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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Aug 11. 2019

공항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면세의 나라

높은 천장과 수많은 수속 카운터들. 알록달록 사이즈도 제각각인 캐리어를 당차게 끌고 다니는 여행자들의 손에는 여권과 티켓 한 장이 꼭 쥐어져 있다. 출국장까지 배웅 나온 사람들은 아쉬움과 괜히 쿨한 척, 그 중간 어딘가의 표정을 짓고 있고 입국장에는 마중 나온 가족, 친구 또는 연인들이 설레는 모습으로 도착 사인을 기다리다 환한 미소로 여행자들을 반긴다. 아쉬운 헤어짐도 있지만 반가운 재회의 공간이기도 한 공항. 그리고 여행자에겐 ‘비일상’의 어딘가로 떠나기 전 가장 설레는 공간일 공항, (물론 누군가에겐 안타깝게도 그 ‘비일상’이 피곤한 이동 근무의 연장선인 출장이 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런 뭉클한 설렘을 주는 공항을 참 좋아한다.

지금까지 네다섯 편 정도 필자에게 ‘뭉클함’을 선사해주는 사물, 음식, 공간 등에 대한 글을 써보았는데 이번 글의 주제를 선정하는 데엔 약간의 고민이 있었다. 필자가 ‘벅찬 감동’(까지나 느낀다)을 느끼는 순간이 과연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인지, 또는 출국 수속 후 면세점에 들어서는 순간인지가 헷갈렸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필자의 적지 않은(?) 물욕과 자본주의가 잘못했다고 아무 말이나 끄적여본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두 공간 모두 다 필자에게는 너무나 뭉클하기 때문이다.

자동문이 열리며 한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 게이트로 들어서는 순간의 설렘은 말로 이루어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순간엔 혼자서 내적 ‘브이로그 (v-log)’를 촬영하며 머릿속에선 나만 들을 수 있는 ‘비지엠 (BGM, Background Music)’까지 틀어놓고 내적 모델 워킹까지 선보인다. (한 가지 더 TMI를 공유하자면 이럴 때 가장 많이 ‘듣는’ 음악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오프닝 사운드 트랙 “Suddenly I See”다. 노래에 맞춰 체크인 카운터까지 걷다 보면 스스로가 ‘프로페셔널한 메트로폴리스의 커리어우먼’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굳이 영어로 표현해야 했냐고 묻는 다변 필자의 답은 Yes다.)

그렇게 체크인을 위해 줄을 설 때면 (‘셀프 체크인 (Self Check-In)’ 서비스도 자주 이용하지만 어차피 짐을 부치려면 줄을 서야 한다.) ‘내적 비지엠’을 잠시 멈춘다. 설렘도 잠시, 이 순간만큼은 은근 긴장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소한 일에도 걱정 근심이 많은 편이라 아무리 확인을 해도 불안해하는 악습관이 있는데 공항 수속 카운터에서는 그 불안감이 항상 배가된다. “부치려는 짐 꾸러기에 나도 모르는 위험 물질이 발견되면 어떡하지?” “나만 체크인이 안 되는 건 아닌가?” “여기선 괜찮아도 도착했는데 비자 문제가 발생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등의 불안거리가 있는데 아무리 소심쟁이라고 놀림받아도 필자에겐 스트레스라 고쳐지지 않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 말은 백번 맞는 듯하다. 그래도 티켓도 받고, 검색대도 통과하고, 마지막 자동 출입국 증명 카운터를 지나면 그 긴장은 언제 있었냐는 듯 증발해버리고 필자의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면세의 나라에 도착했기 때문에!

큰 백화점 같지만 절대 백화점은 아닌 그곳. 면세점의 매력은 국내도 해외도 아닌 그 모호한 ‘그레이존 (Gray zone)’안에서 국외 출국자에게만 허용된다는 그 ‘Exclusive (독점성)’함 때문에 특별함이 더해진다. 여행을 위한 비행기표를 샀는데 마치 특별한 클럽에 가입되는 느낌이랄까? 물론 ‘스카이라운지 (Sky Lounge)’ 이용권과 같은 진짜 멤버십도 존재하지만 필자는 국내에서 출국을 허락받는 동시에 도착할 수 있는 면세점의 분위기로부터 뭉클함을 느낀다.

우선 수속 확인 후 게이트장으로 들어왔으니 미리 주문해둔 면세품 ‘픽업 (pick-up)’을 위해 가까운 면세품 인도장으로 향한다. 여권을 확인받고 번호표를 받고 나면 미리 고심 끝에 주문해둔 면세품을 수령할 수 있는데 (절대로 그럴 일 없지만) 이 순간엔 마치 공짜로 여행 기념품 같은 선물을 받아 드는 느낌이다. (카드내역서가 들으면 실로 어이없을 발언이긴 하다.) 아직 ‘선물(?)’들을 뜯어볼 수는 없으니 당장 면세품 ‘하울(haul)’ 영상을 찍고 싶은 마음은 잠시 참기로 하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출국 게이트까지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점들을 구경하기로 한다.

공항에서 가장 기분 좋아지는 두 장면 (여권&티켓 콤보샷과 수령한 면세품)

사실 필자의 구매력 (purchasing power)은 그렇게 대단치 못해서 공항에 갈 때마다 고삐 풀린 듯 (?) 카드를 긁을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면세점을 놀이공원 같이 ‘환상의 나라’로 표현한 것은 그저 대한민국의 훌륭한 면세점 ‘인프라’와 부가 서비스에 감탄하며 일상 속에서 수고가 많았던 (물론 철저한 자기 판단이지만) 자신에게 평소보다는 조금 더 관대하게 선물할 수 있는 ‘면세’라는 명분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밖에서 샀으면 더 비쌌을 테니까~”라는 이유로 기쁘게 여행의 시작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에서 필자는 면세점 쇼핑을 즐긴다.

비행기를 타고 먼 곳에 다녀오면 그 과정이 험난했을 수도 있지만 좋은 기억이 참 많이 남는다. 새로운 곳에 다시 찾아오기 어려울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여러 번 자기 합리화를 하다 보면 공항 면세점에서처럼 평소보다 씀씀이가 과감해지고 비교적 도전적인 선택이 잦아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한적도 있다, 매일 여행 다닐 때만큼 돈을 쓰며 비싸고 맛있는 음식만 사 먹으면 꼭 일상을 떠나지 않아도 행복할 거라고. 하지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씀씀이와 별개로 개인의 일상에서 물리적으로 벗어나 스스로의 생각을 환기시킨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공항이 주는 출발 전 설렘과 (평소보다는 저렴해서 괜히 엄청난 이득을 보는 소비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면세점이 허락하는 ‘셀프 선물’의 뭉클함을 생각해보자. 당장이라도 지치는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을 향해 탈출하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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