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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완 Feb 21. 2019

요리는 나의 힘





돈이 없을 때 가장 먼저 줄이게 되는 것은 바로 식비다. 외식도 줄이고 마트에 장 보러 가는 일도 줄인다. 본격적으로 ‘냉장고 파먹기’에 돌입할 때가 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냉장고 파먹기를 은근히 즐긴다. 제한된 조건에 맞춰 생활해 나가는 것에 어떤 도전 정신이 일어난다. 이것만 가지고 살아남고 말겠어, 하는 의지가 불타오른다. 냉장고 파먹기는 상당히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다. 냉장고 속 여러 음식 재료들을 어떻게 조합하여 무엇을 만들 것인가,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비엔나소시지 여섯 알로 무얼 만들까 고민하다가 마침 보고 있던 일본 드라마 속에 나오는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만들기로 한다.

나폴리탄 스파게티는 이름 때문에 나폴리 음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 음식이다. 겉모습은 토마토소스 스파게티와 비슷하지만 토마토소스가 아닌 케첩을 가지고 볶아내는 게 차이점이다. 아마 토마토소스를 구하기 어렵던 시절에 생겨난 음식이 아닐까 싶은데 뭔가 지금의 내 상황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음식이 아닌가. 내 냉장고엔 토마토소스는 없고 케첩은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식이 그런 식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과 양파, 비엔나소시지를 볶는다. 거기에 케첩과 삶은 스파게티 면을 넣고 조금 더 볶아주면 먹음직스러운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완성된다. 여기에 맥주를 안 마시면 범죄다. 범죄자가 될 수 없기에 정말 어쩔 수 없이 맥주캔을 딴다. 이제 본격적인 시식의 시간, 포크로 면을 감아 입에 넣는다. 아아아아, 맛없다. 토마토소스가 간절해지는 맛이다. 단맛을 안 좋아하는 내 입엔 너무 달다. 다음엔 케첩을 줄이고 소금이나 간장으로 간을 더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아니면 토마토소스를 사다놓는 것도 좋고. 허탈한 마음에 괜히 맥주만 홀짝인다. 에라이, 오늘은 실패다.

가끔 실패도 하지만 대부분은 성공적이다. 잘 익은 김치만 가지고도 많은 걸 할 수 있다. 김치볶음밥도 해 먹고, 김치찌개도 끓이고, 김치전도 부쳐 먹는다. 냉동실을 뒤지면 좀 더 고급스러운 식재료가 쏟아진다. 얼려놓은 부챗살로 스테이크를, 다이어트 때문에 사다놓고 방치한 닭가슴살에 데리야키 소스를 발라 닭꼬치를, 냉동만두와 얼린 사골국으로 만둣국을 해 먹기도 한다. 없는 상황에서도 잘 차려 먹고 나면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가만 보면 있을 때보다 더 잘 먹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 달은 이렇게 잘 넘겼다. 미션 컴플리트. 응? 뭐가 성공이야, 이 인간아! 일을 안 하니까 돈이 없지. 일 좀 하자, 제발.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뭐 약간은 그렇기도 하지만.) 일이 너무 하고 싶은데 일이 없을 때가 많다. 일은 참 이상하다. 다 받을 수 없을 만큼 일이 몰리다가 갑자기 모든 클라이언트가 내게 일을 주지 않기로 담합이라도 한 듯이 뚝 하고 끊긴다. 하여간 중간이 없다. 프리랜서에게 일이 없다는 건 곧 수입이 없다는 얘기. 운이 나쁘면 몇 개월이나 수입이 없는 보릿고개가 찾아온다. 일정치 않은 수입은 프리랜서의 가장 큰 단점이다. 그래서 돈이 생겨도 막 쓰지를 못한다. 프리랜서에게 저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항상 보릿고개를 버틸 목돈을 모아놔야 한다. 힘든 시기를 어찌어찌 잘 버티면 신기하게 다시 일이 들어온다.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젠 제법 담담하게 보릿고개를 보낼 수 있게 됐다.

불안정한 수입에 적응이 되고 나니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믿기 힘들겠지만 오히려 안정적인 월급을 받을 때가 더 불안했다. 이 안정적인 월급이 끊기면 어쩌나 싶어서. 한편으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정해진 월급보다 더 버는 것이 아니니 유리천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 가치는 2백만 원인 건가. 내 가능성을 월급 안에 가둬놓은 건 아닐까. 월급이 없어질까 불안하고, 동시에 영원히 월급쟁이일까 봐 불안하고. 사람 맘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퇴사하겠습니다』의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가 떠오른다. 대기업에 다니던 그녀는 40세에 퇴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10년 동안 퇴사를 준비해서 50세에 퇴사한다. 그녀의 퇴사 준비는 좀 독특하다. 그녀는 자신이 퇴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월급’이라는 걸 알았다. 그럼 보통은 10년 동안 돈을 열심히 모아 퇴사하는 걸 생각할 텐데 그녀는 달랐다. 그런 식으론 근본적인 불안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봤다. 그녀는 월급이 없다는 ‘공포’를 이겨내면 퇴사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월급과 회사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퇴사를 준비했고 성공했다.

그녀를 자유롭게 해준 것은 모아둔 저축도 어떤 재능도 아닌 ‘요리’였다. 시장에서 저렴하게 산 재료들로 직접 요리를 해서 소박한 밥상을 차리는 것. 하루 세 끼, 매일매일. 그런 삶을 통해 인간이 진짜 먹고사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더 많은 돈이 자신을 자유롭게 할 거란 믿음은 착각이었다. 오히려 돈이 많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결국엔 월급을 거의 쓰지 않고도 한 달 생활이 가능해졌고, 월급이 없어도 살 수 있겠단 확신이 들자 퇴사를 했다. 그녀는 이제 마음껏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돈에 대한 공포를 이겨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다. 이런 게 진짜 ‘경제적 자유’가 아닐까.

사실 이 책은 퇴사를 부추기는 책이 아니다. 반대로 어떡하면 회사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로 가득하다. 그녀는 월급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자 회사 일이 더 재미있어졌다고 말한다.


회사는 나를 만들어가는 곳이지, 내가 의존해가는 곳이 아닙니다.
-『퇴사하겠습니다』 중에서

회사원도 프리랜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무언가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없어도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나의 냉장고 파먹기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돈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는 훈련인 셈이다. 그렇다고 돈이 싫다는 얘기는 아니다. 절대.

가만있어보자, 이제 슬슬 일이 들어올 때가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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