 한계가 있었고 선생님이 앞에서 이끌어주시는 레드 (lead) 클래스가 아닌 마이솔 수업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참을성이 부족해서인가… 이전처럼 마음이 꼭 맞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과 수련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많이 아쉬웠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문득 서점에서 요가 에세이 신간을 발견했을 때 꼭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정우성 작가의 요가 에세이 <단정한 실패>, 표지에 나와있는 우르드바 하스타사나 자세가 인상 깊다.

<단정한 실패>는 라이프 스타일 칼럼니스트이자 취향 공동체 스타트업 “더파크”의 CEO, 무엇보다도 요가를 수련하는 요기니 정우성 작가님의 요가 에세이다. “아프면 쉬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극약 처방”으로서 본인의 치열했던, 심지어 꽤나 자기 파괴적이었던 라이프 스타일을 반성하며 요가 수련에 임하고 스스로의 목소리에 조금씩 더 귀 기울이는 작가님의 요가 스토리에 대해 읽어볼 수 있다. 책 중간에 다섯 가지 핵심 요가 아사나에 (asana, 요가 자세) 대해 소개된 부분도 있는데 이 부분 역시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태양 경배 자세인 “수리야 나마 스카라 A”를 소개하는 부분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요가 매트를 펼치고 A세트 다섯 번, B세트 다섯 번씩 하고 싶어 진다. (물론 마음만 먹고 실제로 수련을 여러 번 하지는 못했다. 책이 너무 재밌어서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독서를 중단하고 매트를 깔기엔 매우 아쉬웠다는 것이 나의 핑계다…) 작가님이 어떻게 처음 요가에 접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더 요가에 “진심”이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수련을 하고 앞으로는 어떤 요가적 삶을 지향하게 될지에 대한 작가님의 고찰과 열정, 그리고 뭉클한 연대기를 엿볼 수 있어서 정말 재밌게 읽었다.


요가를 접하고 사랑하게 된 모든 사람에게는 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 굉장히 극적일 수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고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일상에서 어떻게 요가를 접하게 되었고 내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감과 앞으로도 어떻게 내 삶을 조금 더 요가적으로 이끌어나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과정이 건강하고 요가스러운 것 같다. <단정한 실패>를 읽으면서 이런 고민에 대해 유대감을 형성하고 작가님의 훌륭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내가 직접 표현하지 못했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 아무리 열심히 수련한다고 해도 각자 수련하면서 느낀 점이나 신체의 변화, 그리고 삶의 방식에 대해 주변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경우가 드물기도 하고 말이다.


<단정한 실패>를 읽어보니 작가님 역시 선생님 복이 굉장히 타고나신 것 같았다. 요가 선생님께서 요가 수행자를 “연꽃”에 비유해주신 부분이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한 구절을 소개하려고 한다.

“요가 수행자를 연꽃에 비유하곤 해요. 어떤 상황에서도 수련하는 사람. 진흙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 우리 마음이 진흙탕 같을 때가 있잖아요? 직장에서 어떤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관계 속에서 그런 상태가 될 수도 있죠. 그래도 오늘 우리는 매트 위에서 수련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찾았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참 칭찬받을 만해요. 진흙탕에 매트를 깔았잖아요. 이제 수련으로 꽃을 피우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진흙탕에 매트를 깐다니. 사실 최근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살펴보면 “진흙탕”이라는 비유가 과하지 않은 것 같다. 외적으로 개인에게 주어지는 스트레스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하루하루를 겪어내며 개인이 마주하게 되는 내면의 고민 역시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굉장히 예민한 성격과 성향을 타고나서 마음 돌봄의 시간을 조금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스타일인데 요가 수련에 임한다는 것은 이러한 일상의 “진흙탕” 속에서도 반드시 멈춰 세우고 그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지나가겠다는 굳건한 의지이자 본인과의 약속인 것 같다.


모두가 쫓기듯 살아가는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시간을 살아 내는 것이 아니라 꿈꾸던 많은 것들을 우선순위 뒤로 미뤄두고 치열하게 일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심지어 그렇게 사는 라이프 스타일이 미덕이자 어찌 보면 허세의 근원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다 같은 처지였지만 서로는 위안을 얻을 수 없는 각박함 속에서 스트레스는 치열하고 권태는 익숙했다.” 모두가 바쁘기 때문에 시간의 소유하고 본인을 가꾸는 그 시간이야말로 이 시대의 럭셔리가 되었고 실제로 대학원에서도 비슷한 내러티브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실험과 보고서, 연구 제안서와 발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꼭 자신을 위한 “럭셔리한 시간”을 할애하는 대학원생들이 있다. 저녁 필라테스 수업, 아침 테니스 동아리 훈련, 미술 수업, 그리고 와인 시음회 모임까지. 누군가는 이를 대학원생의 “사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런 프레임도 점차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작가님의 성찰처럼 “시간은 아무것도 거저 주지 않고, 시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오로지 개인의 의지와 힘이기 때문이다.” 꼭 요가 수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고 긴 레이스를 잘 완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시간의 주인이 되어 내가 사수한 소중한 시간을 잘 사용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논의되었던 “몸”에 대한 담론 역시 인상 깊게 읽었다. 요가를 시작하기 전, 아니 수련을 시작하고 난 후에도 작가님은 역시 스스로의 몸을 “후졌다”라고 표현하며 자의식도 강하고 자신의 몸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결여된 상태였다. 사실 나도 이 부분에 대해 큰 공감을 하게 되었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내 “몸”에 대해 자신감은커녕 좋아했던 적, 사랑했던 적이 없었다. 특히나 대상화되는 여성의 몸은 언제나 완벽에 대한 기준이 명확했고 미디어에서 보이는 여성의 몸은 비정상적인 “완벽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의, 그리고 수많은 소녀들의 기대치이자 목표치가 되었다. 내 몸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못한 채 이십여 년 간을 살아오고 있었는데 요가 수련을 하면서 나아진 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어보며 좀 더 마음을 다지게 된 것 같다.


“나는 매트 위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뼈와 근육, 신경과 살이었다. 최대한 섬세해지고자, 할 수 있는 한 강해지고, 내 몸을 수련의 대상으로 삼는 요가 수련생일 뿐이었다. 아름다움은 완성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을 추구하는 모든 과정 안에 있다는 걸 수련의 열기 속에서 깨달았다.”


“꾸준히 수련하는 내 몸에도 일말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지금은 알기 때문이다. 누구도 다른 누구의 몸을 대상화할 수는 없다. 모두의 몸에는 이 세상이 억지로 만들어 좋은 그 무례한 콘셉트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와 힘이 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채, 그 모든 젠더로부터 자유롭게, 그저 수련하는 몸이 각자의 매트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세상이 억지로 만들어낸 무례한 콘셉트가 아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나의 몸. 오로지 내 의지로 움직이고 수련과 온전한 식사법을 (mindful eating) 도모하며 지향하는 나의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임을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해야겠다. 나 역시 아직도 아사나 도중 “중력에 굴복하고 마는 뱃살”을 보며 눈물을 훔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긍정하고 아사나를 해낼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도 타인과 내 몸을 비교하지 않는 요기니가 되어야겠다. 내 몸과 마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요가적 삶을 더욱 존중해야겠다.


앞서 잠깐 언급했는데 요가는 “운동”의 한 종류라기보다는 삶의 방식 중 하나인 것 같다. 요가는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거대한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필라테스나 PT 등과 같이 요가에서도 몸에 대해, 근육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는, 정적일 수도 있지만 굉장히 열정적인 움직임이 가득한 요가 수련도 있다. 하지만 요가는 내가 앞으로 살고 싶은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체험이자 의지와 더 가까운 것 같다. 작가님은 “요가로 날씬해졌다는 말은 훨씬 더 넓은 차원에서 이해해야 옳다. 날씬한 몸은 하루에 한 시간, 일주일에 세 시간 수련으로 가능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수련이 살을 빼 주는 게 아니다. 요가적인 삶이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 역시 십분 공감한다. 나도 요가를 오래 했지만 우리가 고정관념 가득 담아 상상하는(?) 요가 선생님의 얇고 유연한 몸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항상 기억하기엔 어려워도 뭉친 근육을 좀 더 이완시키려는 노력과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을 굳건히 하고 싶다는 다짐을 항상 갖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결국에는 요가는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이자 의지라는 주장에 다시 한번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벽은 선택이다. 의지이기도 하다. 둘 다 끙끙대기는 마찬가지지만, ‘잠들지 않기 위해 버티는 시간’과 ‘일찍 일어나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시간 사이에는 부정문의 긍정문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매매한 밤보다 뚜렷한 아침이 좋았다. 새벽의 고립보다 아침의 고요에 더 높은 효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아침 사랑”에 대해 또 한 번 유대감을 표하고 이번 독후감을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올드 소울 (old soul)”적 삶을 살고 있다. 아무리 늦게 자도 아침 7시면 눈이 떠지고, 밤잠을 설치게 하는 커피보단 디카페인 차가 더 좋다. 예능과 함께 먹는 야식보다는 아침 뉴스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가 훨씬 더 좋고, 여럿이서 왁자지껄한 술자리 또는 파티보다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규모 모임이 (gathering)이 더 좋다. (심지어 이런 모임도 합당한 (reasonable) 시간대에 이뤄지는 것이 더 좋다. 저녁잠은 소중하니까 말이다.) 주변 친구들이 이런 나의 성향을 관찰하며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유별 난 건가? 하는 의문이 든 적도 있다. 너무 예민해서 잠도 잘 못 자고, 유독 아침 시간을 좋아하는 내가 너무 과한 건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작가님 이야기대로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나의 아침 시간은 “더 오래 못 자서 잠에서 깼다”는 부정문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100% 살아내기 위해 일어났다”는 긍정문이 더 건강한 것 같다. 누가 뭐래도 내가 더 건강하고 좋아하는 시간을 찾고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작가님처럼 내 삶을 아주 반성적으로 돌아보기엔 나는 아주 괜찮은 “워라밸”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무조건 라이프만 찾는 균형이 아닌, 내가 맡은 일을 더 잘 해내고 주변 사람들과 평온한 마음으로 잘 지낼 수 있는 마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열심히 요가적 삶을 지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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