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저 걷고 또 걷는 뉴요커 라이프 스타일
주말, 드디어 주말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말이 찾아왔다!
이토록 주말을 고대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내 페이스에 맞춰 여유롭게 뉴욕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포닥으로서 근무 중이다 보니 주중에는 (또는 주중에라도) 실험실에서 집중하지 않으면 나에게 주어진 연구량을 소화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연구"라 함은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대한 연구 질문 (research question)을 잘 소화하고, 이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어떤 근거가 필요한지 고민하고, 심사숙고 후 설계된 실험 디자인을 바탕으로 유의미한 데이터를 얻어 (얻기 위해 노력하여) 지도 교수님들과 함께 이를 해석하고 새로운 스토리라인을 만들기 위해 미팅 자료를 만드는 등의 일을 가리킨다. 물론 그 외에도 실험실 동료들 간의 협업이라든지, 세미나 참석, 또는 담당 실험 장비나 특정 구역 청소 및 재고 정리 등이 있는데 다행히 학생일 때에 비해 잔일거리는 줄었지만 한 실험실의 구성원으로서 맡은 바에 열심히 임하고 있다.
무엇보다 컬럼비아 대학 메디컬 캠퍼스는 168번가, 즉 맨해튼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번 다운타운으로 이동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물론 같은 뉴욕시 자치구 (borough) 내라 16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 도착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장에서 급행열차를 타도 최소 45분 정도 소요되고, 고유한 매력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윌리엄스버그나 브루클린까지 가려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일 땡땡이가(?) 어렵다면 여유 있는 시티워크 (CityWalk)를 즐기기 위해선 주중에 잠깐 짬을 낸 찰나가 아닌 주말의 하루 또는 이틀이 필요하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시티워크 (CityWalk) 란 무엇인가? 직역하면 "도심 속을 걷다"는 의미 정도이고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즐기는 산책 또는 도보 여행"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물론 뉴욕 특이적으로 해당 정의를 수정하자면 "천천히"라는 부사는 반드시 빼야 할 것 같다. 시티워크는 여전히 "A점에서 B점으로 이동하기 위한 경보"를 가리키는 동사는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속도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워낙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뉴요커들의 보행자 문화를 고려하면 뒷사람한테 욕먹고도 남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의 생리에 맞게 "느긋함"을 덜어내면 뉴욕에서의 시티워크 역시 단순히 걷는 행위뿐 아니라 도시의 다양한 공간과 문화를 경험하고, 유흥, 관광, 쇼핑 등을 목적으로 도심 속을 탐색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주말이 찾아오면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 때문에 지치고 무기력해지다가도 정신을 차리고 외출 준비를 하게 된다. 직장 탓에 워낙 윗동네에서 지내며 "뉴욕"에 대한 현실감을 잃어가다가도 결국 기억해내고 만다, 나 지금 뉴욕에서 살고 있는데? 하고 말이다. 까먹을뻔하지만 결코 이곳은 (거칠게 계산해도) 매년 6,400만 명 정도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뉴욕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당장 집에서 뒹굴며 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 당장 구글맵 어플을 켠다. 그리고 오늘은 어느 동네를 탐방해 볼까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루트를 짜기 시작한다. 워낙 개성 넘치는 동네 (neighborhood)가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한 번에 모든 지역을 둘러보기는 어렵고 인근에 위치한 두 동네 정도를 계획해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뉴욕은 다섯 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흔히 "뉴욕"하면 떠올리는 곳은 대부분의 경우 맨해튼과 브루클린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양키 스타디움 야구 경기장은 브롱스에 위치하고 롱아일랜드에도 몬탁 (Montauk) 등 다양한 관광지가 자리 잡고 있지만 말이다.) 맨해튼과 브루클린만 해도 세부적으로 너무 다르고 특유한 동네가 넘쳐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관광객의 마음가짐으로 빠르게 훑어보는 대신 로컬로서 동네별 매력을 깊게 섭렵하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 넉넉한 시간을 투자하는 게 좋다.
지금까지 첼시 (Chelsea), 소호 (SoHo), 그린위치 빌리지 (Greenwich Village) 등 다양한 동네를 한 번에 한 군데씩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데 최근 다녀온 곳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동네는 바로 이스트 빌리지 (East Village)다. "이서진의 뉴욕뉴욕"에서 소개된 대로 이서진의 모교로서 더 유명해진 뉴욕대학교 (New York University, NYU)의 캠퍼스들이 건물 하나하나씩 모여있는 동네와 매우 근접한 이스트 빌리지는 그만큼 젊은 대학생들이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굉장히 "영 (Young)"한 분위기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카페들도 많고 (충전용 콘센트가 구비되어 있는 카페가 많아 뉴욕의 "카공족"을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점심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레스토랑도 몰려있다. 그중에서도 어린 친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디저트 카페가 즐비하는데 한 번 입소문을 타면 "바이럴 (viral)"해져서 온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줄을 서고 있는 풍경을 쉽게 볼 수도 있다.
그중에서 최근 다녀온 곳은 바로 Mary O's Irish Soda Bread Shop이다. 이스트 빌리지의 7번가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음료 메뉴도 다양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디저트 메뉴 역시 단일 메뉴를 고집하는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대를 잘못 잡으면 긴 줄을 기다려야 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 메뉴는 바로 아일랜드식 "소다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스콘"으로 알려진 빵과 비슷한데 아일랜드 스타일대로 이스트 대신 소다를 넣어 부풀린 반죽으로 구워낸, 버터 풍미가 아주 고소한 빵이다. 클로티드 크림과 잼을 발라먹는 영국식 전통 스콘과는 비슷한 듯 또 다르게 이곳에서는 아이리쉬 Kerrygold의 버터 덩어리와 알맹이가 그대로 씹히는 수제 블랙베리 잼을 소다빵과 함께 제공해 준다. 보기에는 정말 단순해 보이지만 오븐에서 갓 구워진 빵의 열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달콤한 잼을 곁들여 먹다 보면 빵 속의 버터 조각이 녹기도 전에 순식간에 빵이 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간단히(?) 배를 채웠다면 이제는 또 움직일 차례다. 버터의 고소함과 잼의 달콤함이 가득 담긴 소다빵을 앉은자리에서 다 먹어 치워 버린 만큼, 이제는 걸음으로써 또 칼로리를 소비할 시간이 온 것이다. 이스트 빌리지에서는 쉽게 갈 수 있는 두 가지 공원 선택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톰킨스 광장 공원 (Tompkins Square Park) 그리고 두 번째는 워싱턴 광장 공원 (Washington Square Park)이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라 그런지 공원에 광장이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많은 행사가 주최된다고 한다. 버스킹, 플리마켓뿐만 아니라 숏폼 영상 제작을 위한 촬영지로서 특히 워싱턴 스퀘어 파크가 많이 활용되고 있고, 학생들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 집결장소 역시 캠퍼스 근처 공원이라고 한다. 나는 소호 또는 이스트 빌리지를 방문할 때 중간 쉬어가는 지점으로서 해당 공원들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잠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단순히 그날의 날씨를 즐기며 사람 구경을 하거나 테이크아웃한 디저트를 마저 끝내고 다음 이동 장소를 물색하기도 한다.
충분한 휴식 시간을 즐겼다면 다음으로 이동해 볼 장소는 바로 북클럽이다. 갑자기 독서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니고 북클럽이라고 하는 이스트 빌리지의 책 "바 (bar)" 겸 "카페 (cafe)"에 가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입구 쪽 긴 카운터 자리에 앉아 알코올 주류를 주문할 수도 있고 (즉 독서를 핑계 삼아 합법적으로(?) 낮술이 가능한 공간이다!) 그저 여유로운 주말 아침잠에서 깨어나고 싶다면 커피를 주문해도 괜찮다. 또한 안쪽에는 사장님과 직원들의 입맛에 맞는 큐레이션 정보와 책 진열대를 구경할 수 있는데 모든 책은 다 판매 중이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한 권을 발견하면 바로 결제하고 탐독할 수 있는 곳이다. 책 말고도 귀여운 굿즈와 인테리어 소품을 구매할 수도 있으니 시간 여유가 되는 만큼 구경하기도 좋다.
전해 듣기로는 이스트 빌리지에 밤이 찾아오면 라이브 공연과 더불어 술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클럽이나 바가 굉장히 많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취향도 벗어나고 음주가무를 마음껏 즐길만한 체력도 친구들도 남아있지 않아 뉴욕의 밤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지만 이렇게 전해 들은 바라도 열심히 기록하려고 한다. (또는 브런치 글 콘텐츠를 위해 한 번 정도 구경 가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귀가 길 치안이 걱정되기 때문에 지금 내가 고집하고 있는 나만의 스타일대로 뉴욕을 음미하기로한다.)
책 구경도 실컷 하고 공원이나 길가의 강아지들과 인사도 마쳤으면 또 한 번 발걸음을 옮길 차례가 되었다. 다시 배꼽시계가 울리는 걸 보니 약속시간이 다가온 것 같다. 시티워크의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물론 누군가와 함께하면 그 재미가 두 배가 된다는 점도 있다. 게다가 평소 다녀오고 싶었던 맛집에 가게 되면 메뉴를 두 배나 시도할 수 있으니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커지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스트 빌리지는 대학생들이 주 고객층이기 때문에 너무 고급지고 호화로운 분위기의 레스토랑보다는 간단히 "가성비"있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들이 많다. (여기서 가성비라는 단어에 인용 부호를 더한 이유는 뉴욕 기준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가격 이야기는 추후 더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값이 저렴하다고 절대 맛이 저하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브루클린 SUNY 병원에서 근무 중인 친구와 Pasta de Pasta라는 파스타 집에 다녀왔는데 페투치니 알프레도 (Fettuccine Alfredo) 한 그릇을 $9.90에 즐길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단백질 토핑이나 치즈, 아란치니나 티라미수 같은 사이드나 디저트 메뉴를 각각 주문하게 되면 인당 $20을 훌쩍 넘기는 한 끼가 될 수도 있지만 커다란 치즈휠에 수제 페투치니 면을 코팅하고 푸짐한 새우, 소고기 또는 치킨을 함께 곁들여 먹으면 든든한 한 끼가 완성된다. 워낙 느끼한 크림소스 파스타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과도한 팁이나 서비스 요금 없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파스타였다.
그리고 후식으로는 Kolkata Chai Co. 콜카타 (Kolkata)는 인도 도시의 지명인데 인도 전통의 마살라 (Masala) 차이 (Chai, 차)를 맛볼 수 있다. 워낙 차이 티 라테 또는 매콤한 향신료 향이 더해진 더티차이를 좋아하는 편이라 기대하고 방문한 곳이었는데 주문한 Chai 맛 선데 (Sundae, 소프트 아이스크림)는 차이향이 정말 강하고 우유맛이 강해서 좋았다. 뉴욕은 워낙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도시이기 때문에 어떤 나라의 음식이든 제대로 된, 대충 따라 하려는 것이 아닌 진품의 (authentic)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 같아서 참 좋다. 이게 바로 국제도시에서 살아가는 묘미가 아닐까 싶다.
주말마다 뉴욕 도심 속을 실컷 걷다 보면 왜 그토록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뉴욕에서 활동 중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음식은 하나의 카테고리일 뿐, 미술, 음악, 패션, 여행, 피트니스 등 수많은 분야에서 콘텐츠화할 수 있는 내용물이 차고 넘치는 것 같다. 나 역시 2019년부터 브런치 작가로서 글을 쓰고 있지만 한동안 꾸준하지 못했던 글쓰기를 뉴욕에서 포닥으로서 다시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냥 지나가기에는 너무 많은 입력값 (input)이 존재해서 꼭 기록하고 이곳을 떠난 이후에도 돌이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서든 누군가와 함께든 앞으로도 뉴욕의 주말, 그중에서도 시티워크를 마음껏 즐겨보려고 한다. 아직도 구글맵에 저장만 해둔 디저트 가게는 셀 수가 없고 계절마다 즐길 수 있는 먹거리와 놀거리도 다양하니 천천히 동네마다 액티비티마다 보물함에서 하나씩 꺼내보듯이 브런치 글을 통해 소개하고 공유해 보도록 하겠다. 독자 여러분 모두 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