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세먼지와 기다림

by havefaith
호2.jpg

먼지는 하찮고 별 볼일 없다는 편견을 깬 존재가 나타났다. 미세먼지. 매우 나쁨일 땐 정말 삶의 의욕이 떨어진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초미세먼지, 눈앞을 뿌옇게 만드는 미세먼지. 여태까지 황사나 스모그라고 대강 부르던 게 사실은 이 친구일지도 모른다. 미세먼지는 하찮지 않다. 마스크라곤 거의 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밖을 나설 때마다 마스크 없이는 나가지 못하게 했다. 무시하는 척은 해볼 수 있다. 웬걸, 그러면 바로 목에 신호가 온다. 그래? 네가 이러고도 버틸 수 있겠냐는 듯. 숨도 답답하고, 피부도 왠지 모르게 나빠지는 것 같고, 은근슬쩍 머리까지 아픈 듯 하다. 그래, 미세먼지는 진짜 해리포터의 디멘터 같다. 수명이 깎이는 을씨년스러운 기분! 이거 느낌 탓인 건가. 뿌연 하늘에 산은 커녕 건물도 잘 보이지도 않는다. 거리의 사람들은 따뜻한 날씨나 다가오는 봄을 즐기긴 커녕 하얗고 까만 마스크를 쓰고 표정을 알 수 없이 걸어다닌다. 미소가 사라진 건 아닌데 입이 안보이니까 허전하다. 표정의 완성은 입꼬리 아닙니까.


뿌옇고 뿌연 날이 반복될수록 미세먼지는 깊이 자리잡았다. 어릴 적 미래를 그려보라던 그림 대회가 생각났다. 그 시절 우리는 그나마 긍정적이었는지 시니컬한 결과물을 내진 않았다. 가령 지금처럼 하늘은 잿빛이고 사람들은 마스크를 하고 몸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쌓인다는 상상을 표현하진 않았다는 것.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교통체증 없는 도로는 그 대회의 단골소재였는데 그건 아직도 현실이 되진 않았다. 만약 우울한 그림을 그렸으면 심사위원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이 친구 철이 일찍 들었네, 어른 같네, 통찰력 있네, 미래를 예측했네, 라고는 하진 않았겠지. 미래가 꼭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어렸을 때부터 알아야했던 건 아닌가 싶다. 차라리 현재를 그려놓으라고 했으면 나중에 기억하는 용도로라도 썼을텐데. 2살배기 조카에게 뽀로로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잿빛 하늘이 더 익숙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좀 그렇다. 근데 또 금방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아서 더 그렇다. 예전엔 봄에 하늘이 파랗고 공기도 말랑말랑하고 그랬다고 하면 코웃음을 치는 건 아닌가 몰라. 공기가 어떻든 벌써 산수유며 벚꽃이 핀 걸 보면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에도 봄은 오는가 보다.


상대적으로 소중함을 깨닫긴 했다. 미세먼지보다는 차라리 혹독한 추위가 더 낫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동장군이 그리웠던 건 처음이다. 파란 하늘이 얼마나 희귀한 것이었는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도 알게 됐다. 그와중에 미안함도 생긴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너도 나도 마스크를 하고 있는데 하나에 800원에서 1000원대가 넘는 마스크가 비싸서 쓰지 못하는 저소득층도 있고, 누구네 집은 아이 건강을 챙기러 먼지를 피해 해외여행도 가는데 아마 대부분일 누구네 집은 그런 건 꿈도 못꿀거다. 미세먼지라는 위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흩뿌려진다. 누가 알았을까, 빈부격차의 척도를 미세먼지로 또 확인하게 될 줄이야.


사회적 차원보단 작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걸리는 미안함도 있다. 영문도 모르고 산책을 못하게 된 강아지. 요 며칠 먼지가 좀 덜해져 오랜만에 산책을 나갔더니 온 세상을 다가진 듯 어찌나 기뻐한다. 먼지가 많아도 산책을 나오는 강아지는 봤지만 또 나쁘다는데 무시하고 나가기도 그랬다. 무시했다가 말 못하는 강아지가 다음날 아침 나처럼 목이 칼칼해서 고생하진 않을까 걱정도 됐고. 억울한 눈빛의 강아지에게 먼지가 많으면 산책을 못간다고 반복학습 시키는 모양새가 바보같았다.


먼지가 좋은 말이 아니란 건 대강 알겠지만 제대로 몰랐을 가능성이 더 크다. 강아지는 어느 날 산책이다, 나가자, 산책용 줄을 꺼낼 때까지는 무기한 대기상태다. 너는 왜 아침마다 나가냐고 따지지도 않는다. 새벽녁 얼굴을 보고 해가 지고 돌아오면 잘 있었어? 묻는 말에 가끔 끙 하며 궁시렁댈 뿐이다.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기다린다. 착하다고 해야할지 인내심이 많다고 할지 마음이 찔린다. 내 인내심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누군가나 무언가를 그렇게 가만히 오래도록 기다려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도 불평없이. 서운한 티도 많이 내지 않고. 어지간한 믿음으론 안 될 것이다. 게다가 기다린 만큼 행복해한 적은 있었던가. 저렇게 노란 테니스공을 던지고 놀기를, 늘 비슷한 코스지만 산책하러 밖에 나갔을 때처럼 마음 깊이 좋아한 적은 있는가.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짐작해 볼 뿐이지만 강아지보다 못났다. 난 그렇다 치고 강아지가 좋아하는 걸 알고도 해주지 않는 건 또 뭔가. 한결같은 기다림과 그 마음이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다.


호1.jpg

미세먼지와 기다림, 보이진 않지만 한 켠에 걸리는 그런 것들에 약한 모양이다. 언제 끝이 날지 기한을 알 수 없고, 그 끝이 꼭 좋은 것인지도 더더욱 알 수 없고, 그 와중에 지쳐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무력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강아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간만에 긴 산책을 끝내고도 한참을 공을 던져달라고 넌지시 쳐다보던 눈동자를 , 산책을 가지 못한다고 말해도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내가 다시 나올 때마다 바라보던 그 인내심을, 산책을 가지 못해도 매일 아침 가만히 손에 머리를 기대던 따뜻한 마음.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이 친구처럼 해보자고.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은 미세먼지도, 젊음이 축복이자 만병의 원인이라 품고 있는 수만가지 기다림도. 어느 날은 바람이 바뀌고, 어느 날은 상황이 바뀌어 생각보다 빨리 숨통이 트이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그 날이 오면 한 가득 숨을 마시면서 듬뿍 즐기겠다고 말이다.




keyword
havefaith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997
매거진의 이전글흑역사를 빚는 옹기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