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가을 타는 건가
요즘 도통 맹하다.
어느 정도냐면 진짜 이러다 바보가 될 것 같은 두려움까지 들 정도이다.
한껏 달아올라 뜨거웠다가 차분히 식어가는 이 느낌이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여름내 땀을 쏙 빼놓아서 기진맥진인 건지.
매미의 고성방가가 귀뚜라미의 소곤거림으로 변해서인지.
반팔의 소매가 길어져서인지.
해가 떠있을 시간에 달이 떠있어서인지.
모든 게 너무나 조용히, 말없이 변해가는 게 서운해서인지.
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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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을러지기 딱 좋은 계절이지 않을까 싶다.
더위를 피하려 애써 그늘을 찾아 헤맨다거나, 녹아내린 손으로 간신히 선풍기 강풍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그저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고군분투했던 것들이 절로 손에 쥐어지니까.
땀이 식으면서 동시에 그간 피어올랐던 열정도 함께 식어버린 것 같다.
날이 좋다는 핑계로 하염없이 허공에다 멍만 때리고는 미동도 없이 앉아있곤 한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가만히 쉬고만 싶은 마음이 혹시 가을 타는 건가 하면서 침울해지려다, 불어오는 바람과 놀다 보면 금세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물론 나의 게으름을 계절을 이용해 합리화하려 꾀부리는 것이지만, 꾀에게도 이유가 붙으면 그럴싸해지니까.
그럴싸한 꾀는 가으내 나의 게으름을 굳건히 지켜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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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그늘로 뒤덮인 것처럼 서늘해졌다.
그늘이 없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높아진 만큼 태양도 멀어져서인지, 태양빛이 마치 이불을 꽁꽁 싸매고 선풍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시원스러운 따뜻함이었다.
나무 밑에 놓인 벤치에 엉덩이를 멍하니 앉혀본다.
"사아아아" 바람이 슥 불고 지나가면 나무들의 주파수가 나에게도 잠시나마 닿는다.
그들의 언어는 잔뜩 때가 탄 나로선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 인간인 한 알아듣지 못할 언어.
그럼에도 귀 기울여 본다.
혹시나 아는 단어 하나쯤은 얻어걸릴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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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날씨가 시원해진 탓일까.
공활한 하늘엔 구름 가족들이 평화로이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각자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마음만은 같은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찬란한 세상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는 그들의 태도가 과연 내 손에도 닿을 수 있을까.
아마 구름이 손에 닿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영영 닿지 못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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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에 전 체취는 고약하면서도 자꾸만 코가 그 향을 좇게 된다.
표정은 찌푸려지면서도 은은히 풍겨오는 향에 헛웃음이 나기도 하다가 금세 중독되어 버리고 만다.
요즘은 땀이 쉽게 나질 않는데도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에 내 몸은 따라가고 만다.
그것은 침대에 묻어 있기도 하고, 아이폰에 묻어 있기도 하고, 책에 묻어 있기도 하다.
그럼 나는 이 고약한 냄새에 취해 내가 하기로 마음먹은 것들은 미뤄둔 채, 향이 묻어있는 것들에 나를 묻는다.
편하고 안주하고 싶어지는 것은 땀에 전 체취처럼 자꾸만 맡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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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하고도 멍하게 시간을 흘리다 보니 9월도 역시나 속수무책으로 흘러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다 잠깐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보았을 때 눈으로 뒤덮여있을 것만 같다.
그건 왠지 슬픈데.
그럼 다시 맹한 상태로 돌아가야겠다.
똑똑하게 보고 살기엔 너무 슬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