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이터널 선샤인
사랑과 운명.
이 두 단어는 말 자체가 로맨틱하다. 어원을 살펴보면 더 사르르 녹을 것 같은데, 순수 우리말 '사랑'은 다른 나라의 사랑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꽤 다르다. 영어로 'love' , 스페인어로 Amor(아모르), 일본어와 중국어로 '아이'로 발음되는 사랑은 모두 '좋아한다' , 愛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말 '사랑'은 생각할 사, 헤아릴 량에서 온 '사량'으로 <생각해서 누군가를 헤아린다> , <생각으로 헤아린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저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서로 교감하기를 원하는 애정의 성격 보다는
"오늘 점심은 잘 챙겨먹었을까?"
"비가 오는데 우산은 잘 챙겨갔나?"
"오늘 얼굴색이 어제와 좀 다르던데 무슨 일이 있는걸까?"
등으로 누군가를 생각하고 헤아리고 또 헤아린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운명은 말 그대로 "목숨의 움직임" 또는 "생명의 흐름"으로 묘사되는데, 그말인즉슨 삶이 움직여지고 흘러가는대로 두는 것이 바로 운명이라는 말이다.
운명적인 사랑은 그렇담, 삶이 흘러가는대로 두었을 때 그 누구보다 많이 헤아리고 생각하고 또 머릿 속에 담아두는 상대와 교감을 초월하는 질기고도 사려깊은 애정 관계인 것이다. 이보다 더 진하고 끈끈한 정이 있을까?
하지만 흘러가는대로 두어도 한번 만나기 힘들까 말까한 운명의 상대를 강제로 지우려 한 사람이 있다. 설렘을 통해 사랑이 들어오고, 사랑이 극에 달하면 가슴이 터질듯한 불같은 애정을 느끼고, 그 애정은 애증과 시린 추억을 가져오는데, 마지막 단계에 다다라 끝을 고통으로 두고 싶지 않은 한 남자가 있다.
사랑할 운명이라면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영영 머릿속에서 삭제되더라도 그 상흔이 남아 있고, 그 상흔은 다시 운명적인 만남을 일으켜 그 사람 주위에 수많은 덫을 설치한다. 덫은 사실 굉장히 눈에 띄게 설치되었음에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모르는 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마음이 향하는대로 움직이는 것일까. 아마 우리는 모두 가슴뛰게 만드는 일을 향하는 것일테다. 이 과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이터널 선샤인' 이다. <이터널 선샤인>을 봤던 당시 나는 연애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라 그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본 뒤, '기억조작'으로 사랑했던 추억을 지우려 했던 주인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적어둔 영화 리뷰에는, 어떤 사람과 정말 사랑하게 된다면 '기억조작'을 전제한 관계는 애초에 맺지도 않을 것이며 아무리 슬프고 힘든 기억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헤어지자마자 자체적으로 기억 조작을 시작했고, 왜 자고 있을때는 무의식을 통제할 수 없는지 한탄하기까지 했다.
특히 가장 웃겼던 글은,
나를 사랑해주거나 내가 사랑할 누군가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면 난 그 사람을 한번 마음에 두면 평생 잊지 않을 테니까.
와 정말 ㅋㅋㅋㅋㅋㅋ 연애도 사랑도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 적어놓은 글이다. 이별하자마자 마음에서 없애버리려고 노력했던 것을 떠올리면 사람은 역시 한 치 앞을 모른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사람을 평생 잊진 못하겠지만 사람의 간사함을 이 글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연인이 이별했을 때 각자 겪는 과정을 다소 극단적인 '기억조작'으로 뼈저리게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지금까지 로맨스 장르 영화의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것이겠지. 사실 운명을 믿는 사람으로서, 기억이 사라져도 그 사람을 만나면 바보같이 또 사랑에 빠질 게 뻔하다고 본다.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와 매력이 있어서 몇 시간만 대화해봐도 똑같은 루틴에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이렇게 운명의 굴레, 굳이 운명을 믿지 않는다해도 누군가에게 쉽게 휩쓸리고 감정이 동요되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돌로 태어나는게 낫지 않을까? 괜히 감정소모하는 데 심술부리는 나였다. 사실은 그 감정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면서.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평생 못 보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으면 기억을 잊혀두기보다는 묻어두고 가끔씩 야금야금 좋은 기억만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 보기엔 벅차고, 그렇다고 이별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상대라면 거리를 두고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 기억은 사라져도 결국 사랑하게 될 상대는 정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흘러가는대로 두는 것. 바람처럼 사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물밀듯이 밀려오면 그 홍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중에 감정에 익사할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떨까? 감정이 미우면서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그런, 이상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