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8

Shanghai__상하이

by 해이문

"아담, 무언가 시원해. 이게 뭐지?"

"바람."

"바람? 아 그렇구나. 어? 바람이 나에게 오니까 이것이 흔들리며 내 얼굴을 가려. 이건 뭐야?"

"머리카락."

"아담,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바람이 시원하게 불며 내 머리카락을 춤추게 하고 있어. 이럴 땐 이것 밑에 앉아 바람을 만끽하면 기분이 좋아져. 음.... 이것도 뭔지 알아?" 하와는 그들 곁에 웅장하고 울창하게 서 있는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무."


샤워 후 물기를 닦고 옷을 입었다.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살짝 들어 바닥에 손을 쑤욱 집어넣어 본다. 샤워 전 스위치를 켜놓은 전기장판은 수면 취하기 딱 좋은 완벽한 온도로 댑혀져 있다.


"누씌.... 항ㅇㅇㅇㅍㅂㅈㅇㅇㅇ...."


근데 누가 라디오를 듣나.... 무슨 소리지? 내가 잘못 들었나?


이불속에 몸을 집어넣으니 샤워 후 개운해진 몸이 쫘악 풀리며 이보다 더 나른하고 편안할 수 없는 순간이다. 배게에서는 오렌지와 라벤더 오일을 블렌딩 한 것 같은 상큼하면서 아늑한 향이 난다. 내가 샤워하기 전 아로마 오일을 뿌려놨었나? 아닌 것 같은데? 며칠 전 뿌려놓은 잔향인가? 스르륵 눈이 감기고 제대로 잠의 순간으로 빠지고 있었다. 착착착... 착착.... 응? 이거 파이가 걷는 소리인데? 걸을 때 파이 발톱과 바닥이 닫는 그 소리. 거의 완성되어 가는 무거운 잠의 무게로 고개를 들기는 어려웠다. 겨우 시선만 문쪽을 향해 돌리자 정말 파이가 걸어와 껑충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내 가슴팍 이불을 들추어 얼굴을 부비고 쑤시며 들어가는 파이 등을 쓰다듬자 털의 감촉이 손안 가득 느껴져 행복감이 몰려왔다. "네가 아부다비까지 어떻게 온 거야? 응? 너무 보고 싶었어. 알아?" 내 이야기는 흘려듣고, 본인도 졸리다는 듯 나의 허리를 거쳐 다리까지 내려가 종아리깨에 자신의 등을 대고 눕는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누씌.... 쵸앚ㅇㄹ평ㄹㅎㅈㅅㅊ....."


"파이야, 근데 이게 무슨 소리지? 너도 들려?" 뭔지 모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잠에 취한 눈을 어떻게든 떠보려 노력한다. 눈에 걸쳐진 뿌연 안개를 없애려 몇 번이고 눈을 감고 떴다를 반복했다. 시야가 조금 선명해 지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가 바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세상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어? 넘버8 같은데....?'


'나 유연해서 이만큼이나 찢을 수 있어' 친구한테 유연성을 자랑하듯 양쪽으로 한없이 쫙 벌어진 나의 양다리를 보자, 나는 너무 놀라 황급히 다리를 오므렸다. 얼마나 급했는지 오므리는 과정에서 무릎의 안쪽이 서로 강하게 부딪히자 미치도록 아파왔다. 의자에 몸을 걸치고 누워있던 자세에서 재빨리 허리를 세우고 앉자, 나무 족욕통 안에 들어가 있는 나의 허연 두 맨 종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귓구멍이 간지러워 본능적으로 새끼손가락을 넣고 긁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졸았을 때 흘리던 침이 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부다비 내 방도 아니었고, 전기장판 이불속은 더더욱 아니었다. 파이도 없었고, 파이가 등을 대고 눕던 내 종아리는 따뜻한 족욕통 물 안에 담겨있었다. 밤부 세븐(Bamboo 7)이었다.


상하이 비행에서 항상 가는 곳이다. 오후 2시쯤 호텔에 도착해 한숨 자고 일어나면 저녁 8시쯤인데,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아직 오픈한 레스토랑을 찾아 늦은 저녁을 먹는다. 그러고 나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가는 곳이 밤부 세븐 (Bamboo 7) 마사지샵이다. 들르는 시간은 보통 밤 11시쯤이고, 항상 내 양손에는 장본 것들이 가득 들려있다.


참고로 나는 참 예민한 사람이다. 공중 화장실 이용이 불편해 캠핑 가는 것을 꺼리고, TV나 음악을 틀어놓고 잠들지 못하며 정적이 흘러야 비로소 잠들 수 있다. 책을 읽을 때나 무언가를 쓸 때도 주변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치는 편이며, 냄새에도 부쩍 민감하다. 익숙한 나의 방, 나의 침대, 나의 베개가 아닌 곳에서의 취침은 당연히 나에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에센셜 오일 향을 블렌딩해 스프레이로 만들어 가지고 다닌다. 그렇게 호텔방에, 침구에, 베개커버에 뿌리고 나면,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하지만 익숙한 향이 주는 안정감에 그래도 꽤 잘 자는 편이다.


그런 내가 그것도 의자에 앉아, 그것도 남자인 넘버 8 앞에서, 그것도 무릎이 접혀진 두 다리를 쫙 벌리고 반쯤 누워 침을 흘리며 졸고 있는 상황이라니. 처음에는 창피함에 화들짝 놀랐다가, 부딪힌 안쪽 다리가 아팠다가, 조금씩 잠에서 깨고 정신이 돌아오니 정말 가관이란 생각에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고 슬며시 두 손으로 웃고 있는 입을 가렸다.


마사지가 다 끝났으니 내가 발을 들어야 물이 가득한 족욕통을 옆으로 옮기고, 내 종아리의 물기를 닦고, 마무리를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그런 모양새로 깨어날 생각을 안 하니 그는 조심스레 "손님 (Ma'am)", 중국어로 "女士 (nǚshì)"를 연발하며 얼마나 난처했을까. 드디어 현실로 돌아온 나는 차례차례 원래 해야 하는 순서대로, 말을 잘 들으며 진행되는 마무리 단계를 지켜본다.


그는 로션통의 펌프를 꾹꾹 두 번 누른 후, 손바닥 가득해진 하얀 로션 위로 그 옆에 있던 오렌지와 라벤더 오일을 한 방울씩 톡톡 떨어뜨려 비빈다. 눈처럼 흰 로션이 내 종아리에 닿아 녹아 없어진 후에도, 꿈에서 맡았던 그 향은 꽤 오래도록 머물렀다.


"상하이에서 뭐 할 거야?" 이 질문은,


"여기 다음에 어디로 비행가?", "남자/여자친구 있어?", "어느 아파트에 살아?" (우리는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아파트에 거주하는데, 각 건물의 위치와 스타일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서로 캐주얼하게 묻곤 한다), "비행한 지 얼마나 됐어?", "언제 그만둘 거야?"와 함께 비행 중 서로에게 묻는 레퍼토리 질문 중 하나다. 비행 가는 도시에서 무엇을 할 건지 말이다.


1년 전 샌프란시스코 비행을 함께했던 마르코가 묻자, 나는 언제나 동일한 나의 상하이 레이오버 스케줄을 열거했다.


"오, 거기? 우리 호텔 앞 사거리 스타벅스 쪽에 있는 마사지샵이잖아, 맞지? 나도 거기가!"


모닝빵을 찢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아, 그래?' 하듯 눈길을 주자, 그는 물었다. "나는 항상 넘버 12에게 마사지받아. 너는?" 넘버 8이라고 대답하며, 계속 나를 불편하게 했던 그 마음이 또 올라왔다. "넘버 8이요." 매번 마사지샵에 들어서면 찾는 마사지사가 있는지 묻는 안내원에게 답할 때도, 항상 무언가 불편했다. 누가 시킨 것처럼 괜히 작은 소리로 대답하곤 했다.


왜 사람 이름이 숫자인가?

실명이 아닌 것은 나도 충분히 안다.

그러나 직장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일지라도,

'사람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사용하려고'라는 이유를 대더라도, 사람에게 숫자를 부여하는 건.... 야만적이고 가혹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꽃 이름이나 영어 이름 또는 중국어 이름을 외국인들이 부르기 쉽게 조금 변경하는 등.... 닉네임을 만들 수 있는 다른 소재와 방법은 충분하지 않은가.


마르코에게 숫자로 된 마사지사들의 이름에 대한 나의 견해를 얘기하자 "그렇지, 맞아."라고 동의하긴 헸지만, 바로 1년 전 나와 샌프란시스코 비행했을 때 말했던 연인과는 헤어졌고, 지금 썸 타고 있는 모델 지망생 남자의 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에 대해 끝도 없이 이야기하는 그는, 그 부분에 대해 나만큼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난 이 년여 동안 두세 달에 한두 번꼴로 보고 있는 넘버 8과는 제법 친해졌고 또 편해졌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중국어만 구사하는 그와 한국어와 영어만을 구사하는 나는 언어로 소통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29살인 그의 나이와 고향을 떠나 상하이에 온 지는 3년 되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손이 야무지고, 친절하고,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구수한 미소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 나는 한 번도 직접 그 이름을 부르지는 못했다.


마사지를 마치고 카운터에서 계산할 때면 매번 망설이는 내 마음을 알아채곤 한다.


"사람 닉네임이 왜 숫자인지 혹시 물어봐도 될까요?" 아니 아니 너무 직접적일 수 있으니, 최대한 차분한 음성으로 "혹시 저녁식사는 하셨어요?" 하며 편안하게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하는 거야. 대화가 편안해질 때쯤 "꽃이나 영어이름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니까... 한번 매니저분과 검토해 보세요." 하고 말해보는 거야.


입을 때 보려다 가도,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다를 수도 있는 거야. 막상 그 자신들은 이 부분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지. 내가 너무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일 수도 있어." 항상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나의 입술을 무겁게 누르는 음성이 있었다.


약 3500년 전, 신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사람은 '생명체'가 되었다. 아담이 각 생물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그것이 그것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비행을 그만두며 밤부 세븐(Bamboo 7)에서 마지막으로 그를 본 날까지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이, 마사지 끝나고 가는 거야?"


계산을 마치고, 카운터에 맡겨놓은 장본 것들을 건네주는 안내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자 뒤에서 이제 샵에 도착한 마르코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어디서 저녁을 먹고 오는 길이며, 스타벅스가 아직 문을 닫지 않았으니 망고 스무디를 사가야겠다는 등 이런저런 스몰톡을 주고받고 우리는 내일 돌아가는 비행에서 보자며 인사했다.


돌아서서 입구문을 열자 뒤편 카운터에서 들리는 마르코의 음성이 귀를 스쳤다.


"넘버 12(트웰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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