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방학인데 나는 왜 여행을 못 가?
다른 친구들은 다 놀러 간단 말이야"
사실 처음에는 인생 첫 겨울방학에
학원만 가는 아이가 조금 짠했다.
그렇지만 나도 방학 직전에
예정 없이 재택근무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리고 갑자기 외주를 구할 수도 없고
그래서 줄 수도 없는 상황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재택을 없앤 회사 입장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답답하겠지. 뭐라도 보여줘야 했겠지.
특히 실무자가 아닌 분들은
재택근무가 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왜 다들 불만이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
예전에는
"김 차장, 자료 좀 가져와"
라고 하면 되는 일인데
slack을 열고 김철수인지 김창수인지
헷갈리는 김 차장 이름을 검색하고
메신저로
"김 차장, 자료 좀 가져와" 라고 쳤는데
"어떤 자료요?" 라고 하면
정확하게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 말을 해야 하는데
온라인으로 힘들거든.
만약 대면이었다면 자료 가져오라고 했을때
같이 화면을 보면서 어떤 데이터를 원하는지
실무자 자리에서 대충
실무자 눈치를 보면서
본인에게 필요한 자료가 뭔지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이걸 온라인으로 요청하려니까
귀찮고 힘들지. 알지.
남편에게도 정확하게 지시하지 않고
집안일을 시키면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데
내가 필요한 자료가 뭔지
정확하게 지시하는 것도 힘들겠지.
스스로 잘 모르니까 답답하지.
내 눈앞에 있으면 일단 시키면 되는 일인데.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가 없는 사람들은
별 상관없었겠지.
나도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는 나이였다면
재택이 없어지는 게 별문제가 없었을 텐데,
아니면 혼자 다닐 수 있는 나이였다면
별 상관없었을 텐데,
아니 방학만 아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하필 방학을 앞두고 갑자기
이런 청천벽력 같은 결정이 내려질 줄이야.
하지만 윗분들 말씀대로
"재택근무가 없던 시절도 있는데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므로
어떡하든 팔자 좋은 년이 되어야 했다.
구구단을 겨우 외웠는데
미적분을 하라고 시킨 게 아니라
48의 최소공약수가 뭔지 물어보는 정도의
난이도였거든.
최소공약수의 정의만 알면
구구단 외운 연산실력만으로도
48의 최소공약수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11월 말부터 12월까지 여기저기 열심히 알아봤다.
맞벌이 부모의 니즈를
육아를 하지 않는 회사 인사팀보다
더 잘 아는 (god) 갓 사교육 기관들은
11월 말부터 겨울방학 일정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면서 셔틀이 있는 사교육은
수영이 유일해서 수영특강으로
오전 일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그다음은 줄넘기 특강으로 결정했다.
줄넘기 학원에서 들을 수도 있고
태권도장에서 줄넘기 특강을 들을 수도 있었지만
태권도장에서 듣기로 결정한 이유는
셔틀 때문이었다.
주류가 아닌 아파트에 살면
셔틀도 오다 마는데
태권도장 셔틀은 우리 아파트까지 온다고 하길래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12월 초에
수영특강과 줄넘기 특강을 결제했다.
아침에 수영을 보내면
셔틀 시간까지 합쳐서 2시간 확보,
줄넘기까지 하면 1시간 10분 더 확보,
12시까지 어찌어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정확하게 점심을 먹이고
그다음 학원을 갈 때 까지가 문제였고
1시간 30분 정도만 해결되면 되는데
그 1시간 30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이 없었다.
답이 없을 때에는 부딪혀봐야지.
이게 내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냥 부딪혔다.
점심시간에 집에 와서 밥을 차려주고
다시 출근을 했다.
매일 퇴근시간을 다시 세팅했고
점심시간을 이리저리 변경했다.
그렇게 1월을 보냈다.
3월 개학까지 이제 한 달이 남았다.
한 달만 더 뺑이 치자,
한 달만 어찌어찌 버티자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겨울 방학 특강하는 사교육으로 세팅해서 확보한
12시까지의 시간도
2월이 되면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우리애 학교처럼 1월부터 3월까지
쭉 방학인 학교도 있지만
중간에 개학을 했다가
다시 봄방학을 하는 학교도 있어서 그런지
2월 초에는 겨울방학 특강이 다 사라졌다.
학원들도 방학을 했다.
무엇보다 아침 8시 30분부터
10시 10분까지의 시간을 책임져주던
수영특강 수업을 하는 곳이
2월 초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1년에 나에게 주어지는 연차는 총 23개,
이 23개를 가지고 3월에 개학을 하면
반차, 반반차를 써서
학원 세팅이 익숙해질 때까지 쓰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반반차를 잘 쓰면 8일을 커버할 수 있다. 8일이면 무려 이틀이 빠진 2주이다.
하나의 연차를 가지고 대략 2주를 커버할 수 있다면
연차를 아끼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언제부터 이렇게 내가
촘촘하게 나의 연차를 계산하고 살았는지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남편은? 아이 아빠는?
단 하루도 연차를 내지 않았는데?
아니, 그럴 생각조차 안 했을 텐데?
가끔 시부모님이 남편 회사가
너무하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속으로 빈정댄다.
회사 때문에 못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안 하는 건데?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나는 저렇게
일하는 사람 입장 전혀 이해 못 하는
어른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여하튼 2월 초는 수영특강이 없어지고
수학학원도 방학을 한다고 해서
그리고 나도 왔다 갔다 하는 게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휴가를 내기로 했다.
이마저도 설날 끝나고 오려다가
그래도 명절에 인사는 해야지 싶어서
명절날 아침에 오는 일정으로 다녀오기로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명절날 아침에 왔다고 반겨주기는커녕
빨래하고 시댁으로 간다고
짜증 내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 알았으면
그냥 더 길게 가도 되었던 건데 후회가 되기도 한다.
8박~10박 정도 일정으로 다녀올 만한 곳을 골랐다.
처음에는 당연히 괌을 생각했다.
그런데 괌을 가면서
힐튼에 스테이를 안 할 수는 없었는데
힐튼은 11월에 검색했을 때부터 풀북이었다.
심지어 비싼 방도 풀북이었다.
공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괌은 아쉽지만 포기했다.
따뜻한 나라로 가고 싶어서 호주도 알아봤다.
브리즈번이랑 골드코스트를 가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직항이 없었다.
하와이를 갈까도 생각했는데
2주보다 짧게 가면서
하와이를 가기가 어쩐지 아까웠다.
하와이를 다시 가게 된다면
빅아일랜드도 꼭 가보고 싶었고
카우아이도 꼭 가보고 싶었는데
애랑 둘이 가서 저 두 개의 섬까지
이동할 걸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났다.
따뜻한 나라를 포기하고
내가 좋아하는 미서부를 갈까도
잠시 고민했는데
수영을 할 수도 없고
이례적으로 비도 온다고 하고
무엇보다 야구 시즌이 아니라서 마음을 접었다.
그랬더니 방콕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명절에 한국인지 해외인지
구분이 안 간 다낭에서
너무 실망을 했을 때
내 친구 써니맘이 방콕을 다녀왔는데
애랑 가도 할 것이 많다고 했던 게 문득 생각이 났다.
방콕은 클럽을 가야 하고,
루프탑 바를 가야 하고,
태닝을 해야 하고,
마사지가 아니라 스파를 해야 하고,
짜뚜짝 시장에 가서 쇼핑을 해야 하고,
카오산로드의 길거리에서
싸구려 팟타이를 먹어야 하는 동네 아니던가.
당연히 아이랑 갈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써니맘말에 의하면
태국에 한 달 사이하는 게 유행하면서
아이랑 할 것도 천지삐까리라고.
써니도 너무 좋아했다고.
그래?
그럼 방콕으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