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순간을 한 조각 종잇장 위에
“$1,” “£1,” 1유로”즈음 가격에 팔리고 있는 엽서는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기 기념품 중 하나다. 그 도시, 그 명소의 개성을 듬뿍 담아낸 카드 한 장은 여행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그곳에서 느꼈던 설렘을 상기시켜주는 매체가 되어 오랫동안 기쁨을 준다.
그렇지만 엽서 가격이 참 애매하다. 다른 기념품에 비해서는 분명히 부담 없는 가격이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종이 한 조각을 천 원~이천 원을 주고 사는 거라 사실 계산이 좀 안 맞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자석이나 열쇠고리는 공예 기술과 재료값이라도 들어갔는데 엽서는 (물론 디자인 값도 있겠지만) 예쁜 그림이 인쇄된 자그마한 종이, 그 한 장이 전부다. 머그잔처럼 깨질 수도 있는 무거운 아이템이나 “내가 바로 이 구역의 관광객이요!”라고 외치는 듯한 값 비싼 티셔츠나 후드티보다는 엽서가 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1-2불/유로를 내고 종잇조각을?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드는 여행자에게는 엽서도 그리 좋은 기념품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필자에게 엽서는 가족을 위한 기념품 자석 다음으로 여행 중 반드시 사야 하는 기념품 공동 1위다. (사실 자석은 선물용 기념품이니 나를 위한 선물로서는 기념품 단독 1위라고 할 수도 있겠다.) 마치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는 것과 같이 필자는 일상 속에서도 문득 느껴지는 뭉클함에 대해서 뭐라도 끄적이는 일을 매우 즐기는데 엽서는 여행 중 이를 위한 완벽한 플랫폼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굳이 종이를 사서 펜으로 글을 써야 하냐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타자기를 두드리거나 작은 스마트폰 화면 속을 응시하며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감각이다. 물론 편의에 따라 노트북에 일기를 쓸 수도 있고, 항상 휴대하는 스마트폰의 다이어리나 메모장 어플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엽서 위의 끄적임”이 주는 그 낭만적 감성은 감히 전자기기 스크린이 대체해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필자는 엽서를 좋아해서 매번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여러 장 골라 간직하고 끄적이는 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매번 그 위에 편지를 써서 고국에 있는 친구나 가족들에게 부치지는 못했다. 우선 첫 번째 핑계(?)를 대자면 여행할 때 우체국이 찾기가 꽤나 힘들 다는 점이다. 항상 엽서를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우체국을 발견한 순간 들어가서 부칠 수 있는 상황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여행 중 사서 고생하며 스트레스받는 것보다는 귀국해서 직접 전해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 핑계는 필자의 욕심 때문이다. 마음에 쏙 드는 엽서를 실컷 고르고 나면 혼자서 다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버리는데 같은 디자인의 엽서를 두 장 사지 않았다면 그 엽서는 결국 필자의 소장품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꽤나 모으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스티커, 공책 등 문구류뿐만 아니라 이게 웬걸 아파트 상가에 붙어있는 전단지까지도 열심히 모았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집착스러운 수집 현상을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모아둔 전단지가 가득 들어있던 운동화 박스가 기억 속에 남아있다.) 문구류, 특히 엽서와 같은 빳빳한 종이 재질의 카드를 좋아하는데 여행의 추억까지 한 가득 담겨있는 기념품인 엽서는 당연 그 품목 중 하나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필자에게로부터 여행 중 엽서를 받은 적이 있다면 그대는 분. 명. 필자가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끄럽게도) 엽서를 선물하는 데에 인색한 필자는 엽서에 무슨 내용을 그렇게 열심히 쓰는 걸까? (여기서 잠깐. 그래도 필자는 엽서 아닌 다른 기념품은 친구들을 위해 서운치 않게 챙겨 오는 스타일이다. 물론 ‘셀프 기념품’의 너그러움에 비하면 서운한 정도 일 수 있지만.) 필자는 엽서 위에 여행 중 그 장소, 그 시간에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곤 하는데 이렇게 제한된 면적에 짧게라도 글을 옮기고 나면 그 종이 한 장이 너무 소중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엽서 한 두장’이라는 공간적 제한 때문에 스스로 느끼고 있는 감정을 더 압축하고 효율적으로 시를 쓰듯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그 뭉클함이 배가 되는 듯하다.
원래는 필자가 여행 다닐 때마다 들고 다니는 일기장이 따로 있다. 어쩌다 보니 혼자 멀리 여행을 떠났을 때부터 함께한 일기장이라 센티해지는 마음에 항상 챙겨 다니는 ‘여행 일기장’인데 한 번은 이동 중 짐을 최소화한다고 가져오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다. 이렇게 펜도 있고, 느낀 점도 한가득이라 어떻게든 뭐라도 끄적이고 싶은데 예쁜 공책은커녕 종이 한 장도 찾기 어려울 때 필자는 바로 근처 기념품 샵에 들려 엽서를 몇 장 산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그 위에 천천히 일기를 쓴다. 맛있는 점심과 함께하면 더더욱 좋고, 이럴 때 비까지 내리면 (평소에 비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럴 땐 비 내리는 창가가 제격이다.) 진짜 ‘감성놀이’ 최고다.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진지하게 폼 잡고 이런저런 생각을 끄적이다 보면 엽서 한 두장은 금방 채워지는데 이럴 땐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엽서를 좀 더 사 오기도 한다. 나중에 읽어 보면 오그라들 수도, 너무 ‘드라마 퀸 (Drama Queen)’같을 수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 공간 속 그 순간에 스스로에게 가장 확실한 행복을 주었는데.
여행지를 대표하는 예쁜 그림이 인쇄된 엽서 한 장이 필자에게 주는 감동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엽서 위 사진은 다소 유치한 애니메이션 그림이나, 아날로그 감성이 듬뿍 담긴 스케치, 또는 유명 사진작가가 담아낸 도심, 자연 풍경일 수도 있다. 어떤 그림이 담겨있는 필자 마음에 쏙 드는 몇 장을 골라 아늑한 공간에서 그때 그 순간을 한 조각 종잇장 위에 옮겨 적으면 그 종이 한 장이 그렇게 소중해질 수 없다. 이렇게 간단하게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걸 보면 필자에게 ‘엽서 위 끄적임’이야말로 ‘소확행’의 수단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