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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쓴다
By 하얀 밤 . Dec 19. 2016

Tall Size Lethe 03



 로퍼 뒷축을 구겨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옆구리에 껴놓은 책 한 권과 아이패드를 파우치 속에 우겨 넣다가 아, 도로 되돌아 올라갔다. 냉장고를 열어 과일 칸을 잡아 당겼다. 초록색 사과알들이 텅 빈 플라스틱 박스 속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며칠 전 제이가 사다준 풋내 서린 청사과였다. 여름이 맺혔어. 좋아하잖아요. 이걸로라도 아침 해요, 꼭. 부드런 말과 단어가 그 위를 흐른다. 

 물에 닦아 반들거리는 표면을 한 웅큼 베어 물었다. 툭 잘린 속살에서 새큼한 즙이 튀어 오른다. 맺힌 초여름이 아삭거렸다. 즙을 닦아낸 검지 끝을 쪽 빨았다. 끄지 않았던 부엌 불을 끄곤, 팔자로 벗겨 놓여진 로퍼에 다시 발을 꿰어넣었다.



문을 열자 새파란 하늘에서 햇볕이 쏟아 내렸다. 눈 한 쪽을 찡그렸다. 어젯 밤 내린 가랑비에 도로가 드문드문 젖어 있었다. 막 돋아나기 시작한 여린 잎사귀들이 청사과 껍질처럼 물에 닦여 반짝거렸다. 



아- 하늘 진짜 맑다,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문다. 참 좋은 날이다. 






<Tall Size, Lethe 03>

w. 하얀 밤 




                       


매끈한 플라스틱 섬유 끈을 풀렀다. 생두 꾸러미가 입을 벌리며 헐겁게 벌어진다. 생두 꾸러미가 헐겁게 입을 벌리며 벌어진다. 그걸 편편한 판 위로 후룩 붓는다. 크기가 작은 콩을 골라내어 왼편으로 모아 놓는다. 알 멀쩡한 건 커피가 될 거고, 그러지 못한 것들은 곱게 가루내어 화분 비료로 쓸 셈이다. 수북한 무더기 위로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집중한다. 


 손을 털고 일어났다. 왼편으로 쌓인 콩 무더기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로스팅 기계 플러그를 찾아 콘센트에 꽂고 전원을 켰다. 크기 고른 원두 알들을 손바닥에 한웅큼씩 담아 로스팅 기계에 부었다. 다그락 다그락. 주걱 끝에 닿는 생두 소리가 꼭 레고 볶는 소리 같다. 콩 구워지는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른다. 


 아, 머리 아픈데. 열기에 코를 박고 있으니 머리가 띵하다. 잠시 손을 놓고 카페 문을 열었다. 짤그랑, 조그만 바람종이 저들끼리 몸을 부딪히며 청량한 소릴 낸다. 바깥으로 펼쳐진 7월 언저리 아침. 더위가 녹진히 풀려 흐르는 이십 몇 도 근처의 온도가 애매하게 밍밍하다. 적당히 데워진 공기가 쑬렁였다. 카페 지붕 위로 늘어진 나뭇잎이 쓸려간다. 바람이 분다. 코 한 쪽을 찡그렸다. 햇볕에 달궈진 아스팔트 도로 냄새가 꿉꿉했다.


 열이 골고루 퍼질 수 있도록 꾸준히 젓는다 노릇하게 구워진 표면 위로 오일이 돌기 시작하자, 따닥- 여기저기서 선명한 크랙 소리가 울렸다. 몸을 불사르던 장작이 잘 익어 반으로 쪼개지며 내는 듯, 듣기 좋은 신호. 곧장 원두를 퍼서 넓고 얇은 접시 위로 옮겨 담았다. 열을 식힌다. 잠시 이대로 휴식. 


 찬물 한 잔을 마셨다. 레몬즙을 띄워 시큼한 향이 입 안을 감돌고 몸 한가운데를 타고 시원한 기운이 퍼진다. 계속 굽히고 있던 허리를 뒤로 젖혔다. 팔을 좌우로 휘휘 돌려 스트레칭을 한다. 근육 곳곳을 정성스럽게 이완시켰다. 스트레칭 자주 해줘요, 빙긋 웃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그렇게 서 있는다.


 조금 허전한 것 같아 음악을 틀었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악장. 실링스피커에서 흐른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스무 평 조금 안 되는 카페 안 곳곳을 누비며 어루만진다. 주방 가까운 곳 테이블에 앉아 접시 위 고르게 누운 원두를 손으로 쥔 채 살살 비벼 껍질을 벗긴다. 개 중 묵직한 고동색을 머금은 원두 한 알을 이에 넣어 깨물었다. 훅 넘치는 고소함, 그 뒤로 짧게 신 맛. 혀 전체로 본연의 잔향이 점잖게 스며든다. 잘 굽혔다. 아메리카노로 내리면 딱 좋을 정도로, 하이 로스팅과 시티 로스팅 그 사이의 어드메 쯤. 


 동글동글 예쁘고 고른 원두를 각각 손바닥만한 진공 포장 속으로 나누어 담는다. 매끈한 은박 포장지 위로 원두 결이 알알이 선다. 두 봉지, 네 봉지, 일곱 봉지. 꼭 손가락 등으로 쓸면 눈을 흘겨 돌아볼 것 같은 뒤통수가 귀엽다. 매직으로 각각 포장지 마다 날짜를 써넣었다. 바람 잘 드는 선반 위로 자리를 옮겨,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여기서 저들끼리 몸을 부이어 안아 더 깊은 향을 품겠지. 


 그리고 그 옆, 엊그제 볶아 포장해두었던 원두 한 봉지를 꺼낸다. 로스팅 이틀 후면 커피가 가장 맛있게 내려질 때다. 포장지 입구를 찢자 폭폭하게 쏟아지는 향을 들이켰다. 잘 닦아 둔 핸드 그라인더와 드립퍼 셋트를 내린다. 정방형 그라인더 속으로 콩을 붓는다. 다그락 다그락. 동그란 것들이 굴러가는 소리. 핸드밀을 돌린다. 콩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리고, 입자 고운 가루가 네모난 통 속으로 소복히 쌓인다. 


 곱게 갈린 원두 가루 위로 끓여둔 따뜻한 물을 둥글려 부었다. 고동빛으로 자작하게 적셔진다. 하얀 머그컵 안으로 커피가 천천히 몸을 불린다. 적당한 온도. 한 모금 마신다. 입 안에 머금어 혀로 살살 문질렀다. 나무 냄새, 장작불 탄 냄새, 은근한 연기 냄새가 빈 속을 켜켜이 채운다. 


오전 8시. 오픈 준비를 한다. 테이블을 닦고, 의자 열을 맞추고, 창마다 늘어뜨린 커튼을 쥐고 반듯하게 묶었다. 환한 아침 햇볕이 맘놓고 쏟아져 든다. 테라스 한 켠에 놓아둔 파란색 물뿌리개를 갖고 들어온다.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끝까지 받았다. 빨아서 널어둔 헝겊 하나를 앞치마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손에서 출렁이는 물결을 느끼며 테라스로 나간다. 계단 아래에 세워둔 블랙 보드 앞으로 걸어가 구석구석 모서리까지 깔끔하게 닦는다. 네온 마커 뚜껑을 열어서 보드 앞에서 잠깐 망설인다. 음, 오늘 추천 메뉴는- 

 예가체프 원두로 내린 핸드드립 아메리카노, 하라 원두로 내려 고소한 우유가 섞인 라테, 시다모 원두 샷에 진한 초코가 섞인 카페 모카. 그 중에서도 하라 원두 라테에 밑줄 쭉, 꼬랑지와 별을 달아 놓는다. 


 손을 툭 턴다. 파랗게 늘어진 하늘. 두 그루의 이팝나무 잎사귀가 올올이 흩날렸다. 옴팡지게 달린 하얀 쌀밥같은 꽃망울이 후두둑 꽃잎을 떨어 뜨리고, 그 속에서 터뜨려 낸 옅은 꽃향기가 카페 주변에 자박자박 쌓였다. 그 가운데에 자리잡은 짙은 캐러멜 색 원목 간판. 나무결을 따라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 <Caf'e cheron>. 카페 케론. 


 바닥에 늘어선 팬지꽃 화분들에 물을 준다. 팔이 후들거려. 꽃잎마다 함빡 이슬을 머금었다. 구두 위로 물방울이 튄다. 결이 반짝인다. 에이프런 앞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찰칵, 망울망울 물방울 흘러내린 주홍 꽃잎이 투명하게 예쁘다. 윤이 보내 줘야지, 하고 메시지를 켰다. 


 지이잉, 지이잉. 



YUN. 



간결한 단어가 몸을 울린다.



"응."

-뭐해요?

“오픈 준비. 나 너한테 팬지꽃 보내고 있었어.”

-정말? 아직 안 왔는데.

"잠깐만,"



보내려던 사진을 마저 전송했다. 타각타각, 화면에 손톱 닿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화분 옆에 갖다 둔 조그만 나무 의자에 등을 웅크려 앉았다. 



“갔어?”

-잠깐만요.



잠깐의 텀. 멀던 목소리가 도로 가까워진다.



-와, 이제 완전 활짝 폈네요. 

“그러니까. 빨간색이야.”

-맘에 들어요?

“응. 밝잖아. 보면 기분 좋아지고.”

-그러면 다행이네. 

“제이 언제 와?” 



질문, 그리고 바람. 사아- 새파랗게 닦인 하늘 저 먼 발치부터 나뭇결이 흔들린다. 우릴 잇는 침묵도 흔들린다. 다리를 펴 팬지꽃 화분을 툭 찼다.



-얼른 갈게요.

"미안."

-응? 뭐가요? 

"보채는 목소리였어."



그리고 또, 텀. 



"미안해." 

-현. 있잖아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보고싶다는 말이 더 좋을 것 같아요. 

"......"

-어때요? 그렇게 한 번 말해줄래요?

"...보고싶어."

-응. 맞아요. 절대로 미안한 거 아니에요. 현이 나를 보고싶다는 건 내가 고마울 일이고, 두근거리는 일이니까요. 

"......"

-섬 되지 말고, 좋은 음악 듣고 에어컨 시원하게 틀어놓고. 행복한 생각하면서 있어요. 알겠죠? 

“…응.”

-얼른 갈게요. 나도 보고 싶어요. 



앞치마 자락을 손 끝으로 말아대며 대답도 않고 적당히 고갤 끄덕였다. 그걸 용케 알아들었는지 곧 전화가 끊기고, 까맣게 물든 핸드폰 위로 얼굴이 비친다. 고개가 기울었다. 알 수 없는 표정, 낯선 얼굴이라서. 피부 자욱이 남은 화면을 에이프런에 문질러 닦았다. 발치의 팬지꽃이 날 따라 이리저리 고갤 흔들었다. 


 내 흐름을 읽는 시선, 헤아림이 섞인 온건한 단어. 부드런 목소리가 날 보듬는다. 늘 한결같은 사람. 고여든 나를 천천히 흐르도록 만드는 부드럽고 유연한 힘. 그는 늘 이게 닥터 윤의 마법-이라며 시덥잖게 웃고 지났지만. 그건 참 갖기 어려운 일종의 재능이었다. 한숨이 조각나 밖으로 툭 튀어 오른다. 웅크린 등을 폈다. 슬그머니 제 곁으로 다가와 서서히 몸을 불리는 물들을 털어내려고. 잠기지 않는다. 지금 와서 그러는 건 너무 청승이다. 


 카페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짤그랑, 풍경이 다시 몸을 부딪혔다. 






-





한참 코를 박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한바퀴 둘러본 사무실은 소곤거리는 소리도 공해가 될 만큼 침잠한 상태였다. 중턱에 걸린 수요일도 무기력한 금요일도 아닌, 난해한 목요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모두가 노곤하고 피곤했다. 

 탕비실에 가서 기지개를 폈다. 뼈 어긋나는 소리가 피부 아래를 울린다. 손을 툭툭 털고 종이컵을 꺼내 따뜻한 물을 부었다. 녹차 하나를 찢어 티백을 담궜다. 하얀 망이 천천히 물에 젖어든다. 얼금설금한 천 사이로 해초같은 것들이 일렁일렁 새어나왔다. 



"원이 씨."

“네."

“교정 끝났어요?”

“곧이요.”

“오후까지 줘요.”

“네.”

"수고해요."



이틀 째 교정 중인 원고는 얼마 전 받아온 남 연우 작가의 새 원고였다.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계속 밀어 두다가 마감이 다 되어서야 시작하는 참이었다. 사수는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설탕에 잔뜩 절여진 믹스커피 향이 코 끝을 스쳤다. 커피 향- 흠, 괜히 숨을 한 번 고쳐 쉰다. 

 손때가 묻어 푹신해진 원고지는 한 눈에 훑어도 천 장 모두, 고르고 예민한 필압으로 쓰여 있었다. 놀라우리만큼 고쳐 쓴 흔적도 없었다. 배워서도 할 수 없는 신중함, 때를 불문하고 원고지 위로 내린 예민함, 전체적으로 고요하며 흰 서정성. 


 이토록 기민한 글을 쓰는 사람의 평판이 궁금했다. 드물게 만나는 입사 동기들이나 이따금의 외주 업체 미팅에서 그 작가님 어때요? 라고 물으면, 남 연우 작가요- 하며 같은 운을 띄웠지만 신기하게도 모두 다른 소릴 했다. 한 사람을 둘러싼 평가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다채롭고, 다양했으며, 제멋대로였다. 


 둘러 말하지만 본질을 정확히 짚어내는 문체, 옹골찬 열매처럼 새그라운 즙으로 가득한 단어, 수면 아래 침잠한 이끼처럼 보들거리는 감정선. 어쩔 땐 끝이 둥근 손가락으로 물감을 직접 찍어 원고지에 비비적거리며 써내려가기라도 한 듯 원초적이며 직설적이지만, 어쩔 땐 메타포가 가득한 시였다가, 절절 끓어 주변을 모두 녹이는 감정적인 소설이었다가. 

 알다가도 모를, 노련한 기성과 풋풋한 신인 사이를 넘나들며, 팔색조 매력을 뽐내는 작가. 말과 언어의 리듬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구축해 낸, 형식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형식의 파괴자, 통 감당 못할 천재성과 예술성을 함께 지닌 천재.



멋대로들, 좋을 대로, 갖다 붙이면 말일. 그런 기괴하고 해괴망측한 단어들의 집합소. 

그 모든 이미지 한 가운데,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고고한 침묵을 지키고 선 사람. 



결국 말하자면 노력하는 천재였다. 수 명에게 수 갈래의 느낌으로 읽힌다는 건, 자신의 마음 앞에 폭넓은 프리즘을 달아놨다는 뜻이었다. 백 가지, 천 가지, 무한의 숫자만큼 다양한 생각을 낼 수 있다는 것. 함부로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인 게 참으로 자명했다. 그가 가진 출발선이 부러웠다. 부러운 건 부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겐 출발선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일평생 힘껏 노력해 쌓아올린 모든 성과만큼이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단계를 거쳐 만개한 쌀알을 수확하는 단계에서 살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와 덮어 놓은 원고지를 들췄다. 1장 끝까지 읽었는데. 759, 760페이지. 760페이지 원고지 한 가운데에 또렷하게 쓰인 <제 2장>. 





<제 2장>


난 너를 깨부순다.





2장, 첫 문단, 첫 문장. 시작하자마자 가슴 한 복판을 두드려 맞는다. 





‘이거 주세요.’

'그림 그려요? 몰랐네.' 




어제의 상념이 떠올라 눈 앞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펜을 사러 자주 드나들던 문구점이었다. 펜이 다 닳지도 않았는데 무의식에 들른 문구점 카운터 발치엔 어제따라 웬일인지 허연 캔버스가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난 어느새 가장 큰 사이즈 값을 치르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는 가장 큰 캔버스를 포장해주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웃긴 건 질문에 별 부정없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이었다. 그림, 그렸었으니까. 아무튼간.


 이사 오고 난 이후 한 번도 연 적 없던 베란다 창고 문을 열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가 바람처럼 딸려 나왔고, 난 재채기를 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다섯 번 더. 붉어진 눈시울에 맺힌 눈물을 떨구며 어딘가 쳐박아 뒀던 이젤을 찾기 시작했다. 책을 담아둔 박스를 들어내고 부서진 액자 무더기와, 쓰다 만 물감통, 지저분한 앞치마 여러 장 등. 오만 흔적을 거의 바닥까지 들어내고 나서야 이젤은 겨우 끄트머리만 삐죽히 드러냈고 그건 잡다한 무게에 반 쯤 짓눌린 채 누워 있었다. 

텅 빈 캔버스와 케케묵은 물감 쩐내의 이젤. 캔버스를 얹자 천천히 오른쪽으로 기울길래 다리 밑에 종이를 구겨 넣어 중심을 맞췄다. 간신히 찾은 붓은 여기저기 털이 빠져 있었다. 팔레트가 없어서 플라스틱 판 위에 물감을 짰다. 붓 끝에 묻혀 캔버스 위로 풀어놓을 생각을 하며. 자유롭게 흩어지던 붓놀림을 기억하며.  




'그러자 넌 나를 깨부순다. 

머리 한 복판을 두들겨 내려친다.' 




문자 그대로 머리 한 복판을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뜨악한 기분에 소리 잃은 비명을 질렀다. 도저히, 아무 것도. 손 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빨강은 빨강이었고 파랑은 파랑, 노랑은 노랑, 초록은 초록. 그 뿐이었다. 색이 그저 색으로만 보였다. 내 눈길엔 손톱만한 프리즘 조차 없었다. 게다가 꾸덕꾸덕 말라 있어서 아무리 윤활제를 부어 개켜도 부드러워지지가 않았다. 붓을 내려놨다. 


깊은 백색에 휘말려서 꼼짝없이 질식할 것 같다.


희고 넓은 면은 말이라도 걸 것 처럼 날 바라봤다. 덜컥 캔버스를 사던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괜한 젠 체였을까? 마음만 부푼 충동 뒤로 감당할 수 없는 암담함이 따라붙었다. 이토록 비참하고 또 참담할 수가 없었다. 


 


'뒤숭숭한 어스름이 숨 속으로 얼기설기 스며든다. 잠겨드는 뒤통수, 백태 낀 시야, 등 뒤를 휘감는 회오리. 진창 한 가운데에 쳐박힌 얼굴에서 희멀겋게 말라붙은 잔풀, 검게 졸아붙은 나뭇잎을 떼어냈다. 균열 틈 사이를 흐르는 붉은 피가 강인한 추위를 만나 단단한 적동으로 굳어 빛났다. 불린 해초처럼 흐물대는 손 끝이 널 붙들지만 네 몸의 온갖 경계는 낱알처럼 부서지고 흩어진다...' 




싱클레어, 홀로 오롯이 선 싱클레어. 오늘과, 어제와, 일주일 전, 한 달 전, 삼 년 전의 내가 사방에서 교차하며 서로를 만났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보고, 일주일 전의 나는 한 달 전의 나를, 삼 년 전의 나는 오늘의 나를. 각기 다른 시간을 보냈지만 그 한 가운데엔- 천 페이지 짜리 원고지를 움켜쥐고 꼼짝도 못하는 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남 연우의 목소리가 공연히 텅 빈 곳의 면적을 재며 사방을 울렸다.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팽이처럼, 핑핑 빗금을 긋는다. 그 덕에 날 둘러싼 사방이 얼마나 커다란 곳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그는 자꾸 나를 싱클레어로 만들었으나, 그렇다고 데미안이 되어주지도 않았다. 이끌어 줄 데미안은 아무 데에도 없었다. 남 연우는 그저 존재하는 햄릿일 뿐이었고, 내게 데미안이 되기엔 너무나 다른 부류였으며 손을 내밀어 봤자 그걸 자처하지도 않을 것이다. 




'(...) 난 흔들린다. 이제 그냥 흔들리기로 했다. 응당 치를 대가였기에 결코 그 누구도 울지 않았다. 머리가 깨진 나도, 내 머리를 깬 너도. 촘촘히 짜인 온갖 쓸모없는 견고함은 결국 이런 대가를 받아야만 마땅했다. 그저 머리가 깨진 채 달려갈 시간이었다.' 




텅 비어 황량히 메마른 곳. 


돌보지 않아 잡초 한 올 자라지 못한 방을 둘러 본다. 저절로 차오르는 샘이 아닌, 누군가 떠다 주는 색을 들이부어 겨우 만든 인조연못. 내 거라고 생각했던 수만 가지 색은 애초부터 내게 아니었다. 물레 감아 돌리듯 빙글빙글 돌려 끊임없이 반복시킨 학습의 결과였다. 발을 담그고 설 만큼 깊었던 곳은 이제 발목이 잠기지도 못하게 얕아져 있을 뿐이었다.  


 후룩, 녹차를 마셨다. 뜨겁던 게 어느새 차게 식어 몸 한 가운데를 정직하게 가르며 흘러내렸다. 싸한 향이 혀 뿌리를 아렸다. 머리가 깨진 채 달려갈 시간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도로 읽는다. 십수번 읽는다. 손 안에서 종이컵이 콱 구겨졌다. 아니, 난 머리가 깨졌지만 달려가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 아무것도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그저 피만 줄줄 흘리며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하등 쓸모없는 옛날만 되새김질 하며 살아갈 것이다. 꼴사나워 눈물이 다 났다. 


 내가 가진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이제야 안다.









 


오억 오조년 만에 써올리는 레테...

등장한 윤, 머무르는 현, 자각하는 원. 

조금씩 움직이는 각자의 감정선, 행동한 선택, 살아나갈 앞으로의 이야기들. 


매 순간이 놀랍기 보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감정을 예리하게 꿰뚫으며 묵직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재미없게 정적으로 놓인 공들이 각자 부딪히면 얼마나 새로운 감정을 터뜨려낼 수 있는지, 그런 것도 보여주고 싶다. 


아무튼 이어 나간다. 계속 써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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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직 없었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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