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학용품 진열대 앞에서 설렌다.
초등학생 시절, 엄마한테 받는 500원 1,000원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방구에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창 유행하던 코디 스티커, 또는 당시 '인싸템'이었던 제티 초콜릿 우유 믹스를 사기 위해 문방구에 가기도 했지만 나는 달랑거리는 장식품이 달린 샤프나 화려한 스티커와 편선지 세트, ('편지지'가 아니고 꼭 '편선지' 세트라는 명칭이 붙었었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보기만 해도 뭐라도 끄적이고 싶어 지는 공책을 가장 좋아했다. 어려서 구매력은 작디작았지만 맘에 드는 '화려하고 예쁜 새 것'의 무언가를 우리 집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마음에 문방구를 참 좋아했고, 그만큼 어린 시절 필자가 학용품 진열대 앞에서 느꼈던 설렘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혹은 과거형 '생생한 기억'이 아니라 아직 그 '설렘'이 철저히 현재형일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었는데, 최근에 압구정 '퀸마마마켓'에 방문하고 그 '의문'은 그저 명백한 사실임을 빠르게 인정할 수 있었다. '라이프스타일 편집샵'으로 소개되고 있는 도산공원의 '퀸마마마켓'은 내가 좋아하는 문구류 뿐만 아니라 그릇, 인테리어 소품, 화분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는 공간이다. 규모가 꽤 커서 1-2층에서는 보는 즐거움 가득한 (사는 즐거움도 가득하면 좋겠지만) 라이프스타일 용품을 구경할 수 있고, 맨 꼭대기 층에는 카페가 운영되고 있어 차나 커피 한 잔과 함께 쉬어가기 좋을 것 같았다. 많고 많은 아이템 중 난 당연히 문구류에 제일 눈길이 갔다. 장난스러운 포스트잇부터 시작해서 요즘 잘 안 쓰게 되는 몽땅 색연필, 용도를 모르겠는 문구 소품도 여럿 있었는데 가격이 좀 더 저렴했으면 지름신 여러 번 왔다 가셨을 것 같았다. 실용성보다는 개성으로 승부하겠다는 다짐이 엿보이는 (어찌 보면 ‘예쁨’ 그 자체가 실용성인), 보는 즐거움과 소유하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학용품이 참 많았는데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며 구경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설레고 말았다.
물론 나도 그냥 나올 수는 없었고 (왜냐고는 묻지 말자) 한 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해바라기 색 노트를 한 권 구매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듯이 필자의 최애 색깔은 노란색인데 (노란색 중에서도 레몬 색감의 형광 노랑이 아닌 반드시 따뜻한 주황빛이 0.5% 정도 느껴지는 해바라기 톤 노란색 이어야 한다) 이번 공책은 색깔뿐만 아니라 속지도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그래서 꼭 사야만 했다). 필자의 그림실력은 딱히 자랑할만한 것이 못돼서 ‘두들링 (doodle)’을 위한 백지보다는 만년필로 부드럽게 원하는 생각을 끄적이거나 옮겨 적을 수 있는 유선 속지를 좋아하는데 이번에 구입한 노트가 딱 그랬다. 그리고 사이즈도 딱 좋았다. 필자는 언제든 ‘감성 휴식 타임’을 위해 책이나 작은 일기장을 챙겨 다니지만 무거운 짐은 또 싫어해서 책도 ‘페이퍼백 (paperback)’처럼 가벼운 타입, 노트도 최대 A5 정도의 사이즈를 선호하는데 이번 노트는 사이즈도 알맞고 속지가 과도하게 많지 않아 편안한 무게감을 주는 타입이었다. (노트가 너무 얇으면 가벼워서 좋지만 너무 일찍 다 써버면 그만큼 끄적이는 내용의 일관성을 확립하기가 어려워진다. 반대로 속지 수만 많아서 노트가 굵어지면 벽돌을 들고 다니는 느낌이라 별로다. 역시 뭐든지 과유불급이다.) 어쨌든 여러모로 다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노랭이 노트’를 데리고 나왔는데 (벌써 애칭까지 생기다니...) 앞으로 무슨 내용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채우게 될지 잘 모르겠다. 이 또한 새 노트를 사는 설렘 포인트 중 하나다.
(퀸마마마켓 내부 학용품 진열대 위 노트와 연필들)
(해바라기 색 노트! ‘평화’라는 문구도 마음에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으로 고등급 합리화를 통해 사버린 노트가 한두 권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행지마다, 편집샵 구경할 때마다, 심지어 교내 문구 잡화점에 가서도 “앗- 이건 꼭 사야 해!” 느낌으로 공책을 사들인다. 그래서 아직 미개봉 감성용 일기장/노트가 책꽂이 한 구석에 쌓여(?) 있는데 언제 어떤 용도로 다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필자는 노트의 용도를 정하는 일 마저 버거워하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좀 당황스럽다. 필자는 한 번 노트 내용과 구성의 주제를 정하고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시작한 내용이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번 노트는 망했다”는 말도 안 되는 낭패감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해당 노트에 꾸준히 (일기든 잡문이든) 무언가를 쓰는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성격상 특정 콘셉트 없이 생각날 때마다 아무 내용이나 마구마구 써서 보관하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노트 내용에서 마저 카테고리를 구축하고 체계화를 추구해버린다... 참 피곤한 스타일) 예쁜 새 노트에 글 쓰기를 시작하는 일은 참 어렵게 느껴진다. 아끼는 노트 모두 각각 어느 정도의 테마를 갖고 있었으면 싶은 마음, 아니 욕심 때문에 막상 포장지조차 뜯지 못한 노트가 쌓여가고 있다.
그래도 테마를 잡는 일만 겪고 나면 한 번 시작한 노트는 언젠간 꼭 끝을 볼 수 있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필자의 학용품 구매를 합리화해주고 있다. 한 번 시작한 건 꼭 끝을 보고 싶어 하는 집요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마지막 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의 뿌듯함은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혼자 생각 정리가 안돼서 힘들 때 (꽤나 일상적으로?!) 일기장이나 노트에 당장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들을 (두서없더라도) 열심히 옮기며 스트레스를 풀곤 하는데 이렇게 하다 보면 생각보다 금방 페이지가 채워진다. (속지가 채워지는 속도는 당시 필자의 내적 갈등과 스트레스의 심각성에 비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러니 ‘소확행’을 위해 마음에 드는 유선 노트를 발견하면 사용 여부를 떠나 ‘이렇게 예쁘고 맘에 드는 학용품이 내 것이 됐다’는 소유의 기쁨을 만끽해도 좋을 것 같다. 요즘 쓰고 있는 노트도 거의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지금부터가 진짜 고민의 시작이다. 세계 곳곳에서 사모은, 책꽂이 한 구석에 쌓여있는 노트 중 무슨 노트를 먼저 개시할까? 아, 생각만 해도 설레는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