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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랑 Aug 31. 2022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할 것

시각장애인과 허준이 교수의 축사가 준 울림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고함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얼마나 쩌렁쩌렁 울리는지 13층인 우리 집까지 또렷하 들 밖을 내다본다.

'아, 그분이구나.'

사거리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작년 글에도 등장한 적이 있는 한 남성 지팡이를 휘두르며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다.

보행 신호였던 초록불은 이미 빨간색으로 바뀌었고 남성의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그때 인도를 지나가던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듯한 여성이 재빠르게 내려가 도움의 손길을 건넸는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감사인지, 감동인지, 깨달음인지, 창피함인지 반성인지 모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그런 눈물이었다.


얼마나 겁에 질렸을까. 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차가 다니는 도로 한복판에서 성의 손길이 오기까지 몇 초 남짓한 시간 동안 그 남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난 이렇게 앞도 잘 보이고 우리 가족 별 탈 없이 건강한데, 감사한 마음으로만 살아도 충분한 인생인데 자꾸 무슨 욕심을 려는 걸?


욕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딸 짧은 시간이라도 의자에 앉아서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랐다. 5분이면 끝 일인데 물 마시러 나오고,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오고, 화장실 간다고 나오고, 결국은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느라 도무지 일을 끝낼 생각 없어 보다. 아들은 미루고 미루고 있던 엄마에게 먼저 태권도 학원에 보내달라고 말한 만큼 적어도 품띠를 허리에 맬 수 있을 때 까지는 다니길 바랐다. 고작 일주일에 두 번 유치원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우르르 함께 다니는 태권도인데 힘들고 다리 아프다며 그만 다니고 싶단다. 몇 번을 재차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 돌아오길래 끝내는 4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5분이면 끝날 일, 품띠를 딸 때까지 다니는 것 자체가 나만의 욕심이었다. 나의 욕심을 내 아이들에게 맞추려고 했으니 맞을 턱이 없었다. 내 아이들의 욕심, 아니 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연일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학교 졸업 축사가 화제다. 축사에서 그는 한결같이 겸손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수학계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이력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우러러보게 되는 건 사실이다. 수학자인 그가 구구절절 몰입하게 만드는 축사를 썼니 이건 반칙 아닌가 싶었는데 학창 시절 시인이 꿈이었다고 하니 끄덕끄덕 이내 수긍이 되었다. 생각날 때마다 읽어 보고 싶은 마음에 축사 중 몇 문단 적어 본다.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 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 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중략)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 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중략)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는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준다.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라는 문장이 눈에 콕 박힌다. 우리는 불안하고 위태롭다고 느껴지는 이 세상을 결국은 살아낸다. 내 아이에게 맞지도 않는 옷을 입히려 혹은 맞지도 않은 옷을 내가 입으려고 한 건 아닌지, 자꾸만 쓸데없는 욕심을 부렸던 나에게 눈에 잘 띄기 위해 언제나 밝은 색상의 상의를 입고 자신의 눈을 대신할 지팡이를 꼭 쥔 채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시각장애인 남성 울림을 준 날이다. 다시 다짐하기 좋은 8월의 마지막 날, 브런치에 한 달에 두 편은 쓰자고 다짐했던 스스로와의 약속도 지켰으니 9월이 시작되는 내일부터는 더욱 온전히 경험하고 느끼는 하루를 쌓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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