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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이름값, 뉴욕 베이글

by 성급한뭉클쟁이

파리 하면 "바게트" (또는 "크루아상"), 런던 하면 "스콘", 도쿄 하면 "도쿄 바나나"가 생각나듯(?) 뉴욕 하면 생각나는 빵은 바로 베이글이다. 베이글은 간식이 아닌 식사용 빵이라 그 자체에는 단 맛이 가미되지 않고, 전통적인 베이글의 재료는 밀가루, 물, 소금 그리고 이스트가 전부다. (그래서인지 "다이어트 빵"이라는 기분 좋은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높은 밀도의 탄수화물 양을 고려하면 절대 다이어트 용은 아니다. 게다가 잔뜩 발라 먹는 지방 가득 크림치즈까지 더해지면 칼로리는... 이미 상상을 초월한다.) 이렇게 준비한 밀가루 반죽을 링 모양으로 빚어 먼저 끓는 물에 데치고 구워내는 것이 바로 베이글이다. 달달하고 고소한 버터의 풍미를 자랑하는 디저트 용 페이스트리 (pastries)가 아닌, 다소 심심할 수도 있는 식사빵이 어떻게 뉴욕을 대표하는 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먼저 역사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면 베이글은 16세기에서 17세기 초반 동유럽 유대인과 슬라브인이 많이 먹던 빵이었다. (그럼 그렇지, 결국 다 외국에서 들어온 전통이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유럽의 유대인이 북미 대륙으로 집단 이주하였고, 그들이 미국 동부에 정착하면서 베이글이 미국 전역과 전 세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20세기까지 더 많은 유대인들이 뉴욕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뉴욕이 베이글 원조 도시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역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인종, 문화, 사상 등 여러 요소를 하나로 융합하는 "용광로"의 본고장, 결국 베이글도 뉴욕의 "멜팅 팟 (Melting Pot)"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하나의 예시라고 생각한다.


베이글은 특정 문화권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왔는데 그 매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기준으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첫 번째 매력은 바로 식감이다. 베이글은 꽉 차 있지만 쫀득한 식감 덕분에 그냥 먹어도 맛있고 토스터기에 구워 바삭하게 즐겨도 좋다. 말 그대로 "겉바속촉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한 식감은 꾸덕한 크림치즈와도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데 아마 그래서 베이글 가게마다 다양한 크림치즈를 자체개발하거나 함께 세트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는 듯하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유연한 "페어링 (pairing)"이서다. 베이글의 대표적인 짝꿍으로서 크림치즈가 누구보다 강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지만 베이글은 어떤 재료와 함께해도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빵식의 기반이 되어준다. 아보카도는 물론이요, 계란 (프라이든 스크램블이든)과의 케미 또한 매우 인상 깊다. 좀 더 고급진 식사를 원하는 날에는 좋아하는 크림치즈 스프레드와 "록스 (lox, 훈제 연어)"를 곁들여 즐길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본이 되는 조합은 에멘탈 치즈, 아보카도 그리고 계란인데 이미 완벽한 조화임에도 여기에 금상첨화로 미국 인기마트 트레이더 조 (Trader Joe's)의 "Everything But The Bagel Sesame Seasoning Blend"를 뿌려주면 게임 끝(?)이다. 작년부터는 에브리띵 베이글 시즈닝에 포함된 양귀비 씨앗이 한국에서는 마약류 성분으로 구분되어 반입이 금지되었으나.. 짭조름한 감칠맛을 더해주는 비슷한 시즈닝 제품을 사용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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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치즈, 아보카도 그리고 계란의 조합은 베이글 샌드위치의 훌륭한 "이불"이 되어준다. 플렉스 하고 싶은 날에는 훈제연어를 주문해서 함께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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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재료 없이 크림치즈에 에브리띵 베이글 시즈닝만 뿌려먹어도 짭짤 고소한 맛이 참 좋았다. 베이글 토스트는 뉴욕에 와서 출근 전 아침으로 가장 자주 해먹는 메뉴다.

세 번째 이유는 커피와의 조화 (harmony)다. 묵직한 블랙이든 고소한 우유가 담긴 화이트든, 부드럽고 섬세한 드립이든 진하고 농축된 에스프레소든, 나는 커피를 정말 좋아한다. 좋아하는 만큼 양껏 마실 수 있는 카페인 내성이 없어서 애석할 뿐... 대신 오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커피 타임을 갖고 있다. 이때 조합이 좋은 아침 메뉴가 바로 베이글이다. 좋아하는 원두를 드립 커피로 내려서 간단하게 베이글을 구워 크림치즈와 먹어도 좋고, 앞서 소개한 대로 좋아하는 재료를 양껏 올려 먹으면 그날은 점심까지 (또는 늦은 오후까지!) 포만감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우유가 들어간 부드러운 커피와도 매우 잘 어울리는데 필자가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커피와 베이글의 세트는 바로 "포비 (Four B) 베이글"에서 맛볼 수 있다. 포비 베이글은 호주식 커피와 베이글을 판매하는 곳인데 거품 가득한 카푸치노 또는 플랫화이트와 매일 판매되는 맛이 바뀌는 "오늘의 베이글", 그리고 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크림치즈 추천을 부탁드리면 맛은 무조건 보장된다. (문득 해외 데이팅 어플인 "Coffee Meets Bagel"의 작명 센스가 돋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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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닥 생활을 앞두고 미국 비자 인터뷰를 마친 후 광화문 포비 매장에서 모닝 베이글을 즐겼다. 2월 중순, 눈이 참 많이 내린 날 덕분에 카푸치노와 함께 따뜻한 아침을 보냈다.

포비 베이글 외에도 한국의 고유한 베이글 카페가 여러 곳 있는데 그중 특유의 쫀득함을 극대화한 브랜드인 "런던 베이글 뮤지엄"도 인상 깊었다. 항상 대기 줄이 너무 길어 도전할 엄두도 안 나고 SNS에서만 자주 보이는 베이글이라 반신반의하던 중이었는데 올 연초 드디어 매장 입장과 구매에 성공하여 맛을 볼 수 있었다. 뉴욕의 전통 베이글과는 완전히 다른 "떡" 식감과 짠맛보다는 단 맛이 강했는데 "런베뮤"의 베이글은 커피보다는 우유와 함께 먹었을 때 조합이 좋은 베이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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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드디어 구매에 성공한 런던 베이글 뮤지엄. 이제는 하나의 고유명사이자 장르가 되었지만 사실 전통 뉴욕 베이글과는 차이가 크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떡 같은 식감이 특징이다.

이렇게 한국에서부터 좋아했던 베이글을 뉴욕에 오니 더 많이 먹게 되었다는 점이 본 글의 요지다. 그렇다면 이곳의 베이글은 뭐가 다르기에 뉴요커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우선 도시 곳곳에 유명한 베이글 체인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Russ & Daughters, Pop-up Bagel, Apollo Bagel, Leon's Bagel, Best Bagel, Ess-A Bagel 등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베이글 집도 있고, 최근 들어 SNS를 뜨겁게 달군 "바이럴 (viral)" 베이커리도 많다. 워낙 지점이 많아 접근성이 뛰어난데, 수요가 많아서 공급이 따라온 건지, 또는 공급이 많아 뉴요커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메뉴가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뉴욕의 베이글은 다양하다. 먼저 베이글 종류만 해도 기본 열 가지가 넘어간다. 먼저 기본 (Plain)이 있고, 앞서 언급한 에브리띵 베이글 시즈닝이 뿌려진 "에브리띵 (Everything)"이 있다. 참깨가 뿌려져 있거나 (Sesame), 양귀비 씨앗 (Poppy), 시나몬과 건포도 (Cinnamon Raisin) 조합도 특히 구웠을 때 맛이 좋고, 통밀 (Whole Wheat), 블루베리, 양파, 마늘, 계란, 호밀 흑빵 (Pumpernickel) 그리고 형형색색의 색조 때문에 먹으면 큰일 날 것 같지만 나름 매력 있는 "맛"의 레인보우 베이글이 있다. 크림치즈 스프레드 종류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베이글 체인인 Ess-A Bagel의 경우 크림치즈의 종류만 스무 가지가 넘고 유당불내증 (lactose intolerance) 또는 유제품 섭취를 지양하는 비건 (vegan) 손님들을 위해 두부로 만든 "크림치즈" 스프레드까지 제공한다. 베이글 하나로도 다양성 (diversity) 그 자체를 보여주는 모습이야 말로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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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 뉴욕에서 베이글 주문이 어려울 수 있다. 너무 많은 선택지들 앞에서 어질어질해지는데 여유가 없다면 무조건 "시그니처" 인기 메뉴를 추천한다.

뉴욕의 수많은 베이글 집을 섭렵하기 위해 매번 베이글과 크림치즈 세트를 사 먹은 것은 아니다. 베이글을 반으로 갈라서 토스트 하고 직접 스프레드를 발라주는 샌드위치는 생각보다 매우 비싸기 때문이다. (평균 $13-15 정도이고 스테이크나 연어처럼 더 비싼 단백질을 추가하게 되면 베이글 샌드위치 단품 하나가 $20을 훌쩍 넘을 때도 있다. 요즘 환율을 생각하면 더욱 높은 가격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Too Good To Go"이다. 직역하면 "떠나기엔 너무 좋은, " 의역하면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이라는 뜻의 음식 나눔 서비스이자 어플인데 베이글뿐만 아니라 다양한 음식점의 마감시간에 맞춰 당일 생산된 음식을 폐기하는 대신 저렴한 값에 떨이로 판매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 필자와 같은 가난한(?) 외국인 연구자에게는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소중한 어플인데, 값이 싸도 음식 퀄리티가 나쁘지 않고 덕분에 더 다양한 뉴욕의 레스토랑, 베이커리 및 델리 (deli)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다. 일반적으로 베이글 하나에 $3-4 정도인데 어플을 사용해서 마감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베이글 7개를 $4.99 또는 5.99에 구매할 수 있다! (미친 가성비!) 심지어 가계 아르바이트생과 친해져서 기분 좋은 스몰톡을 나누는 날에는 시나몬롤 하나를 더 선물 받기도 한다. 낭비 없이 맛있는 베이글을 저렴한 가격에 득템 할 수 있으니 서로 윈윈 (win-win)하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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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Good To Go 어플을 사용해 미드타운에 35번가에 있는 "Best Bagel"에서 베이글을 종류별로 일곱 가지 담아왔다. 가격은 택스 포함 $5.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남이 만들어주는 베이글 샌드위치가 제일 맛있긴 하다. 얼마 전 학회에서 사귄 친구가 뉴욕에 놀러 와 베이글을 나눠 먹으며 한참 수다를 떨었는데 H&H Bagel의 계란 샌드위치와 스테이크 샌드위치를 주문해서 반반씩 나눠먹었다. 녹아내리는 치즈와 함께 포슬포슬하게 익은 달걀 스크램블, 그리고 따뜻하게 토스트 된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먹었더니 이래서 남이 차려주는 밥이 제일 맛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IMG_6043.JPG H&H Bagel - 베이글 샌드위치를 주문할 땐 꼭 친구와 다른 맛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어차피 반으로 갈라주시기 때문에 한 번에 두 가지 맛 모두 즐길 수 있다.

도심 속을 걷다 배꼽시계가 울리는 순간이 있다. 가장 빠르게, 든든하게, 맛있게 끼니를 해결하고 싶은 날에는 단골 가게로 걸음을 옮겨 꾸덕한 크림치즈가 발린 베이글 샌드위치를 "왕" 하고 한 입 베어 먹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뉴요커"가 아닐까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안드레아는 극 초반 몸무게나 패션에 대해 신경 쓰지 않던 시절 출근길 아침에 양파 크림 베이글 샌드위치를 사 먹고 핀잔을 듣게 된다. 나 역시 몸무게를 생각하면 너무 양껏 먹어서는 안 되겠지만 건강한 조합으로 나만의 든든한 아침을 책임져줄 베이글을 이곳에서 더 오래 자주 먹고 싶은 마음이다.

FXJdW-7WIAIbvAc.jpeg 속편 제작에 한창이라고 알려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베이글뿐만 아니라 또 한 번 아름답게 담길 영화 속 뉴욕의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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