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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Mar 27. 2024

부부 창업단, 사람이 떠나는 시골 포도 마을로

시골 마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삼공이는 생애 첫 10년 중, 꽤 많은 시간을 친할머니와 보냈다. 할머니 성자는 충남 아산시에서 태어나 충남 천안시 성거읍 시구리 마을로 시집왔다. 그때가 1970년쯤이다. 곧 아들 상구가 태어났고, 25년 뒤에는 손녀 삼공이가 태어났다.



삼공이는 그 마을에서 고추장과 김치랑만 밥 먹는 법, 청국장 먹는 법, 경부고속도로 옆에서 포도 파는 법, 맛없는 포도 골라내는 법을 배웠다. 여름이면 천장에 달린 선풍기, 안방에서 꺼내 온 선풍기 한 대로 땀을 말리며 포도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할머니는 포도로 포도주도 만들고, 포도 증류주도 만들었다. 5년, 10년씩 묵혀두기도 했는데, 이는 지인이나 친척들이 맛있다고 돈 주고 사갔다.



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손주들은 커다란 거봉이 먹기도 불편하고, 씹다 보면 즙이 자꾸 입술 사이로 흘러내려 캠벨포도를 더 선호했다. 다만 삼공이는 그중에 장녀였으므로, 어른답게 거봉포도를 좋아해야 한다는 묘한 허세에 이끌려 거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 외에도 어른이어야 한다는 허세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애들이 하는 것이라면 다 싫어하고 봤던 기억이 있다. 분홍색이나 파란색이 아닌, 하얀색과 보라색을 좋아했고, 청국장을 좋아했고, 김치를 좋아했다. 그런 삼공이를 할머니는 애늙은이라고 하면서도 가장 좋아했다. 삼공이는 할머니가 애늙은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물으면서도 쭈굴쭈굴한 애호박을 떠올리며 웃어댔다.



삼공이가 학교에 가고, 천안 시내로 이사 가면서부터는 시구리 마을에 자주 가지 않았다. 학원에 갔기 때문이고, 친구들과 놀아야 했기 때문이고, 시구리 마을에 가려면 하루에 2번밖에 안 다니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맘때쯤부터 삼공이와 할머니 성자, 시구리마을, 거봉포도의 추억은 멈추었다.


17년 정도가 희미하게 잔잔히 흘렀다. 성자는 늙은 몸으로 살다 갑자기 하늘나라로 갔다. 삼공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난 17년을 후회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든 걸 후회했다. 후회해도 바뀌는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했다. 기억나지 않던 온갖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또 그냥 모든 걸 후회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빈 집에 아빠 상구와 엄마 초희가 들어가 산다고, 집과 마당 정비를 시작했다. 집에는 할머니가 심은 파, 담가둔 포도주, 그 옆에 정리되지 않은 소쿠리, 꽉 찬 항아리 몇 개가 남아있었다. 아마 돌아올 줄 알았겠지. 지난주 토요일엔 삼공이와 일공이도 시구리 마을에 가 집을 돌보고 동네를 돌았다. 할머니가 일궜던 밭, 논을 갔다. 옆 밭주인과 갑자기 사라진 할머니에 대한 말도 나누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네의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나며 손길이 적어진 곳곳이 떠올랐다. 거봉포도가 아닌 유행인 샤인머스캣 밭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제 삶을 마쳐 떠나고 있는 마을을 그냥 두면 안 되지 않을까. 이 동네에서 살아온 이들, 일궈낸 밭, 고된 농사로 지켜 온 거봉포도, 함께 만들던 포도주 이야기와 문화가 사라지게 두면 안 되지 않을까. 시구리 마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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