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 람.
#등장인물
사진 작가, 데이.
별 그리는, 람.
#배경
교토, 아마사카
S#1. 1일, 교토 아마사카, 어느 한적한 골목
람은 담벼락에 흰 별을 그린다.
푸른색 스프레이와 흰 물감을 들고 다니며, 텅 빈 공간마다 별을 그린다.
그려진 별이 오글오글 은하수를 이루어 밤마다 빛을 낸다.
>카메라,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는 람의 걸음걸이를 잡는다.
나른한 듯 속도감 있는 걸음, 무언가에 쫓기는 듯 이따금 뒤를 둘러보며 목적 불분명하게 걷는다.
그의 손엔 푸른 색 스프레이 한 통과 흰색 튜브 물감이 쥐어져 있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 발걸음. 탁, 발을 디디는 소리가 조그만 직방형의 골목을 울린다.
돌이 울퉁불퉁하게 패인 담벼락을 바라보는 뒷통수, 화면엔 커다란 담벼락과 조그만 뒷통수가 정적인 그림처럼 담기고, 그 위로 분사되는 푸른색 스프레이, 움직이는 팔의 모습을 여러번 반복해서 보여 준다.
속이 비어 덜걱거리는 스프레이 통을 던진다. 굴러가는 빈 깡통 소리가 요란하다.
람은 왼손으로 튜브의 배를 눌러, 오른손 검지에 흰 물감을 짜낸다.
덩어리져 올라간 물감을 치덕인다. 으깬다. 뭉갠다.
희게 발린 손가락에 코를 대고 슬쩍 향을 맡는, 핸드 카메라는 그의 정수리 부분을 비춘다.
기름을 머금은 꾸덕한 냄새. 쓱 말려 오르는 만족감.
람은 푸르게 칠해진 돌 틈 사이로 흰 별들을 그려 나간다.
둥근 별을 그린다.
둥글어 희게 빛나는 별을 그린다.
섞여들어 푸르게 빛나는 별을 그린다.
거친 돌 벽 위로 기름져 미끈한 물감을 문지르며, 푸른 람은 은하수를 퍼올린다.
화면에 처음으로 잡히는 람의 반 쯤 다문 입술, 깜빡임이 적은 두 눈, 물결치는 눈매.
퍼올린 은하수를 살살 버무려 펼쳐놓은 담벼락을 바라본다. 고요한 정적이 숙주와 파생을 한 데 얽는다.
한 발 짝 뒤로 물러서 바라본, 우주의 한 단면.
람의 고개가 느리게 비틀린다.
탁, 발을 디디는 소리와 함께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담벼락 앞, 바닥에 놓인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로 걸어 나아가는 발걸음을 담는다.
화면 밖으로 사라지면,
텅 빈 골목,
거미줄처럼 걸린 전선,
쨍하게 밝은 하늘,
나뒹구는 스프레이 통,
파편난 화면 차례대로 지나가고,
별이 그려진 담벼락이 화면,
람의 은하수 옆으로 천천히 나타나는 덤덤한 필기체,
>‘푸른 람’.
>F.O
S#2. 16일. 데이의 다락방, 빛이 새어드는 커다란 창문 아래
>DISS
>데이는 다락방을 오르는 나무 계단을 밟아 오른다.
포개진 균열이 뒤틀려 삐걱거리는 소리, 빛이 새어드는 커다란 창문 아래에서 멈춘다.
>창문 아래, 어설픈 존재가 몸을 말아 웅크린 새벽.
등이 둥근 털실처럼, 주변의 숨을 머금은.
>Insert, 6일.
-이름이 뭐야?
데이의 질문에 담벼락 아래에서 머뭇거리던 눈동자. 곧 제 손가락 끝 물감을 좇는다.
하얀 담 위로 불분명한 선 몇 개가 어지러이 그어지면,
곧 완성되는 글자 藍.
쪽 람, 푸를 람, 푸른 람.
-람, Blue?
-잠깐 들어 올래?
-추우니까, 곧.
>저를 보던 하얗고 깔끔한 눈동자에 멍울멍울 은하수가 흘러 내린다.
담벼락 은하수가 죄 이리로 흐르나 싶을 만치 밝게 흐른다.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말.
잃었거나 애초에 가지지 못했거나.
>데이는 울타리를 밀고 나간다. 꼼짝 않는 아이에게로 제가 걸어 간다.
-난 데이야.
-나날들. 채워 나갈.
-이제 푸른 날들이 되겠네.
눈물이 식어 시려진 뺨을 손 끝으로 닦고, 물감이 굳어 빨갛게 변한 손가락을 옷에 하나하나 닦는다.
달그락, 떨리는 조그만 미동. 개의치 않는다, 희고 검고 푸르러지는 그의 옷.
>Insert, 다시 16일.
>얇게 흐느적거리는 머리칼이 앙상한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여즉 여린 살결을 매만지며, 손 끝으로 그 윤곽선을 새로이 그려나간다.
창문으로 스며든 푸르스름한 빛이 예민하게 패인 뺨에 서리를 내린다.
제 눈 앞의 조그맣고 가여운 존재.
등 뒤로 저를 포갠다.
맞닿은 곳에서 희미한 박동이 느껴진다.
천천히 헤아리며 눈을 감는다.
S#3. 8일, 데이의 툇마루
> 람은 안경 알에 어두운 칠을 한다. 그리고 그걸 낀 채,
몇 시간이고 툇마루 아래로 흰 발을 달랑거린다. 노랫소리를 흥얼거린다.
몇 시간이고 도타운 솜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눕는다. 눈물을 쏟아낸다.
몇 시간이고 깨끗한 흰 손목, 손등, 팔에 하얀 별을 그려 넣는다, 지칠 때까지.
어두운 앞을 본다, 수많은 것들을 삼키며.
>새벽빛 옅게 비치는 거실, 툇마루. 맴도는 고요함.
데이는 도수 낮은 술을 마시며 천천히, 람의 모습을 필름에 아로새긴다.
마른 허리를 끌어 안아 제게 기대 뉘인다.
람아, 하고 부른다.
돌아올 리 없는 대답 대신 몸짓이 깨어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으로 데이를 바라본다.
-람아, 네 숨에서 푸른 물감 냄새가 나.
데이는 람의 몸에 떠오른 별마다 입을 맞추어 오른다.
색이 어두운 안경을 벗겨내고, 그 뒤에 숨어 얼룩진 눈가를 훔친다.
>흐르며 굴러내리는 물방울들.
스스로 젖어들어 먹빛의 남색이 된, 언젠가는 푸르렀을 람.
짙어진 색에 숨을 뱉으며 데이에게 기대온다. 그는, 얽혀드는 팔과 얽혀드는 눈물을 받아낸다.
갈라낼 틈 없는 숨결이 둘을 얽는다.
처연하게도 섞여든다.
-람아.
하늘을 닮은 색, 하늘이 담긴 색.
데이는 속삭인다. 람ㅡ 텐의 귓가로 그의 약속이 쌓인다.
돌담 위로 흰 눈이 쌓인다. 뒤꽁무니로 자박자박한 휴식이 내린다.
그들은 서로에게 습자지와 먹물처럼 내려앉아 조그마한 숨을 내쉰다.
S#4. 13일, 데이의 인화실
>데이는 독한 현상액 속에서 람을 건져 올린다.
건조대 위, 수십장의 사진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컬러가 빠진 B4 크기의 흑백 사진 속, 피사체는 신기하리만치 덤덤한 눈빛으로 렌즈를 마주한다.
>바짝 마른 사진을 코 끝 가까이에 대고 숨을 내쉬었다.
숨냄새. 일체를 내려놓고 날것의 호흡으로 다가올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람이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데이의 집이 쉬는 들숨과 날숨처럼.
붙어있나 싶으면 훌쩍 사라졌고 어느샌가 또다시.
일상의 돌처럼 발 끝에 툭 채이곤 했다.
>Insert, 13일 새벽.
>흡사 잠시 잠궈둔 수도꼭지 마냥, 람을 흘려 내보내야만 할 때가 있었다.
가끔 밖으로 향하는 새벽녘의 발걸음을 잡아챌 때도 있다.
운 좋게 품 안 서늘해진 온기를 알아차릴 때,
-람,
저를 나지막이 부르는 데이의 목소리에.
그래, 그럼에도 잠시 흐르는 것을 멈추었다가, 다시금 흐른다.
>Insert, 다시 13일.
>텅 빈 툇마루, 돌담 위로 놓인 알이 까맣게 칠해진 안경.
도타운 이불 곁으로 흩어져 있던 물감 한 점 없이 말끔해서.
높은 도수로 적당히 취해 본다.
제 속에 람을 담자, 얼만큼의 자리가 남았는지 가늠해 본다.
람이 흐른다. 은하수가 되어 흐른다.
하얀 별무리를 뒤꽁무니에 달고 달려간다.
람이 흐른다. 데이의 일상 위로 하나의 큰 강이 되어.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북의 고동소리처럼 넓게 울리며 흘러간다.
>툇마루 근처에 매달아 둔 여러 장의 람은, 참으로 덤덤하게도 데이를 바라본다.
덜컹이며 흔들리는 창틀.
썰려 흩어지는 눈송이.
흐르다가 돌아올 것이 분명했지만.
-어디서 흐르고 있어.
분명 아무 것도 두르지 않아 나부끼며 시려울 목덜미가 한숨스럽다.
여러 장의 람을 건져 올린다.
제 나날을 채운다.
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사진 작가, 그리고 푸른 람.
평범한 듯 보이지만 기이한 사연을 지닌 인물들을, 아주 덤덤하고 기이한 느낌으로 써보고 싶었다.
1일부터 31일까지의 날들을 적을 거고, 장면 구성의 순서는 뒤죽박죽.
소설보다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영상이 어울릴 것 같아서 시나리오처럼 썼는데, 시 같기도 하고.
그냥 내 속의 이야기들을 좀 털어내고 싶다.
담아두고만 있으려니 머리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