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돈을 위한 덜어내기
파편난 봄
w. 하얀 밤
#1
자전거로 꽃을 배달하던 그는 밀려드는 바다에 잠겨 죽었다.
라는 문장으로 서두를 뗀 글은 결국 끝내 여미지 못한 채 파일 한구석을 뒹굴고 있었다. 왜 자전거로 꽃을 배달했는지, 밀려드는 바다엔 왜 잠겼는지, 그래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 것도 밝혀지지 못한 채. 그 문장은 미련에 졸아 붙어 쓸어내도 쓸어내지지 않는 먼지처럼 잠겨 죽는 중이었다. 내가 이걸 어디서 모티브로 따왔더라, 아니 이걸 왜 쓰고 있었더라. 눈을 끔뻑였다. 파일을 닫았다. 잠시 멍하게 손을 쳐들고 있다가, 창을 열었다. 머리 위에 매달린 형광등 빛이 머리를 조였다. 틈 사이로 찬 바람이 꾸역꾸역 스며 들어 방 안을 찰랑여 채웠다. 난 자전거로 꽃을 배달하던 그였거나 졸아 붙은 문장 혹은 그 둘 다일 수도 있었다.
#2
봄이 파편으로 흩어져 있었다. 떨어진 꽃잎이 어린 물기 때문에 축축이 빛나는 땅 위로 뭉개어 스며들고 있었다 가슴께에 걸린 숨을 터뜨렸다. 한 뼘 든 시선 속, 렌즈 안쪽은 빛의 한 단면처럼 희뿌옇게 흐릿했다. 마치 또렷해지지 못하는 어떠한 생각, 신념, 태도 같은 것들처럼. 나를 온통 감싸고 있던 알 껍질에 난 금을 두들겨 눈 한 쪽을 내밀고 보니 밖으론 참으로 생동하는 계절이었다. 깨닫고 보니 흐르는 풍경 모두가 수채처럼 물들어 있었다. 있는 힘껏 날을 세워 몸을 부딪혀 오던 바람도 그 끝을 뭉글려 머리칼을 흩트려 주며 에둘러 돌아갔다. 한겨울 지내며 덧바르던 더께를 걷어내고 생살 위에 얇디 얇은 보호막 만을 걸친 채 움직이기 시작하는. 봄, 나는 그것을 눈으로 읽고 손끝에 감겨오는 온도로 헤아렸다. 피상적이고도 표면적으로만 알아오던 것의 알맹이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3
봄이야.
기억을 돌이켜 보니까 내겐 봄이 별로 없었어. 학생인 내게, 아니 우리에게 일 년 동안의 커다란 계절은 언제나 여름이나 겨울일 수 밖에 없었지. 봄은 그냥 싫은 개학이 있고 좀 더워지는 그뿐이었고. 그래도 개중에 제일 또렷한 건 학교 운동장으로 불어닥치는 모래 바람인가. 물기 하나 없어가지고 바람이라도 조금 분다 치면 저쪽에서부터 이쪽까지. 입자가 산 바람이 내 키보다도 더 높은 몸뚱이를 하고선 우릴 감고 지나가는데, 진짜 따갑고- 웃기더라. 우리는 해 질 무렵 하교한답시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다가 그런 게 불어오면 다 같이 걸음을 딱 멈추곤, 눈 질끈 감고 지나가기를 기다렸잖아. 그래도 뭐가 그리 좋고 재밌는지 계속 웃었는데. 가끔 넌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려주었어, 어쩔 땐 입을. 그만 웃어, 모래 들어가. 속삭이는 그 소리도 진짜 웃겼지.
두 번째 봄이 지나고 있어.
이젠 더이상 개학도 없고, 더우면 에어컨 바람을 쐬면 되고, 모래 바람도 없어. 내 키보다도 더 높은 몸뚱이를 하고서 그만 웃어, 모래 들어가. 하는 소리도 없어. 난 그저 따가운 햇살 아래에 여린 살을 드러내놓고 번지는 화상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 바라보고만 있어. 얇은 막 하나가 툭 터져 그 안의 여린 속살이 어떤 준비도 없이 바깥으로 드러난 거야. 내겐 이제 계절 하나가 통째로 아득해.
누가 나한테서 봄을 가져갔어?
#4
몸을 털었다. 무수한 과거의 편린을 털어냈다. 그것들은 난해하거나, 슬프거나, 혹은 그저 습관의 것들이었고, 움직임의 마디마디에 눌어붙어 날 둔하게 끌어내렸다. 시선을 들자 하늘 가까이로 뻗어 몸집이 큰 나무가 머리 위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지마다 털어낸 꽃잎이 햇살 틈을 메우며 작은 눈처럼 반짝였다. 따뜻하고 화려한 설경이었다. 감은 눈꺼풀 아래, 무수히 흩날리던 꽃결이 마음 속으로 천천히 녹아 내렸다. 찾고 싶던 건 대단한 서사시의 소설도, 잘 꾸민 수사가 멋진 시도 아니었다. 내가 설친 밤잠을 조금씩 떼 모아 만든 그저 소소한 봄냄새가 나는 단편, 그걸 닮은 너뿐이었는데. 고작.
자전거로 꽃을 배달하던 그는 밀려드는 바다에 잠겨 죽었다.
그뿐이었다.
파편이 나고 그만이었다.
봄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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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