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쓴 <오펜하이머> 관련 글은 조금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긴 했는데요. 과학 찐덕후 놀란 감독의 연출력이나 만듦새, 완성도는 이견이 없으나 오펜하이머를 평가하는 시선엔 완벽히 동의되기가 어려워서였지요. 뭔가 쭈뼛쭈뼛하는 것 같고 애써 외면하는 지점들이 다분해 보였거든요. 오펜하이머가 제안을 받고 원자폭탄 개발에 뛰어드는 계기나 죄책감을 분명히 응시하면서도 그 죄책감의 본질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한 것이 맞는지도 의구심이 조금 들기도 했고요. 히틀러가 사망한 뒤 미국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위험에서 벗어났는데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봐야 핵폭탄의 위험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슈퍼스타 과학자의 오만이 아니었을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윤리 기준이 높고 예민하며 인류애도 충만한 교수가 민간인이 사는 도시에 폭탄 투하를 지시하면서 효과적으로 위력을 발휘할 고도까지 계산해줬다니 이 양면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가요? 감히 추측해 보자면 오펜하이머는 그것이 첫 번째 실전 핵무기 사용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듯합니다. 다시는 쓸 엄두가 나지 않도록 비참하고 끔찍한 결과를 세상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죠."
이런 역사학자의 인터뷰를 담아낸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 폭탄>은 기계적일지언정 당대 시대적, 정치적 배경과 함께 오펜하이머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까지 담아 냅니다. 물론, 그 역할은 인터뷰이로 나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몫은 아니었지만요.
또 흥미로운 점은 <오펜하이머>가 다큐 못지 않게 오펜하이머를 둘러싼 개인사나 정치사회적 배경들을 꽤나 빼곡이 담아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러닝타임이 3시간이나 되니 가능했겠지만요. <오펜하이머> 보고 나서 생각이 많아진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찾아 보시기를 권유드리는 다큐입니다. 90분도 안 됩니다. 오펜하이머 손자도 나와요.
덧. 그런 양면적이고 복합적인 오펜하이머의 입장은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그걸 바라보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관점은 과학 찐덕후이자 오펜하이머의 팬으로서 꽤나 뒤죽박죽인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당대 매카시즘이나 과학자들의 시기 질투 및 수소폭탄 개발의 열망을 무척이나 긴 알리바이로 구조화 놓을 것에서 알 수 있듯, 오펜하이머의 양면성과 복잡성은 충분히 이해해야 하지만 그 과학자는 자기 소명과 의무에 책임을 다했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되거든요. 그게 저는 살짝 의구심이 든다는 이야기를 저번 리뷰에서부터 계속 해오곤 있는데, 잘 전달이 안 됐다면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https://alook.so/posts/yEtZ4ZP
https://v.daum.net/v/20230816160602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