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의 중심이 되는 뉴욕에서의 연구 생활
대전 소재 대학에서 십 년 넘게 공부를 마치고 박사 후 연구원으로서 미국 뉴욕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리는 느낌이 강했고, 무엇보다 중고교 시절의 중국 상하이, 20대 청춘을 바친 대한민국 대전에 이어, 졸업 후 나의 새로운 챕터를 뉴욕에서 맞이할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미국에서의 연구생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약 2년 전 "플로리다에서 연구하기"라는 글에서 소개했듯이 필자는 박사과정 중 6개월 동안 플로리다 주립대의 치의과대학으로 교환 연구를 다녀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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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환자 검체를 직접 다룰 수 있는 공동연구 기회가 있어서 짧게나마 미국에 다녀왔는데 짧게 소감을 남기자면 매우 심심하긴 했지만(?)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필자는 어떤 일이든 결국 함께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편인데, 플로리다 게인즈빌 (Gainesville)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하나 같이 다 친절하고 여유 있었다. 지역적 특성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 플로리다의 기후는 일 년의 대부분 따뜻했고, 치열한 삶 속에서 수많은 경쟁에 시달리는 동부 또는 첨단기술의 본고장으로서 고급진 도시적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서부와 달리 (사실 이 또한 굉장한 일반화이지만..) 내가 경험한 플로리다의 사람들은 굉장히 "칠 (chill)"했다. 플로리다 주립대 역시 높은 랭킹을 자랑하는 공립대학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비교적 느긋한 페이스 (pace)를 유지했고, 활발한 도시생활이 아닌 정겨운 시골생활에 더 가까운 생활방식을 택했다. 실제로 게인즈빌은 "도시"라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인구 역시 14만 명을 조금 넘는, 대전 인구의 십 분의 1도 채 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플로리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바닷가 휴양지 마이애미 (Miami)나 세계 최대 규모의 디즈니월드가 위치한 올랜도 (Orlando)가 아닌 소박한 매력의 미국 교외 지역 대학 도시 (University town) 그 자체였다.
그래서인지 잠깐이었지만 플로리다에서 지내는 동안은 많이 심심했다. 물론 혼자 지내도 (alone) 외로움을 (lonely) 잘 느끼지 않는 성격 덕분에 잘 적응하여 나만의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지만 그때는 기회가 닿는 한 계속해서 게인즈빌을 벗어났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Christopher Columbus) 미국에 도착한 날을 기념하는 콜럼버스 기념일 주말 연휴에는 보스턴에, 추수 감사절 (Thanksgiving) 연휴에는 뉴욕에, 그리고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남부 캘리포니아에 다녀왔다. 이렇게 직접 떠나지 않으면 친구들을 보기도 어려웠고, 문화생활이라고 할 만한 콘텐츠를 접하기 어려웠다. (가장 흥미진진한 경험은 근처 스프링 (Spring)에서 매너티 (manatee)를 구경하는 정도랄까.)
그렇게 게인즈빌에서 소소한 연구 생활을 이어가며 따분한 순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바로 다음 행선지에 대한 구체적 기준인데, 필자는 박사 졸업 후 포닥은 반드시 대도시 (metropolis)에서 하겠다고 다짐했다. 연구실 후보군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도심 한복판에 있는 학교와 연구실만 살펴보았고, 그 결과 졸업과 동시에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포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뉴욕에 도착한 지 이제 막 4개월 조금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차이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자주, 그리고 적극적으로 모인다. 이전에는 연구실로 출퇴근을 하며 같은 층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장비를 나눠 쓰는 연구실 사람들과 실험 조건을 비교 분석하고, 퇴근 후 요가원에서 만난 친구와 밥을 먹고, 장 봐온 먹거리를 정리하고 룸메들과 담소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반면에 여기서는 필자가 고용된 협의 자체가 "합동 박사 후 연구원 (joint postdoc)"이라 소속된 연구실이 두 군데이며, 덕분에(?) 서로 알아가고 협업해야 하는 동료 연구자의 수도 두 배가 되었다. 또한 학과 별로 다양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교수님들마다 지인을 초청하여 강의를 부탁하거나 대학원생 또는 포닥들에게도 발표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완성된 또는 완성되어 가는 단계의 다양한 연구 이야기를 접하고 토론할 수 있다. 심지어 뉴욕 소재의 다양한 연구 기관들끼리 조약을 맺어 분기에 한 번씩 주제별로 세미나를 열곤 하는데 신청만 하면 무료로 참석할 수 있는 행사들이 대부분이고, 최근에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뉴욕 게놈 센터 (New York Genome Center)의 RNA symposium에 참석하여 유익하고 재밌는 (또 시내에 온 김에 맛있는 밥까지 먹고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뉴욕은 워낙 다수의 연구기관, 일류 대학 그리고 제약 및 바이오 테크 기업이 자리 잡고 있는 대도시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연구 생활을 이어가는 한국인 과학자분들이 굉장히 많이 계신다. (그리고 필자 역시 그중 한 명이다!) 그리고 이들 간의 네크워킹을 위해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는데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Korean-American Scientists and Engineers Association, KSEA), 뉴욕 한인 생물학자 협회 (New York Korean Biologists, NYKB)등 미국의 다양한 기관에서 연구활동을 이어가는 과학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는 학회가 흔히 주최된다.
새내기 포닥이라 새로 공유할 연구결과는 전무했지만 이와 같은 행사에 열심히 참여했다. 꼭 데이터가 있어야 참석할 수 있는 성격의 학술대회는 아니었고, 필자는 워낙 학회를 좋아하는 편이라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내가 학회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특히나 이곳에서는 내가 등록할 수 있는 행사들이 있다는 점 그 자체가 참 좋았다. 이전에 지냈던 곳들과는 달리 뉴욕에는 여러 연구 기관의 연구자들을 분야 특이적 또는 불문하여 한 곳에 모아 네트워킹을 도모하는 자리가 많이 개최되고, 나는 빈손 대신 박사 말년에 수행한 연구 내용을 담은 포스터를 뽑아 들고 미국에 연구하러 온 다양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실제로 나는 포스터와 엘리베이터 피치 (elevator pitch, 엘리베이터를 타는 짧은 시간 동안 간단하고 명료하게 본인 일에 대해 소개하는 일.) 우수 발표자로 선정되어 작지만 소중한 상금을 받기도 했다! 50불 정도의 아마존 기프트 카드였는데 어려운(?) 살림살이에 큰 도움이 되어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장학금도 신청해서 큰 상도 받아보고 싶다!
또 한 가지 신기했던 건 한국의 기업 또는 대학에서 뉴욕 같은 큰 도시로 채용 설명회를 많이 와주신다는 점이다. 옛날 옛적 고등학교 시절 가고 싶은 대학 입시 설명회를 떨리는 마음으로 참석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이제는 같은 대학들의 신임교원 임용설명회에 뉴욕 소재의 어엿한 박사로서 다녀오게 되었다. 예전에 대학원생이 되어 학부 수업의 조교로 활동했을 때는 나의 학창 시절 마냥 어른 같고 박학해 보이던 조교님들이 그저 나 같은 사람이었구나(?) 싶었는데, 이제는 비슷하게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임용을 꿈꾸는구나 싶은 마음에 이질감이 들기도 하고 신기한 마음도 들었다.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네트워킹 행사에 다녀오면 정보 교류도 되고, 실제로 좋은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얻어 취직에 성공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장점이 하나 있으면 단점도 하나 있는 법. 컨디션이 안 따라주는 날에는 괜히 네트워킹 차 학회에 참석했다가 진이 빠지기도 한다. 비슷한 분야를 공부하면서 그토록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사는 박사님들의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아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되려 의욕이 꺾이는 날도 있다.. ( 나 한 명 연구 안 해도 세상에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 그런 마음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스무 살 걱정쟁이가 아닌, 꽤나 회복력 있는 (resilient)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금방 마음을 고쳐먹곤 한다. 그리고 이제는 꼭 세상에 나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서 큰일이 날 만큼 내가 중요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 일이 나에게 중요하고 재밌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도 연구 외적으로 재밌는 일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뉴욕에서 연구 생활을 이어가며 건강한 마음을 유지해야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못생긴 질투심이나 비교를 통한 좌절감이 아닌, 긍정적이고 유익한 마음을 담아 더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최대한 걱정은 줄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나만의 포트폴리오를 쌓아가야 지금 이 시기가 끝나고도 더 뿌듯하지 않을까? 최근 읽은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에서는 "비교는 암이고 걱정은 독이야"라는 대사가 인상 깊었는데, 뉴욕에서 연구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한 마디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온갖 연구자들이 모이는 뉴욕에서 주중은 주중대로, 주말은 주말대로 내 삶을 즐기며 지금 이 시간을 만끽하고 더 멋지고 실력 있는 박사로 거듭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