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학교도서관 입니다

by 바다집

2024년 1월의 어느 날, 밤새 내린 폭설로 푹푹 발이 빠지는 언덕배기 길 위에서 나는 열심히 엑셀을 밟으며 헛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이곳은 경기도에 위치한 00중학교, 오늘은 이 학교도서관의 사서로 면접을 보러 온 날이다. 윙윙. 요란한 소리만큼 전진하지 못하는 차 안에서 초보운전이자, 초보사서인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침 수업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던 학생들 중 몇몇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친다.


"화이팅! 할 수 있똬아아!!!"


얼굴에 익살과 생기가 가득한 꾸러기 같은 아이들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만다. 괜스레 볼이 붉어지는 느낌도 든다. 그렇게 나는 사서로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서로 이곳저곳 면접을 보며 꼭 듣게 되는 단골 질문은 "책을 안 읽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책을 읽게 할 건가요?"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재미있고 편리한 것들이 넘쳐나서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책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강력한 적, 스마트폰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언제나 있다. 그래서 사서들은 독서를 '영업'하는 나만의 전략을 증명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빽빽한 시험과 수업 스케쥴로 교과서와 문제집 이외의 글.자.는 보기만 해도 피곤함과 짜증을 콤보로 느끼는 종족이다. 때문에 사서들은 도서관에서 학생들에게 섣불리 책을 들이밀지 않는다. 일단....(책을 빼고) 친밀해져야 한다.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사서샘이라는 인간에게. 3월 초 학생들은 처음 보는 사서샘에 대한 호기심과 학기 초의 어수선한 설렘을 갖고 도서관을 기웃거린다. 이 때 잘 잡아놓아야 도서관에 쭉 올 수 있다. 아니면 영원히 도서관은 없는 곳이 된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바구니에 사탕과 마이쮸를 가득 부어 놓는 일. 항상 허기진 성장기 중딩들에게 젤리의 달콤함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사서샘을 곁눈질하며 각을 재는 아이들 속에서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관심을 유지한 채, 오고 가는 마이쮸 속 치밀한 탐색전이 시작된다.


#혜은


"책을 좋아하긴 하는데요, 읽는 거 말고.... "


도서부 모집 포스터를 보고 쭈뼛쭈뼛 다가온 아이는 3학년 혜은이다. 책을 읽는 거 빼고 다 좋단다. 책 냄새, 종이의 촉감, 정리하는 것.... 그래서 1학년, 2학년 때도 쭉 도서부였다는 이 아이... '귀인이구나!' 감이 딱 왔다. 혜은이는 함께 도서부를 해왔다는 승주와 기훈이를 넝쿨째 데려왔다. 직감적으로 도서부의 주춧돌이 될 트라이앵글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부 모집 홍보부터 선발까지, 신입 부원들의 교육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은 충성을 다짐하며 도서부를 꾸리는 일에 몰두했다. 역시 마이쮸보다 달콤한 것이 권력이다.


혜은이가 뽑아준 명찰
도서부원들이 만든 도서부 모집 포스터



#도영


"선생님, 책 좀 추천해주세요."


도영이는 도서관에서 며칠째 (진짜로) 책을 읽던 (희)귀한 아이였기에 책 추천을 해달라고 다가왔을 때 바짝 긴장이 되었다. 정말로 잘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책 좋아해?" "그동안 재미있게 읽은 책이 뭐야?"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범위를 좁히고 자신있게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 책 읽어봤어?" "네." 헉.... 당황;;;; 침착하자! "그럼 이 책은?" "읽어봤어요." "그럼 이건? 이... 이건?" 그 뒤로도 몇 권의 책을 모두 다 읽어봤다는 아이. 도영이는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책 읽는 학생이었다. "저는 좀 사회 비판적인, 현실적인 얘기가 재미있어요." 도영은 서가를 걷는 내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그때 한 권의 책이 빛을 내며 내게 손짓했다. 아주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사회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라 더 와 닿았던 정아은 작가의 <잠실동 사람들>이었다. "이거 읽어봐, 후회하지 않을 꺼야." 나의 첫 번째 독서 영업이었다. 첫 영업은 고객의 대만족으로 성공적이었고, 이후로 꾸준한 책 추천이 이어졌다.


도영이 만들어 온 꼬마눈사람과 빨간 손
출처- 예스24


# 영섭


영섭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에 오는 VVVIP다. 그런데 점심시간에만 오던 영섭이가 쉬는 시간에도 도서관에 오는 것을 보며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1학년 교실은 별관 1층에 있는 도서관과는 다른 건물의 5층. 그러니까 학교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점심을 먹기 위해 도서관 문을 잠그고 나오며 영섭과 마주쳤다. 도서관에 오려다 돌아서는 영섭의 눈가에 스치듯 반짝이는 물기를 봤고, 나는 영섭을 데리고 도서관에 들어왔다.


"선생님, 반 애들이 저 보고 찐따래요. 자꾸 쌀쌀맞게 대하고 제 흉도 보는 것 같아요."


키도 덩치도 나보다 큰 영섭이가 안경 안쪽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어두워지던 낯빛, 항상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혼자 급식실에 가던 뒷모습, '책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 라고 말하며 희미하게 웃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 뒤로도 영섭이는 늘 도서관에 혼자 왔고, 다행히 나에게 다가와 가끔씩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내가 그 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별 게 없었다. 그저 힘들 때는 '나 힘들다'고 주변 사람 누구에게 라도 꼭 얘기하라는 것, 친구들이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것은 그 애들의 문제이지 너의 문제가 아니니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다니라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시기가 한참 그럴 때라서 너 말고도 수많은 친구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도서관에 있다 보면 고민 상담부터 고해성사까지 다양한 속 얘기를 들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영섭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내가 추천해 준 조경규 작가의 <오므라이스 잼잼>이었다. 만화로 소개하는 맛있는 음식들 속에 새콤달콤한 추억까지 버무려 그린 웹툰 원작으로, 홀로 급식실에 가야 하는 영섭이의 소중한 밥 친구가 되어준 책이다.


"선생님, 저는 도서관에서 책 읽을 때가 마음이 제일 편해요, 여기서 책 읽다 이 책장에 깔려도 행복할 거 같아요." 라고 말하는 영섭이.


"선생님, 언젠가 이 책에 나오는 성심당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꼭 튀김소보로를 먹고 올 거예요." 라고 말하는 영섭이.


'영섭아, 샘은 언젠가 네가 도서관에 오지 않아도 될 때가 온다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


문구공모 이벤트 중에서
출처- 예스24



#페미니즘과 노무현과 야구


삶나누기에 올라온 <고등학교에서 사회주의자로 살아가기>라는 글을 읽었다. 중학교에 있으면서 비슷한 현실을 보고 느껴왔던 터라 깊이 공감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사뭇 다르다. 가장 놀랐던 점은 중학교 (특히 남자)학생들 사이에서 '페미니즘'과 '노무현'이 조롱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 성공과 좌절 책 어디 있어요?(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선생님, 페미니즘이 뭐예요?(건들건들)"


관련 책들에 대한 질문에는 상대방(성인 여성)에 대한 자신들만의 시선과 잣대, 그리고 비하가 깔려 있다. 애써 숨기지도 않는다. 해당 책들은 항상 찢기거나,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거나, 뒤집혀 꽂힌 채 발견된다. 도서관에 자주 찾아와 종이학을 접어주곤 하던 영표가 흥얼흥얼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라~"를 부르는 걸 들었을 때는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의 죽음이 놀이가 될 수도 있다니.... 아이들은 민감하게 모든 정치적 현상을 흡수하고 눈치챈다. 그리고 (어른들이 그러하듯) 쉽게 조롱하고 약점으로 여기고 비난한다. 정치적이라고 여겨지는 책이 내 책상에 놓여있으면 "샘은 빨간색이에요, 파란색이에요?" 묻고, 계엄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도서관에서 떠드는 아이들한테 싹 다 계엄령을 내려 잡아조지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페미니즘과 성 관련 책을 낄낄거리며 보다 "샘, 스껄이 뭔지 알아요?"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는 동작을 하며 음흉하게 웃는 면상을 보면 마빡을 갈기고 싶어진다. 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해도 낄낄 웃으며 깐죽거리는 문제의 아이들을 보며 곁에서 혜은이가 "샘, 쟤들은 여자샘들 말 안 들어요. 체육샘 부르세요." 할 때면 무거워진 마음이 끝없는 심해로 가라앉는 것만 같다.

당시 최고의 문제였던 준석은 그날도 껄렁거리며 도서관에 들어와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면, 적어도 적으로 만들지는 말자.' 나는 새로운 전략을 떠올리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녀석은 "샘, 저 책 읽으려고 온 거예요. 이거" 하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게 야구 책이다. "준석이 야구 좋아하니? 샘도 야구 완전 좋아하는데! 어디 팬이야?" 순간 녀석의 눈이 반짝. 그날 준석이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팀은 기아 타이거즈. 작년까지 야구를 했고, 투수였지만 제구가 안돼 야구를 그만 두었다.(슬픈 눈) 그 밖에 좋아하는 건 서양 역사. "준석이 멋있다. 운동도 잘하고 역사도 좋아하고."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그동안 조롱과 만만함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눈빛이 온순하게 가라앉는 것을. 희열이 느껴졌다. 그 뒤로 준석이는 껄렁한 자신의 무리가 도서관에서 난동 피우는 것이 부끄러운 듯 조용히 모두를 이끌고 나가거나 오지 않았다. 가끔 오면 나와 야구 이야기를 했다. 작년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을 했고, 나는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어쩌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이해와 인정, 믿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뒤로도 몇몇 문제의 남자아이들과 관계를 트는 데 '야구'는 큰 다리가 되어 주었다. 야구로 친해진 녀석들에게 어떤 대상에 대해 비웃을거라면, 적어도 왜 웃는지 유튜브 알고리즘이 아닌 스스로의 생각을 만든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얘기해주었다. 오지랖퍼 사서샘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에 고맙게도 아이들은 얼굴을 붉히며 멋쩍게 웃어주었다.


야구에 대한 북큐레이션 코너 중
북큐레이션 서가



일 년의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이야깃거리와 크고 작은 변화 그리고 흔적들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곳에 있는 수많은 책들처럼 다양한 학생 사람들을 만났다. 나이는 그들보다 내가 더 많지만, '초보' 사서의 눈에는 삶의 여러 부분에서 '초보'인 그들의 미숙함과 고군분투와 그 과정에서 반짝이는 모습들이 더 잘 보였던 것 같다.

졸업과 종업을 하루 앞둔 날, 도영은 스스로 약속했던 마지막 책을 다 읽고 독서 쿠폰을 들고 와 초록색 '완독' 도장을 받았다. 나는 도영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며칠 전 갑작스럽게 사고로 돌아가신 '정아은'작가가 떠올랐다. 마치 작가님이 나에게 귀한 인연 하나를 소개해 주고 간 느낌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재미있는 책 일 년 동안 많이 읽었어요. 고등학교 가서도 책 열심히 읽을게요." 도영이 말했다.


책 <아름다운 실수-코리나 루이켄 > 중에서


삶에 완독이 있을까? 읽다 포기한 책,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책, 고민과 숙제를 남기는 책, 지루한 책.... 그래서 한동안 읽지 않는 책.... 이 모든 게 합쳐져야 비로소 완독이 아닐까.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여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자꾸만 세상에 일어난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하나 괴롭고 답답해지곤 한다. 그럼에도 고민하고 의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1. 아기 독수리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