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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vefaith Aug 01. 2020

일의 기쁨과 슬픔

새로운 일을 하게 됐다. 일은 그렇게 시작된다. 인생에 많은 것들이 우연에서 시작하지만 일은 나만 모르는 필연이다. 인사권을 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 날에 알려질 뿐이다. 몇몇은 기뻐하겠지만 대부분은 덤덤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익숙한 일은 권태롭지만 새로운 일은 두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적응이 두려운 건 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포함해서이기도 하고.


아찔하고 무방비하다. 무섭게 닥쳐오는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심지어 이전에 잘못된 일도 이제부터는 나와 상관이 있게 된다. 모를 수도 있고, 모르면 잘못할 수도 있고, 그러면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맞는 말이지만 가혹하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을 하라고 돈을 주고 이 자리를 채운 게 아니냐고 물어도 그 말도 맞으니 할 말은 없다. 그건 내 사정에 불과하다. 일이 흘러넘치든 손은커녕 온몸으로 부딪혀도 모자라더라도, 그 일을 맡은 이상 사정은 사정이고 일은 어떻게든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가끔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생긴다. 일에 사람은 담기지 않는 기분이 들면. 언제든 어디서든 대체될 수 있는 한낱 그릇에 불과하다는 불안함에 마음이 흔들리면. 입버릇이 되어버린 감사하다는 말도, 죄송하다는 말도, 확신이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아무 도움도 못 되는 나 자신까지 모든 게 지긋지긋해지면.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지만 어둑한 밤은 기억에 남았다. 아무도 없을 때 와서 아무도 없는 밤에 불 꺼진 건물을 등지고 집으로 갔다. 어느 날은 밤을 새우고 몇 시간 눈을 붙이기도 했다. 일복이라는 건 있는지 굳이 상황은 꼬일 대로 꼬이고 늘어날 대로 늘어났다. 오자마자 고생이라는 이야기로 많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힘없이 웃어넘겼다.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준 건 그럼에도 너무 힘들다고 무너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만큼은. 보는 눈도 귀도 많고 모든 이야기는 전래동화처럼 퍼지기 마련이다.


텅 빈 사무실이 어색하지 않게 노래를 틀어놓고 일을 하다가 뜬금없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앞으로도 이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극단적으로 보면 평생 요 모양 요 꼴로 이렇게 살다 죽겠지. 노동은 신성하다지만 글쎄, 이 노동은 신성한 것인가. 노동의 신성함은 어떻게 지켜지고 있나. 바닥은 늘 갱신된다고 말한 게 입방정처럼 느껴질 만큼 정말 바닥은 힘 빠질 만큼 새로웠다. 바닥이 더 낮아진 만큼 바라보는 천장도 더 높아진 것만 같았다. 막막하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보잘것없게 느끼게 될 때 일이 슬퍼진다.


기쁨도 있다. 엉켜있고 넘쳐흐르던 일을 조금씩 풀어서 주워 담을 수 있게 되면 뿌듯하다. 그 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고,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안도감이 느껴지면 기분이 좋다. 그런 기억이 없었다면 아마 수많은 밤이 무색해졌을 것이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도움을 주는 일은 기쁨이 된다. 일과 나 자신에 부여하는 의미가 너무 큰가 싶지만, 뭐 일이 그런 것까지 뭐라 하겠나.


일은 되면 그뿐,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차피 가지각색이다. 이해관계 역시 흥미롭고 때로는 염증이 나는 일이지만 그마저도 일의 일환이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보자고 그러는 것도 아닌데 누가 대신 알아차리고 챙겨주지 않으니 아웅다웅하게 된다. 속이 보이는 행보라고 대처가 쉬운 것만도 아니다. 그 모습이 이해가 되면서도 적응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일은 사람이 하는 거니까. 사람을, 마음을 보는 눈을 키우기만 한다. 결론은 언제나 그랬듯 본인 일은 본인이 알아서. 이 부분만큼은 영영 적응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산 너머 산. 안심하기는 글렀다. 한 달을 마친 걸 기뻐하면서도 다가올 날을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다. 지금 눈 앞에 닥친 일만 하기도 바쁜데 무슨 걱정인가. 또 몇 번이고 무너지고 말 게 뻔하지만 꾹꾹 부여잡고 참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도 글을 끄적거릴 만큼은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아니지, 아무도 축하해주진 않을지라도 이번 달은 꼭 스스로를 축하해주고 싶었다. 아주 잘 하진 못했을지 몰라도 그래도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그래도 결국엔 다 잘 되지 않았냐고. 그렇게 차근차근해 나가면 된다고. 외로움이나 슬픔으로 누군가를 찾고 싶지는 않지만 일상처럼 스며있고 기쁨은 담아두고 싶어도 금방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라도 기억해두자.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일이라 해도 고생스럽지 않은 일은 없을 터. 슬프고도 기쁜 날이 함께 하는 도중, 나를 잃어버리고 무덤덤해지기보단 차라리 늘 고통스럽기를. 마지막만큼은 웃을 수 있을 사람이 되기를. 누가 알겠나. 이게 다 알고 보면 그 마지막을 위해 고난 한 스푼 넣은 큰 그림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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