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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뉴욕

7년 만에 다시 돌아온 뉴욕에서의 뭉클한 일상생활 기록기

by 성급한뭉클쟁이

2025년 3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이라는 클리셰 (cliché)와도 같은 마음을 안고 말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두려움"이란 머나먼 해외에서의 타지 생활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닌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성인이 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 다양한 경험과 인간관계를 통해 가치관은 점점 더 굳혀지는 중이었고, 앞으로는 어떤 선택지를 눈앞에 두고 고민하게 될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수많은 결정을 내리게 될지에 대한 미지수가 굉장히 큰 존재감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렇게까지 심각할 이유는 없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안함을 느낄 나만의 이유는 충분했다. 우선 필자는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 후 연구원 (포닥 postdoc)으로서 미국에 나온 것인데 이런 포닥 생활은 보통 기약이 없다는 점이 큰 몫을 했다. 지금까지는 끝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의 그 가능성 덕분에 되려 편안함을 느껴왔지만 (비겁한 마음일 수 있지만 그냥 나는 항상 그렇게 느껴왔다) 더 이상 마냥 그 미지수를 만끽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고, 이제는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계속해서 "준비 과정 중"에 있는 학생 신분이 아닌 정규직을 향해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생활과 빠른 정착을 위해 언젠가부터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미국 생활에 대한 꿈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컸고, 떠나지 않으면 후회가 막심할 것이 분명했다. 오직 그 마음 하나로 졸업 준비와 함께 수많은 인터뷰를 병행했고 그 결과 지난 3월부터 뉴욕 컬럼비아 대학으로 포닥을 오게 되었다.


앞서 "언젠가부터" 미국 생활을 꿈꿨다고 했지만 사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바로 미국 대륙에 첫 발을 디뎠던 2018년 여름부터다. 7년 전 여름, 학부 졸업을 반 학기 앞두고 있던 나는 운 좋게 교내 프로그램을 통한 미국 인턴십 기회를 얻었는데 정확히는 뉴저지에 위치한 작은 테크 스타트업이었다. 나는 학부 때부터 생명화학공학을 전공했는데 신기하게도 회사의 마케팅 인턴으로 뽑혀 두 달 동안 미국 동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졸업시기가 임박하여 한창 진로고민을 이어가던 나에게 잠깐이라도 학교를 떠나 리프레쉬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 소중했고, 언제나 "큰 물"의 중요성을 외치던 나에게는 더없이 꿈같을 인턴십이었다.


그전 해 가족여행을 다녀온 괌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미국 대륙에 가보는 일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매일 같이 쏟아지는 문화적 입력값들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게다가 뉴저지 소재의 스타트업이었지만 내가 속한 마케팅 팀의 오피스는 맨해튼의 한복판에 위치했기 때문에 일주일에 서너 번 출퇴근하며 보고 느끼고 경험한 뉴욕의 모든 것이 자극적인 콘텐츠처럼 느껴졌다. 워낙 평화로운 도시에서 대학생활을 하다가 처음으로 도착한 "미국"이 하필 뉴욕이라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 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실 더 미국적인 도시는 뉴욕이 아닌 필자가 6개월 동안 교환 연구를 다녀온 플로리다 게인즈빌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도심지를 벗어난 교외 주택 지역에서의 삶이야 말로 가족 단위 라이프스타일을 이어가는 "미국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미국 = 뉴욕"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공식이 뇌리에 박혔고 이러한 허위 광고 때문에 나는 유독 미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품고 두 달 후 귀국 길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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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뉴욕의 모습. 일하면서도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보다는 ‘문화적 교육 (cultural education)’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대표님의 말씀이 인상 깊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뭐가 그리도 좋고 신났을까 싶기도 한데 어린 마음에 지구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에 와서 각자의 이유로 이 도시에 발을 디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참 즐거웠다. 아무리 더럽고 위험해도 뉴욕에서만 볼 수 있는 전시, 맛볼 수 있는 음식들이 있고, 이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이어주는 기회가 참 많다는 점을 느끼고 돌아온 것 같다. 사실 이 모든 일에는 인턴십을 주최해 주신 스타트업 대표 박사님 덕분인데 미국에서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시는 대표님은 어린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과의 멘토링 기회를 참 많이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번에 뉴욕으로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큰 도움을 주신 은사님과도 같은 분이다.) 필자의 경우 공대생이지만 과학기술정책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며 국제 관계 및 기술 정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대표님께서 세계은행 총재님과의 면담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정말 잊지 못할 순간이었고, 실제로 그때의 조언을 바탕으로 이후 진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Screenshot 2025-07-18 at 12.52.40 PM.png 미국에 다녀온 지 2년 후 구매한 핸드폰 케이스. 뉴욕에 정말 진심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필자는 이러한 미국 (연구) 생활에 대한 로망이자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들을 나 역시 조금이라도 맛보고 싶다는 꿈을 갖고 박사 졸업 후 진로를 미국 포닥으로 잡고 졸업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학위 과정 중 플로리다 게인즈빌이라는 미국 시골 생활을 이어가며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절대 도시로 포닥을 가겠다는 목표를 구체화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차 없이도 혼자 생활하기 쉬운 곳이 몇 군데 없어서 선택지를 좁히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포닥 연구실을 알아보면서 학교 랭킹, 지도 교수님 명성, 분야의 유망함 등을 고려하지만 나의 경우 기준은 location, location, location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뉴욕말이다. (다시 읽어보니 연구는 뒷전이고 뉴욕에서 살고 싶었던 마음뿐인 것 같은데 뉴욕은 연구적으로도 굉장히 활발한 도시 중 하나이다. Rockefeller University, Weill Cornell 의대, Columbia University, Mount Sinai Hospital, Memorial Sloan Kettering 등 다양한 연구 기관이 위치하고 있고 실제로 병원과 연계된 연구소도 많아서 훌륭한 의학 연구가 수행되고 있다.)


수많은 메일을 보내고 인터뷰를 진행한 이후 필자는 두 랩에서 오퍼를 받게 되었는데,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아주 쉽게 선택할 수 있었다. 연고도 없고 취향 차이도 존재하는 미국 서부 대신, 내가 익숙한 곳, 7년 전 내가 사랑에 빠졌던 바로 그 도시, 다시 뉴욕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덕분에 타지 생활에 대한 두려움은 떨쳐내고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출국 날짜를 정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 생활에 대한 아쉬움도, 나의 청춘을 바친 대전 생활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도 굉장히 뭉클하게 다가왔다. 특히 미국 생활을 하는 동안 그리울 사람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졸업을 기념하며 조금은 이기적인 선택을 이행하게 됐고 미국에 도착한 지 4개월이 조금 지나가는 지금, 한국에 있는 얼굴들이 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내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다.


기약이 없는 뉴욕 생활을 다시 시작한 만큼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최대한 건강하고 알차게 지내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포닥 월급으로 비싼 뉴욕의 렌트를 감당하며 금융적으로(?) 즐거운 삶을 영위하기엔 큰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즐기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럴 때는 오히려 작은 경험이나 짧은 대화에도 큰 뭉클함을 느낄 수 있는 나의 성향이 큰 선물처럼 느껴진다. 학회 세미나에서 마주친 편집자와의 대화, 산책 중 우연히 발견한 디저트 맛집, 비싼 운동 수업에 등록할 형편은 안되어도 마음에 쏙 드는 러닝 루트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어떻게 하면 저렴하게 식료품 쇼핑을 할 수 있을지 다양하고 소소한 항목에서 나만의 팁들이자 지혜가 쌓이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겪고 있는 내가 자랑스럽고 모든 시간이 참 즐겁다.


이토록 소중한 시기를 잘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해 이번 브런치북 연재에 도전하기로 했다. 최근 들어 바쁘다는 핑계로 노트북 앞에 앉아 차분히 글 쓰는 일을 게을리했는데 뉴욕에 도착한 지 4개월쯤 지나니 다시 그 동기부여가 채워진 것 같다. 앞으로도 내가 경험하는 뉴욕에서의 삶, 다시 뉴욕에서 이어가는 뭉클한 일상에 대해서 열심히 작성해 보겠다.

IMG_6648.JPG Welcome to New York! (2025년 기준 카트 하나 대여하려면 세금 포함 9천 원이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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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