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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밤 May 09. 2017

낯선 타인으로부터 찾는 희망

< 분노, 2016 > 을 보고. 



분노
怒り, RAGE, 2016








01. 분노라는 제목과 포스터가 풍기는 분위기가 어긋나서 계속 볼까 말까 고민했던 영화다. 보통 이런 영화가 보고 나면 후유증이 크다. 생각을 통째로 바꿔버리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영화를 보기 전에 사전 정보를 알아보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더더욱 혼자 내적 갈등으로 춤을 췄다. 봐야 돼 말아야 돼. 



02. 보고 나니 그냥 저항없이 볼 걸 그랬나 싶은 영화였다. 이야기 기저에 깔린 커다란 주제는 '의심', 그리고 '낯선 사람'. 영화 주제로 자주 선택되는 카테고리들이었다.



03. 영화 <분노>는 여기저기 흩어져있어서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인물들을 데리고 하나의 주제로 응집해나간다. 일본 문학이나 영화가 통상적으로 이런 전개 방식을 선택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 또한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띄었다. 초반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이런 서사구조는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 바라보고, 각자 다른 해석을 하게 만드는 미묘한 재미가 있다. 



정말 소중한 건 점점 줄어들어.




04. '정말 소중한 건 점점 줄어들어.' 잘나가는 전문직에 도쿄에서도 비싸기로 소문난 동네에 버젓이 오피스텔을 가졌고, 자주 만나는 친구 여럿과 주말 내내 파티를 즐기는, 남부럽지 않은 것들을 가졌고 거기에 동성애자라는 성적 지향성 또한 가지고 있는 유마가 쓸쓸하게 하는 말. 



05. 전적으로 동의한다. 점점 나이가 들고 내가 몸담고 있는 환경이 커질수록 소중한 게 늘어날 것 같지만, 정반대다. 오히려 줄어든다.낯선 타인을 마음 놓고 믿기란 참 어려운 일이며 내가 믿는 지인들은 차츰 나이가 든다. 흘러가는 세월에 자연스레 서로를 잃어버리겠지만, 가끔은 어렸을 때와 서로 너무 다르게 자라서 잃어버리게 될 때도 있다. 예상치 못한 상실감이다. 



05.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낯선 타인과 사랑에 빠진다. 이미 가지고 있는건 언제 잃어버릴지 몰라서 자꾸만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다. 스쳐 지나는 눈길만으로도 마음에 화득 불붙는 경우가 있다. 짜릿한 감각. 어찌보면 감정은 감각 뒤에 따라오는 합리적인 설명일 수도 있겠다. <분노>에서도 애초에 각각의 주인공들이 별 개연성 없이 사랑에 빠진다. 참 지리멸렬한 삶을 살아오던 인물들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마음에 찌릿한 스파크가 튄다. 그렇게 갑작스레 자신의 옆자리와 일상을 내어준다. 사랑 참 비논리적이다. 



나는 이즈미를 좋아하기 때문에 타츠야랑 술 마시고 있는 거야.



06. 타카노는 말한다. 어째서 나를 첫눈에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냐고. 그러니까 그건 이 말과도 같다.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도, 알 길도 없는 타인을 뭘 믿고 네 길 한복판에 초대하는 거냐고. 어떻게 치열한 의심도 없이 몰라왔던 사람에게 내 삶을 보여주고, 기꺼이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고,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몸을 움직여 행동하고, 따뜻한 말을 골라 건네는 거냐고. 



타시로랑 함꼐 돌아가고 있어.



06. 희망. 감각 뒤에 감정이 뒤따르면, 그 둘을 뒷받침하는건 이제부터 희망이다. 어떤 특별한 계획 없이, 별다른 의식 없이 단숨에 그 사람을 믿어버리는 건 희망 때문이다. 별볼일 없었던 삶과 사람이지만 당신에게라도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런 희망. 누구나 특별한 뭔가가 되고 싶으니까. 



07. 사람들은 자주 잊어버린다. 희망과 의심은 등을 딱 붙인 불가분의 개념이라는걸. 희망하기 때문에 의심한다. 내게 이런 행복이 주어지는 게 맞는 걸까? 나는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인가? 저 사람은 나에게 왜 행복을 주는 거지?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좌절감 때문에 분노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08. 아이코는 행복했다. 그래서 타시로를 의심했다. 타츠야는 믿었다. 그래서 타나카를 의심했다. 유마는 소중했다. 그래서 나오토를 의심했다. 의심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다. 난 영화 제목의 <분노>는 낯선 타인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낯선 타인을 믿는 자신을 향한 분노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하나로 딱 못박히지 않는 자기 마음을 향한. 



08. 다시 한 번. 희망과 의심은 등을 맞댄 채 자라나는 존재다. 뿌리가 같다. 한쪽이 탐스런 과실을 주렁주렁 매달면 다른 한쪽은 말라비틀어진 껍데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그 가운데에 걸터앉아서 자꾸만 좌우를 반복해 바라보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그럼에도 또다시 희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계속 반복에 반복을 더한다. 






09. 내가 다져놓은 나만의 일상이 누군가의 등장으로 인해 축을 잃고 사정없이 기울어지는 게 싫다. 하지만 그런 삶을 꾸준히 이어가다 보면 막판엔 이도 저도 아닌 허무주의가 전신을 감싼다. 별다른 희망이 없는 삶, 의심마저 사라진 무미건조한 삶. 그러니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건 타인과의 교류다. 내가 온전해질 수 있으려면 타인을 통한 또한 누군가를 통해 내 삶을 되돌아보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 분노를 통해 생각을 다시 조절했다.



10. 마지막으로 의문 하나. 각각 페어가 되는 주인공들 중, 한쪽에 성과 관련된 상처가 있는 건 부러 설정해 놓은 특징인 걸까? 아야코, 이즈미, 유마와 나오토 모두. 일본이 특징적으로 성과 관련된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많은 걸까? 필요한 설정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점은 떨칠 수가 없다. 무드의 고저를 위해 설정해놓은 거라면, 아주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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