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vefaith Apr 13. 2020

오늘 아침 산책은 강아지와 함께

  눈을 떴을 때 시간을 의심했다. 이게 꿈인가. 핸드폰 화면의 숫자 앞에서 두세 번 눈을 끔뻑이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애매하다. 애매하게 늦었을 때 고민이 된다. 시간상으로는 여섯 시도 안되었지만 요가를 가려면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어야 하는 시간. 짧은 시간에 잠들어 있던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본다. 하려고야 하면 부랴부랴 달려 나오면 되겠지. 어떻게든 몸을 이끌고 나면 또 주어진 대로 하지 않나. 요가 선생님 얼굴도 잠깐 떠오르고. 하지만 몸을 뒤척이는데 느껴지는 근육통 덕분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뻐근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역까지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이불이 너무 포근하지 않나. 꿈이 이렇게 피곤하고 현실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나. 그렇다고 이대로 잠들어버릴 건가? 이미 잠이 다 깨버렸는걸. 뒹굴뒹굴하자니 그건 또 좀 찔린다. 타협안을 찾아보자. 좋다. 아침 공기가 좋으니 강아지와 아침 산책을 하는 걸로.


  내게 강아지는 왠지 모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내가 산책을 가지 않으면 강아지는 현관 밖을 나가지 못하고, 혼자 나가는 날이라도 생기면 강아지는 집을 나갔다 왔다며 흠씬 혼이 난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나는 이런 생활이 가능한가? 옷은 필요 없고,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고, 씻겨 주고, 사랑도 주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주지 않는 삶. 어떤 마음이어야 이렇게 지극히 일방적인 기다림과 구속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심지어 강아지는 화를 내지 않아서 마음을 찔리게 한다. 끝없이 기다린다. 가끔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그 정도를 화라고 볼 수는 없고. 산책을 가려는 낌새만 보여도 온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해하는 걸 보면 더 미안해진다. 그럴 때마다 묻게 되는 것이다. 정말 시간이 없어서 산책을 못하는 거냐고. 강아지의 기대하는 눈빛이 묻는 것만 같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는 게 이유가 되어버리면 비참해진다. 시간이 없다는 걸 인정하면 내 인생에 끌려다니는 안쓰러운 사람으로 보이는 동시에 스스로에겐 정말 그런지 회의감이 들고, 인정하지도 않을 거면서 말한 거라면 비겁한 변명이 되어버린다. 어느 쪽이든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안다. 몸과 마음은 소모품이다. 심지어 마음은 뭔가를 하든, 하지 않으면서 신경을 쓰든 기운을 쓰는 건 마찬가지다. 뭘 하지 않으면서 걱정할 거라면 뭘 하면서 아무 생각 없는 게 나을 거란 게 요즘 생각이다. 내 경우 한정이지만, 우물쭈물하다 이렇게 된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영화랑 드라마를 찍다가 이렇게 된 거야. 뇌내 관객, 배우, 연출, 감독까지 다 하니 진이 다 빠진 게지.


  늦은 밤에 주로 산책을 하게 되는 터라 누리의 인내심은 바닥을 치곤한다. 어제는 빨리 나가자는 듯이 월! 하고 짖더라. 엄머, 얘 좀 보소. 아침 산책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오래 기다려서 하는 산책과 눈 뜨자마자 바로 하는 산책 중 뭘 더 좋아할까. 확인하면 그만이다. 제 집은 냅두고 나무 밑 바닥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다.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녀석에게 산책용 목줄을 채우니 어벙벙한 모양이다. 아침에 어딜 간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여태까지. 이유가 뭐든 누리에겐 이득이다.


강아지의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

  산책은 성공적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듯이 총총총 꼬리까지 살랑대고 가더니 이 동네 탐지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리저리 킁킁거리며 다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킁카킁카. 평소보다 킁킁거림의 정도가 남다르다는 뜻이다. 자꾸 킁킁 거라는 걸 보니 딴 생각이 들었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산수유, 라일락이 핀 풍경을 함께 보고 싶어 누리에게 이것 좀 보라고 해도 들은청 만청이다. 무드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다. 누리는 누리의 방식대로 나와 같은 풍경을 느끼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눈으로 본 것을 누리는 향기로 맡았을 것이다. 꽃비가 내리거나 꽃이 핀 모습을 수더분한 꽃향기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애초에 꼭 같은 방법으로 봄을 즐길 필요는 없었던 거지.


  늘 가던 길을 걸어도 매번 새로운 듯이 신나하는 모습이 산책을 할 때마다 반복된다. 사람들, 다른 강아지나 고양이가 지나갈 때 온 신경이 곤두서 있을 뿐 대체로 별생각이 없는 나로서는 신기한 일이다. 매일 나가도 좋아하는 걸 보면 자주 산책을 못해서도 아닌 것 같은데. 좋은 후각 때문에 강아지에겐 하늘 아래 같은 길이 없는 건 아닐까. 오늘도 누리에게 여전히 산책은 짜릿했을 것이다. 뭔가에 꽂혔는지 목이 말라도 물도 마시지 않고 얼른 걷고 싶어 했다. 어젯밤 다녀간 길인데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를 찾은 것처럼 한 군데 콕 박혀 있는 걸 보면 시간이 냄새로 퀴즈라도 남겨놓은 듯싶다.


  그런 모습을 닮고 싶다. 미묘하게 틀린 그림 찾기를 한다면 늘 가던 길, 늘 하던 일이 짜릿해질지도 모르니까. 익숙해지거나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은 뭘까. 오늘은 처음이고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흘러가는 것 아래로 얼마나 많은 이의 공이 들어가는지. 말로는 알지만 매일같이 느끼기엔 어려운 것마저도 안다. 그렇게 느끼고 싶다. 적어도 누리와의 산책만큼은 매번 새롭다. 사람들, 고양이, 강아지, 비둘기, 심지어 도로 위를 흩날리는 검은 비닐봉지가 변수가 된다. 런닝머신에서 20-30분 남짓을 채우는 건 재미없지만 누리와의 산책은 진부한 구석이라곤 없다. 누리는 늘 산책이 새롭고, 나는 그런 누리와 함께 걷는 게 새롭다. 들어는 봤나, 러너스 하이가 아니라 도그 워커스 하이!


  아는 게 없어서 새로운 건 아니다. 알면서도 흥미로운 것도 있다. 대문 밖을 나서면 세레모니라도 하듯 한 바퀴 돌고, 강아지에게 도발 당하면 열받아서 달리고, 사람들이 지나갈 때까지 멈춰있을 땐 낑낑거리곤 한다. 비둘기는 사냥이라고 할 듯 살금살금 다가가 잡아채려 하지만 가련한 목줄에 걸려있어 매번 실패한다. 심지어 언제쯤 똥을 누려고 하는 건지 움찔거리는 뒤태를 보고 예상할 수 있게 됐는데 그건 예상 가능해도 무척 웃기다. 한결같은 모습을 보고도 재밌다고 느낄 수 있는 게 신기하다.


  오늘의 이 길은 어제의 이 길이 아니고 오늘의 나 역시 어제의 내가 아니다. 감성적으로도 멋있고, 이성적으로도 맞는 말이다. 다만 의미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곱씹어 볼 뿐이다. 아침 산책이 뭐길래 온갖 것들이 새롭기 짝이 없다. 엄청나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찬찬히 보면 제법 많은 게 다르다. 저녁엔 어두워 보이지 않던 모습이 있다. 아침부터 몇몇 사람들이 열심히 걷고 뛰고 있었다. 친구와 같이 조깅을 나와 숨을 내쉬며 한 바퀴 더!를 외치는 조깅 현장을 목격했다. 누리만 일찍 산책을 나온 줄 알았더니 다른 강아지들도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덩치도 작은 강아지는 누리에게 아르릉 거렸고 주인분은 덤비지도 못할 거면서 성질은 낸다며 너털웃음을 짓고는 길을 나섰다. 누리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지 않듯이 그런 도발에도 한결같이 처음인 것처럼 반응하곤 한다. 그런 건 좀 익숙해져도 괜찮은데 말이야. 건물 유리창 사이로 햇빛이 반짝거렸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맞다, 아직 아침이었지. 아직 하루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음 생엔 엄마가 친정엄마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