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리

Brussels__브뤼셀

by 해이문

12:35 am BRU.

오늘 밤, 정확히 말하면 내일 새벽, 비행 스케줄을 확인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머릿속으로 셔틀버스 픽업시간을 계산하며 또 한숨이다.


한 달 내내 한 비행 걸러 병가를 내고 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무겁다. 눈이 빠질 것 같고,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어도 통증이 느껴져 괴롭다. 눈 알이 멍이 든 것처럼 쑤신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무기력감도 함께 찾아왔다. 계속되는 두통과 컨디션 저하로 무기력해진 것인지, 이미 무기력해 있었기 때문에 아프게 된 것인지 어떤 순서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다섯 걸음 정도 되는 침대 맞은편 옷장으로 걸어간다. 옷장 문을 열고, 양말을 꺼내 신는다. 오후 4시쯤 된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견뎠어.' 하고 혼잣말을 하며 울었다던 미국 여배우가 생각났다. 극심한 우울증이었다고 한다.


"비타민D를 한번 복용해 보자. 그리고 낮에 10분 정도 맨얼굴로 그리고 가능하면 팔다리도 노출되는 옷을 입고 매일매일 햇빛을 쬐어. 꼭! 알았지?"


몇 달 전부터 매주 보고 있어 부쩍 친숙해진 의사 아맬리아는 고함량 비타민D를 포함해 몇몇 다른 약을 함께 처방해 주며,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내 뒷모습을 향해 '꼭!'을 두어 번 더 외친다.


이미 쬐어야 할 햇살은 받고 들어왔다. 이제 잠을 자야 한다. 한 2시의 햇빛 한 줄기도 허락하지 않을 암막커튼을 치고, 마조람과 라벤더 오일을 블렌딩해 가슴과 어깨를 마사지하며 천천히 호흡해 본다. 100부터 거꾸로 숫자를 세어 보고, 플랫메이트가 건네준 따뜻한 수면안대를 눈에 얹고,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백색소음을 틀어놓기도 하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눈을 감아보기도 한다. 오로지 잠을 자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만,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오늘도 밤비행 전 한숨도 청하지 못하고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금 불안함이 몰려온다. 또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11월의 브뤼셀은 쌀쌀했다. 룸서비스로 따뜻한 치킨수프를 주문해 그릇 바닥이 보일 때까지 천천히 한 스푼, 두 스푼 정성껏 먹었다.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허기도 조금 가셨고 몸도 조금 따뜻해졌다.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꼼짝도 하기 싫었지만, 나는 두꺼운 코트를 챙겨 입고 나갔다. 햇빛을 쬐어야 한다.


나의 수피 비행이었던 브뤼셀 (Supy/수피비행: 정식 승무원으로 비행에 투입되기 전 진행하는 수습비행) 벌써 5년 전쯤 인 듯하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였던 내 생에 첫 비행.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감개무량한 마음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잔뜩 흐린 회색 하늘은 크고 작은 구름들이 이곳저곳 엉기어 있을 뿐 햇빛 한 줌 내어줄 마음이 없다.


지금 내 삶에 콕 집어 우울한 사건이 있는 건 아닌데... 왜 증상이 비슷한 것 같지? 뜬눈으로 며칠이 지나기도 하고, 자야 한다는 강박에 더욱 잠들지 못해 괴로운 것인데. 왜 나도 그녀처럼 눈물이 날까. 이유는 모르겠다. 모든 것이 귀찮다. 어쩌다 약속이라도 잡히면, 넘어야 할 산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도 두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지는 오래되었다.


"멜라토닌, 들어봤지? 우리 인체는 어두운 밤에 자야 해. 그렇게 수면을 취하면서 니 몸에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생산되어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 그런데 너는 밤은커녕 낮에도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잖아.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멜라토닌이 부족하면 호르몬 대사가 잘못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영향이 있을 수 있어."


비타민D와 햇빛 받기를 처방해 주며 아맬리아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정말 한 줌도 내려주지 않을 거야?" 여전히 흐릿한 하늘을 퉁명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기운이 몸 안으로 숙 들어오는 것이 느껴져 코트를 여미고 몸을 감쌌다. 호텔방으로 다시 올라가야겠다.


"어? 중간 갤리에서 일했었지?"


밖에서 사복을 입은 모습으로는 동료들을 마주친다 해도 서로 알아보는 게 사실 쉽지 않다. 우리는 동일한 유니폼을 입고 정해진 규칙 안에서 비슷한 헤어스타일과 비슷한 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비슷한 모습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동료들이 나를 알아보는 확률은 조금 높은 편인데, 대부분 비행에서 유일한 동양인이기 때문인 것 같다.


회사에 아시안 승무원의 비율이 적은 편이기도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등의 아시아 국가를 비행할 때면 모를까 다른 나라를 갈 때면 대다수 비행에서 동양인 승무원은 거의 나 혼자다.


브라질에서 온 카밀라는 뒤쪽 갤리에서 일했다고 했다. 허리까지 푸른 긴 머리와 코트 깃을 눈밑까지 올린 사복차림맨 얼굴의 그녀를 내가 쉽게 알아챌 리 없다. 그랑플라스에 홍합을 먹으러 가는 길인데 식사 전 이면 함께 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어차피 본인이 우버를 불렀으니 가는 길이 수월할 거라면서.


"밥은 먹었는데..."

"그럼 후식 먹어야지!"


망설이는 사이 택시가 도착했고, 어느새 우리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단번에 "아니야." 거절하는 것이 나다운 것인데, 망설인 걸 보면 지금 나는 어디든 가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오렌지 주스 2팩이 더 있냐고 물을 때와 승객들의 헤드셋을 수거하기 시작했으니 앞쪽에서도 진행하라고 알려줄 때 인터폰을 통해 들리던 그녀의 음성이 상냥하고 친절했던 것이 떠올랐다.


"노노 모두 내가 낼께, 걱정 마. 나중에 아부다비에서 맛있는 커피 사주면 되지. 혼자 가기 적적했는데 같이 가주는 것 만으로 내가 고맙지. 떠밀어서 함께 가는 것 같아 좀 미안하기도 하네. 그런데 네가 단번에 거절했으면 아 그렇구나 했을 텐데, 망설이더라고. 진심으로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니 얼굴을 내가 봤어.


가끔은 고민하는 것을 대신 결정해 주는 사람도 필요해. 그렇지 않아?"


지갑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내게 카밀라는 망설이던 내 얼굴표정을 흉내 내며 조용히 웃었다. 그랑플라스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몸으로 쑤욱 들어오던 차가운 기운을 피하고 싶었을 뿐, 어두운 호텔방으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어떻게든, 잠시라도, 비춰줄 것 같은 햇빛을 만나고 싶었나 보다.


"그 사람이 꼭 가까운 사람일 필요도 없어. 가끔은 complete stranger (전혀 모르는 사람)가 답을 줄 때도 있어."


다니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우버 기사가 말하자, 카밀라와 나는 대화를 나누다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앞 좌석에 그를 바라봤다.


"고민하는 것을 대신 결정해 주는 사람."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눈만 깜박이며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우리 이름을 소개해야 할 차례 같았지만, 무언가 다음 말이 이어질 것 같았고 기다려야 할 타이밍 같았다.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게 뭐야?"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며 묻던 그의 눈과 마주쳤다. 카밀라의 눈도 한 템포 늦게 서서히 나를 향했다.


'나?' 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말을 이어갔다.


"결정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어. 얼마나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선택이 쉽게 내려지지 않는다면 쉬어야 해. 쉬고 난 후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때, 그때 스스로 결정해 봐. 첫걸음은, '나는 지금 결정할 힘이 없다'라고 인정하는 것부터야."


다짜고짜 묻지도 않은 조언을 해대는 그보다 내가 더 놀랐던 건, 그의 말이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는 것과 내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달라고 손짓하던 녀석이 드디어 내 눈을 응시하며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늘 외면하던 나의 힘이 더 강했는데, 얼마나 힘을 키운 것인지 이번만큼은 내가 녀석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녀석, '두려움'.


"택시기사라서 싫었던 거야? 파트타임으로 낮에 잠깐 우버기사 하는 의과대학생일수도 있잖아. 잘 생겼던데, 너랑 말도 잘 통하고!" 슬쩍 윙크하며 냄비에 있던 홍합을 건져 포크로 쏙쏙 빼먹는 그녀가 말하자, "아니야. 그냥 난 장거리연애 못해. 그리고 그냥 작업멘트잖아. 딱 보면 몰라?" 나는 꾸덕한 밀크셰이크를 빨대로 휙휙 저으며 대꾸했다.


그랑플라스로 가는 택시 안에서의 30여분이 3분처럼 느껴질 만큼 그와의 대화가 즐겁고 편했다. 나는 자주 웃었고 이해받고 있다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정감에 반갑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떻게 안 건지 지금 내게 필요한, 심각하고 무거울 수 있는 말들을,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만들어 건네주고 있었다. 신기했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조심히 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괜찮다면 대신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어도 괜찮다고 했다.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줄곧 자연스레 대화하다 연락처를 물을 때 떨리던 입술과 초조함을 입은 그의 음성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이름은 Daniel (다니엘), 성은 Complete-Stranger (전혀 모르는 사람) 였다고 작별 인사하던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미소 짓게 했고, 나는 진심으로 웃었다. 연락처를 받지 못해 무안할 법도 한데, 택시에서 내려 문을 닫으려는 내게 그는 자세를 뒤로 돌려 말했다.


"Hey, it will all work out as it should. (있잖아, 모든 건 결국 흘러가야 할 길로 흘러갈 거야)"


백미러를 통하지 않고 직접 마주한 그의 눈은 참 깊었다. 나는 나직이 고맙다고 말한 후 택시문을 닫았다.


브뤼셀 비행 후, 정신없이 두어 번의 비행을 더 다녀왔고 드디어 4일의 휴일이다. 알람소리 없이, 뒤척임 없이, 두통도 없이, 심장 두근거림도 없이 정말 오랜만에 푹 잤다. 이렇게 '잠'을 잔 것이 얼마만이란 말인가.


"커피 사줘야지!"


카밀라에게 온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오늘 마시자!' 답장을 보냈다. 거실로 나와 양손으로 커튼을 탁! 펼치니 햇살이 쏟아졌다. 벽시계는 오전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마흔이 다되어 가는데 이대로 한국 가서 뭐 할 건데? 한국 가면 계획은 있어? 두통이 와도 견뎌야 해. 지금은 그래도 말할 수 있는 직업이 있잖아. 우울증이던 수면장애던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되잖아. 필요하면 약도 처방받으면서. 그럼 잠도 잘 자게 될 거야. 아무튼, 이대로 그만두면 안 돼! 절대!"


결국 나는 인정했다.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고, 당장 쉬어야 한다고 울부짖는 나의 몸에게, 그럼에도 알은 채 한번 하지 않고 곪게 놔둔, 내 안에 가득했던 '두려움'을 받아들였다. 첫걸음을 뗀 것이다.


한국생활이 자신이 없었다.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만두는 동료들을 보면 영어 강사, 증권 애널리스트, 결혼, 요가 강사, 다른 항공사로 이직, 유기농 차 브랜드 창업, 다른 나라로의 유학 등... 무언가 계획들이 있어 보였다. 나는 계획도 없었고 그보다 하고 싶은 것이나 관심 가는 것이 없다는 게 가장 두려웠다. 오래전부터 책과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지만, 뚜렷하지 않았다. 그 희미함이 두려움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발목을 잡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몸과 마음은 점점 더 잠을 이루지 못했고 병들어 갔다.


며칠 전, 아맬리아가 써준 진단서를 들고 매니저를 만났다.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오고 싶다고 하니, 20년 동안 비행을 하고 현재 오피스에서 일하는 그녀는 백번 이해한다며 이해해 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마음도 가벼웠다. 도대체 그동안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참아왔단 말인가. 그렇게 '힘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나는 잠시 쉼을 선택했다.


들리는 바로는, 그렇게 휴가를 떠나게 되면 회사에서 퇴사를 권유하는 이메일을 받게 된다고 하는데. 그마저도 받아들였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평안했다. 흘러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 아닌가.


삶이 유독 버겁고 힘겨운 날들이라면, 둘 중 하나다.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들어와 막힌 곳을 보지 못하고 그래도 어떻게든 흘러가 보겠다고 머물고 있는 것. 머물수록 물이 고여 탁해질 뿐, 막힌 곳은 열리지 않는다. 반드시 뒤로 다시 헤엄쳐 나가 흐르는 곳으로, 내가 흘러야 할 곳으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들어 갔음에도 겪는 시련이 있다. 그럴 때는 그냥 겪어야 한다. 도리가 없다. 나의 찬란한 바다에 도착하려고, 가는 길에 맞는 풍파라면 어쩌면 고마운 것 아닌가.


"고였어, 고였어. 헤엄쳐 다시 나가야지 뭐."


나는 혼자 중얼대며 쏟아지는 햇빛을 더 느끼고 싶어 창문까지 활짝 열고 소파에 누웠다. 주섬주섬 바닥의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토크쇼 진행자가 물었다.


"에이미, 어떻게 빅을 처음 만났나요?"

"저는 암스테르담 벤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갑자기 한 남자가 다가와 제 옆에 앉더니, 몇 시냐고 물었죠. 그게 빅이었어요."


"처음 그를 봤을 때 어땠나요?"

"오, 저는 처음 보자마자 그가 노숙자라는 걸 알았어요. 냄새가 고약했거든요. 그의 손톱이나 수염등 차림새도 그랬고요.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는 제가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갈색 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에이미와 빅은 1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말하고 있었다.


장거리 연애는 전에도 해본 적 있다. 장거리 연애를 선호한다고 말할 만큼 나에게 잘 맞았던 것도. 그의 직업이 마음에 걸렸음을 고백한다. 너는 뭐라도 되니? 너 자신 하나 돌볼 줄도 모르면서. 갑자기 스스로가 몹시 오만하다는 생각에 감추기 힘든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다. 거절했던 나의 '이유'만이 이제와 고개를 불쑥 내밀뿐이다. 너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 무언가 더 들킬 것 같은 마음에 급하게 리모컨을 찾아 TV를 껐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잘 수 있게 도와준 햇살 같았던 그를 생각하며 나는 속삭였다.


'It will all work out as it shou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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