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by 교씨

복합기 안에는 아직 A4용지가 한가득 들어있다.

그것이 마치 평생 써질 것처럼 너무도 쉽게 때론 아주 허무하게 써버리곤 한다.

조금이라도 잘못 인쇄된 것들은 가차 없이 구겨버리고 갈기갈기 찢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마구 쓰다 보면 텅 비어버린 복합기를 생각보다 빨리 마주할 수 있었다.


A4용지는 나의 하루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20대 중반, 숫자로만 놓고 보자면 내 하루는 복합기 안에 든 A4용지처럼 질리도록 많이 남아있었고,

그렇기에 평생 살 것처럼, 늘 20대일 것처럼 하루를 오만하게 써버릴 때가 잦다.

불완전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사용한 하루는 잘못 인쇄된 A4용지처럼 구기거나 찢어버렸고,

버려진 하루들은 잘 보낸 날들이 무색할 만큼 쌓여갔다.


저기 파란 플라스틱 쓰레기통 안에는 구겨지고 찢긴 A4용지들이 잔뜩 쌓여있다.

내 새파란 젊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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