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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Aug 10. 2021

시원한 바람과 함께 찾아온 다짐

에어컨 껐어. 창문 열어봐. 진짜 시원해.


오후 4시. 평소라면 에어컨이 쉴 틈 없이 돌아가고 있을 시간인데 육아 동지들의 단톡방을 확인하곤 에어컨은 송풍 모드로 돌려놓고 거실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북쪽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숨 막힐 듯 온기 푹푹 뱉어내던 바람이 한순간에 이렇게 시원해져도 되나 싶었는데 입추 하루 전이었다. 기가 막힌 절기의 변화를 온몸으로 빨아들이며 식탁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열어두니 바깥소리가 한층 잘 들린다. 모처럼 브런치를 열어놓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바깥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연이어 들려온다. 창문 곁으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니 흰 지팡이를 든 분홍색 상의의 남성 옆에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집 앞 사거리가 대각선 횡단보도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탓이었을까? 흰 지팡이의 남성은 도서관 앞에서 종종 보던 사람 같았고 대각선 횡단보도로 바뀌고 처음 도서관에 왔나 싶었다. 추측컨데, 그 남성은 횡단보도를 건너다 위협을 느꼈을 것이고 보이지는 않지만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하얀 상의를 입은 여성이었을 테고 두 사람이 어떤 말들을 나누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은 남성을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그가 버스에 오르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다시 사거리로 돌아와 제 갈길을 갔다는 사실이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찍어 본 분홍색의 남성과 흰색의 여성


내가 살고 있는 곳 바로 옆에는 도서관이 위치하고 있는데 도서관 특성상 시각장애인이 자주 드나든다.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흰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람, 봉사자의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 안내견의 리드를 잡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흰 지팡이로 바닥을 탁, 탁 치며 길을 찾아가는 사람은 물론이고 택시를 기다리던 사람이 큰 소리로 '여기 택시가 왔나요?' 하고 묻거나, 길을 가던 사람이 미처 그를 보지 못한 택시랑 부딪힐 뻔하자 놀라 소리를 지르는 모습들을 봐온 터였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고 나니 시원한 바람 덕에 좋았던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 여성에게 감사한 마음이 일었고 가슴속엔 온기가 돌았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오고 도서관에 다닌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로비에 걸려 있던 홍보물을 보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에게 무턱대고 도움을 주면 안 된다는 것과 택시를 탈 때에는 왼손은 차체, 오른손은 차문에 닿게만 해주면 머리를 부딪히지 않고 탈 수 있다는 것, 의자에 앉을 때에는 한 손은 의자, 다른 한 손은 책상에 닿게만 해주면 혼자서 앉을 수 있으니 의자를 꺼내 밀어줄 필요는 없다는 것 등이 설명되어 있었다. 나머지 내용들은 기억나지 않는데 바로 찾아보고 숙지하고 있어야겠다. 도와 달라는 외침에 기꺼이 손을 뻗어 결례를 범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마지막으로 시 창작 수업 초반에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던 시를 이곳에 옮겨 본다.



소리의 좌표


버스 정류장,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고 있다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소란스러워지는 버스정류장

소리가 소리를 지우려 하고 있다

지팡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소리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걸어오고 있다

소리가 소리를 찾아오고 있다

소리가 소리를 찾아 표정이 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두 개의 소리가 만나 하나의 소리가 된다

선글라스 위로 하나의 태양이 두 개가 되어 빛난다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되는 소리가 있다


- 박찬세, 2015년 <유심>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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