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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밤 Jun 14. 2016

푸른 람 01

데이, 람.  




#등장인물

사진 작가, 데이. 

별 그리는, 람. 


#배경 

교토, 아마사카 







S#1. 1일, 교토 아마사카, 어느 한적한 골목 


람은 담벼락에 흰 별을 그린다. 

푸른색 스프레이와 흰 물감을 들고 다니며, 텅 빈 공간마다 별을 그린다. 

그려진 별이 오글오글 은하수를 이루어 밤마다 빛을 낸다.


>카메라,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는 람의 걸음걸이를 잡는다. 

나른한 듯 속도감 있는 걸음, 무언가에 쫓기는 듯 이따금 뒤를 둘러보며 목적 불분명하게 걷는다. 

그의 손엔 푸른 색 스프레이 한 통과 흰색 튜브 물감이 쥐어져 있다.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 발걸음. 탁, 발을 디디는 소리가 조그만 직방형의 골목을 울린다. 

돌이 울퉁불퉁하게 패인 담벼락을 바라보는 뒷통수, 화면엔 커다란 담벼락과 조그만 뒷통수가 정적인 그림처럼 담기고, 그 위로 분사되는 푸른색 스프레이, 움직이는 팔의 모습을 여러번 반복해서 보여 준다. 


속이 비어 덜걱거리는 스프레이 통을 던진다. 굴러가는 빈 깡통 소리가 요란하다.

람은 왼손으로 튜브의 배를 눌러, 오른손 검지에 흰 물감을 짜낸다.

덩어리져 올라간 물감을 치덕인다. 으깬다. 뭉갠다. 


희게 발린 손가락에 코를 대고 슬쩍 향을 맡는, 핸드 카메라는 그의 정수리 부분을 비춘다. 

기름을 머금은 꾸덕한 냄새. 쓱 말려 오르는 만족감. 

람은 푸르게 칠해진 돌 틈 사이로 흰 별들을 그려 나간다. 


둥근 별을 그린다.

둥글어 희게 빛나는 별을 그린다. 

섞여들어 푸르게 빛나는 별을 그린다. 


거친 돌 벽 위로 기름져 미끈한 물감을 문지르며, 푸른 람은 은하수를 퍼올린다. 


화면에 처음으로 잡히는 람의 반 쯤 다문 입술, 깜빡임이 적은 두 눈, 물결치는 눈매.  

퍼올린 은하수를 살살 버무려 펼쳐놓은 담벼락을 바라본다. 고요한 정적이 숙주와 파생을 한 데 얽는다. 

한 발 짝 뒤로 물러서 바라본, 우주의 한 단면. 


람의 고개가 느리게 비틀린다. 

탁, 발을 디디는 소리와 함께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걷기 시작한다. 



>담벼락 앞, 바닥에 놓인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로 걸어 나아가는 발걸음을 담는다.

화면 밖으로 사라지면, 

텅 빈 골목, 

거미줄처럼 걸린 전선, 

쨍하게 밝은 하늘, 

나뒹구는 스프레이 통,

파편난 화면 차례대로 지나가고, 


별이 그려진 담벼락이 화면, 

람의 은하수 옆으로 천천히 나타나는 덤덤한 필기체,



>‘푸른 람’. 

>F.O








S#2. 16일. 데이의 다락방, 빛이 새어드는 커다란 창문 아래


>DISS

>데이는 다락방을 오르는 나무 계단을 밟아 오른다. 

포개진 균열이 뒤틀려 삐걱거리는 소리, 빛이 새어드는 커다란 창문 아래에서 멈춘다.


>창문 아래, 어설픈 존재가 몸을 말아 웅크린 새벽.

등이 둥근 털실처럼, 주변의 숨을 머금은.





>Insert, 6일. 


-이름이 뭐야?



데이의 질문에 담벼락 아래에서 머뭇거리던 눈동자. 곧 제 손가락 끝 물감을 좇는다. 

하얀 담 위로 불분명한 선 몇 개가 어지러이 그어지면, 


곧 완성되는 글자 藍. 

쪽 람, 푸를 람, 푸른 람. 



-람, Blue? 


-잠깐 들어 올래? 


-추우니까, 곧. 



>저를 보던 하얗고 깔끔한 눈동자에 멍울멍울 은하수가 흘러 내린다. 

담벼락 은하수가 죄 이리로 흐르나 싶을 만치 밝게 흐른다.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말. 

잃었거나 애초에 가지지 못했거나. 




>데이는 울타리를 밀고 나간다. 꼼짝 않는 아이에게로 제가 걸어 간다. 


-난 데이야. 


-나날들. 채워 나갈.  


-이제 푸른 날들이 되겠네. 


눈물이 식어 시려진 뺨을 손 끝으로 닦고, 물감이 굳어 빨갛게 변한 손가락을 옷에 하나하나 닦는다. 

달그락, 떨리는 조그만 미동. 개의치 않는다, 희고 검고 푸르러지는 그의 옷. 






>Insert, 다시 16일. 

>얇게 흐느적거리는 머리칼이 앙상한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여즉 여린 살결을 매만지며, 손 끝으로 그 윤곽선을 새로이 그려나간다. 


창문으로 스며든 푸르스름한 빛이 예민하게 패인 뺨에 서리를 내린다. 

제 눈 앞의 조그맣고 가여운 존재.


등 뒤로 저를 포갠다. 

맞닿은 곳에서 희미한 박동이 느껴진다. 

천천히 헤아리며 눈을 감는다. 







S#3. 8일, 데이의 툇마루 


> 람은 안경 알에 어두운 칠을 한다. 그리고 그걸 낀 채, 


몇 시간이고 툇마루 아래로 흰 발을 달랑거린다. 노랫소리를 흥얼거린다.

몇 시간이고 도타운 솜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눕는다. 눈물을 쏟아낸다.

몇 시간이고 깨끗한 흰 손목, 손등, 팔에 하얀 별을 그려 넣는다, 지칠 때까지. 


어두운 앞을 본다, 수많은 것들을 삼키며. 



>새벽빛 옅게 비치는 거실, 툇마루. 맴도는 고요함.

데이는 도수 낮은 술을 마시며 천천히, 람의 모습을 필름에 아로새긴다.  

마른 허리를 끌어 안아 제게 기대 뉘인다. 


람아, 하고 부른다. 

돌아올 리 없는 대답 대신 몸짓이 깨어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으로 데이를 바라본다. 



-람아, 네 숨에서 푸른 물감 냄새가 나.



데이는 람의 몸에 떠오른 별마다 입을 맞추어 오른다. 

색이 어두운 안경을 벗겨내고, 그 뒤에 숨어 얼룩진 눈가를 훔친다. 




>흐르며 굴러내리는 물방울들. 

스스로 젖어들어 먹빛의 남색이 된, 언젠가는 푸르렀을 람. 

짙어진 색에 숨을 뱉으며 데이에게 기대온다. 그는, 얽혀드는 팔과 얽혀드는 눈물을 받아낸다.


갈라낼 틈 없는 숨결이 둘을 얽는다. 

처연하게도 섞여든다. 



-람아.



하늘을 닮은 색, 하늘이 담긴 색. 




데이는 속삭인다. 람ㅡ 텐의 귓가로 그의 약속이 쌓인다. 

돌담 위로 흰 눈이 쌓인다. 뒤꽁무니로 자박자박한 휴식이 내린다.

그들은 서로에게 습자지와 먹물처럼 내려앉아 조그마한 숨을 내쉰다. 









S#4. 13일, 데이의 인화실 



>데이는 독한 현상액 속에서 람을 건져 올린다.

건조대 위, 수십장의 사진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컬러가 빠진 B4 크기의 흑백 사진 속, 피사체는 신기하리만치 덤덤한 눈빛으로 렌즈를 마주한다.


>바짝 마른 사진을 코 끝 가까이에 대고 숨을 내쉬었다. 

숨냄새.  일체를 내려놓고 날것의 호흡으로 다가올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람이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데이의 집이 쉬는 들숨과 날숨처럼. 


붙어있나 싶으면 훌쩍 사라졌고 어느샌가 또다시. 

일상의 돌처럼 발 끝에 툭 채이곤 했다.





>Insert, 13일 새벽.

>흡사 잠시 잠궈둔 수도꼭지 마냥,  람을 흘려 내보내야만 할 때가 있었다. 


가끔 밖으로 향하는 새벽녘의 발걸음을 잡아챌 때도 있다. 

운 좋게 품 안 서늘해진 온기를 알아차릴 때, 



-람, 



저를 나지막이 부르는 데이의 목소리에.

그래, 그럼에도 잠시 흐르는 것을 멈추었다가, 다시금 흐른다. 





>Insert, 다시 13일. 

>텅 빈 툇마루, 돌담 위로 놓인 알이 까맣게 칠해진 안경. 

도타운 이불 곁으로 흩어져 있던 물감 한 점 없이 말끔해서. 


높은 도수로 적당히 취해 본다. 

제 속에 람을 담자, 얼만큼의 자리가 남았는지 가늠해 본다. 


람이 흐른다. 은하수가 되어 흐른다. 

하얀 별무리를 뒤꽁무니에 달고 달려간다.


람이 흐른다. 데이의 일상 위로 하나의 큰 강이 되어.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북의 고동소리처럼 넓게 울리며 흘러간다. 





>툇마루 근처에 매달아 둔 여러 장의 람은, 참으로 덤덤하게도 데이를 바라본다. 


덜컹이며 흔들리는 창틀. 

썰려 흩어지는 눈송이. 


흐르다가 돌아올 것이 분명했지만.



-어디서 흐르고 있어. 



분명 아무 것도 두르지 않아 나부끼며 시려울 목덜미가 한숨스럽다.



여러 장의 람을 건져 올린다. 

제 나날을 채운다. 





















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사진 작가, 그리고 푸른 람.

평범한 듯 보이지만 기이한 사연을 지닌 인물들을, 아주 덤덤하고 기이한 느낌으로 써보고 싶었다. 


1일부터 31일까지의 날들을 적을 거고, 장면 구성의 순서는 뒤죽박죽. 

소설보다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영상이 어울릴 것 같아서 시나리오처럼 썼는데, 시 같기도 하고.


그냥 내 속의 이야기들을 좀 털어내고 싶다. 

담아두고만 있으려니 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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