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글에서, 우리는 카메라의 어원이 된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상(image) 을 그대로 비추는 기구였다. 이제, 카메라의 등장까지는 단 한 발자국이 남았다. 이번 글에서는 어떻게 지난 200여 년간 카메라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였는지를 알아보자.
빛을 '담아 두기' : 감광성 물질
이제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하여 외부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 다음으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은 저 비춘 이미지를 손으로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담는' 것이었을 테다. 이 순간에, 다시 앞선 글의 문단으로 돌아가자. 1800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마침 이 즈음 하여 이루어진 화학의 발전을 통해, 사람들은 빛에 반응하여 성질이 변하는 물질, 즉 감광성 물질(photosensitive material)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로소, 카메라가 만들어지기 위한 두 가지 필요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외부의 상을 그대로 비출 수 있는 구조물과, 그 비추어진 빛을 영구적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화학 물질이 그 두 가지다.
그림 1. 조세프 니엡스, <르 그라의 창문을 통해 본 조망>. 최초로 새겨진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디어에 따라 만들어진 최초의 사진이 바로 1827년 조세프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épce) 가 남긴 '르 그라의 창문을 통해 본 조망' 이라는 사진 작품(이 당시에는 핼리오그라프라고 불렀다)이다(그림 1). 카메라 옵스큐라의 빛이 상으로 맺히는 지점에 역청을 바른 캔버스를 세워 두고 장시간 노출을 시키면, 빛을 받은 부분의 역청은 빛에 반응하여 굳지만 빛에 약하게 노출된 부분은 아직 씻어낼 수 있게 된다. 이후 역청을 휘발유와 같은 용매로 씻어내면, 외부의 빛이 그대로 '굳어서' 캔버스에 그림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놀라운 역사적 의의를 가진 작품이지만, 이러한 카메라 촬영 방식은 명백한 한계를 가졌다. 자그마한 바늘 구멍을 통과한 빛은 너무나도 약하고 역청이 빛에 반응하는 시간이 길게 걸렸기 때문에 무려 8시간 동안이나 빛을 노출시켜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 흐릿했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움직이지 않는 풍경을 간신히 담을 수 있는 정도이며, 사람이나 움직이는 물체를 담기에는 어림도 없다(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8시간을, 미동도 없이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림 2. 바늘 구멍이 아닌 렌즈를 이용하여 빛을 모아 상을 만듦으로써 많은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 다루겠지만, 우리의 눈에 있는 수정체가 이런 역할을 한다.
이러한 단점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개선이 이루어졌는데, 첫 번째는 바늘 구멍이 아닌 렌즈를 사용하여 더 많은 빛을 모으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빛에 대해 더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재료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빛을 한 곳에 모아야 상이 만들어지는데, 작은 구멍을 사용하면 구멍의 크기를 넓힐 수 없으므로 구멍 대신 빛을 굴절시켜 모아줄 수 있는 렌즈를 이용한 것이다(미주 1). 이처럼 렌즈를 이용하게 되면 빛을 모을 수 있으니 상이 더욱 밝아지게 되고, 고정되어 있던 초점 거리 또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그림 2). 이에 더불어 질산염이나 할로겐화은 같은 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광성 물질이 개발되었고, 젤라틴과 같은 다양한 재료로 만든 건판들이 개발, 개량됨에 따라 노출 시간은 비약적으로 줄어들어 1800년대 후반에는 밀리초 단위의 노출로도 사진을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고작 60년 만에 8시간에서 천 분의 1초로 그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1900: 카메라의 발전
이후,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였고 다양한 노출계와 같은 부속품들이 개발될 뿐 아니라 필름의 소형화와 렌즈 가공 기술이 발달하며, 1900년대에는 소형 카메라가 등장할 수 있었다(그림 3).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니콘, 라이카, 캐논 등이 이때 비약적으로 성장한 회사들이다(미주 2).
여담이지만 이 회사들의 이름에 담긴 역사가 재미있는데, 독일의 라이카Leica는 1869년 레이쯔사(Leitz company) 라는 광학 회사로 설립되었다가 카메라에 주력하며 레이쯔 카메라의 줄임말인 Leica 로 이름을 변경하였고(현미경도 취급하며 다양한 현미경 부속 기기들도 만드는데, 생체 조직을 자주 다루는 실험자라면 라이카는 현미경뿐만 아니라 여러 장비들로 익숙할 것이다), 니콘은 일본광학-일본어로 니폰 코가쿠Nippon Kogaku-의 줄임말이다. 캐논은 독특하게도 우리도 잘 아는 불교의 관세음보살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불교도였던 캐논의 창립자가 관세음보살의 줄임말인 관음(일본어로 칸논) 으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림 3. 카메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브랜드 중 하나인 니콘의 휴대용 카메라. 기계공학과 전자공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만들어졌다.
잠깐 옆으로 샜는데, 이렇게 소형화된 카메라는 여전히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였다. 요즘에도 취미 삼아, 그때의 감성이나 필름 카메라의 독특한 색감을 선호하여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적인 불편함이 많이 존재한다. 예컨대 필름을 지속적으로 구매해서 보충해 주어야 하며, 필름이 빛에 노출될 경우 사진을 정상적으로 찍을 수 없고, 찍는다고 해도 필름을 가져다가 현상소에서 실제 사진으로 현상하는 복잡하고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흔히 영화에서 그려지는-예를 들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등-붉은 조명 아래에서 액체에 인화지를 담그는 그 작업이다. 붉은 조명을 사용하는 것은 인화에 사용하는 인화지가 붉은 조명에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림 4; 미주 3).
그림 4. 흔히 그려지는 인화실(dark room). 붉은 조명은 당연히 음산한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은 아니고, 인화지의 반응을 막기 위한 것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러한 불편함은 1975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가 코닥 사에서 만들어지면서 해결책을 얻게 되었다. 이젠 필름을 사용하지 않는, 빛을 전기 신호로 바꾸고(CCD 나 CMOS 와 같은 광센서가 이것을 담당하고 있다), 이 전기 신호를 반도체에 저장했다가 언제든지 불러오거나 복사할 수 있는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카메라가 등장한 것이다. 비록 초창기에는 4 킬로그램의 무게에 거대한 크기 때문에 외면받았지만(그림 5), 점차 성능이 개선되고 저렴해지며 2000년대부터 디지털 카메라가 시장을 앞서기 시작했다.
그림 5. 코닥에서 만든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 DS-1P. 카세트 테이프에 30장의 사진을 담을 수 있었고, 사진 한 장을 찍는 데 30초가 걸렸으며 무게는 4kg이 나갔다.
물론 아직도 일부 영화 감독들은 필름을 고수하기도 하고, 디지털에 비하여 필름만이 가지는 독특한 특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되고는 있지만 최소한 현대에서는 디지털 사진기가 압도적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이러한 트렌드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가 영화관으로, 이젠 구형 필름식 영사기를 가용하는 곳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그림 6; 미주 4). 실제로 CGV, 롯데시네마에 이어 마지막 필름 영사기를 사용하던 영화관이 2013년 12월 디지털 영사기로 전면 교체하며 필름 영사기는 발품을 팔지 않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림 6. 클래식한 필름 영사기. 흔히 캠코더에 대한 아이콘으로 사용되는, 네모난 몸체에 둥근 필름 릴이 붙은 아이콘은 이 형태를 본딴 것이다.
필름 마다마다 인쇄된 퀄리티의 차이도 크고, 필름에 담을 수 있는 영상 길이에 한계가 있으므로 상영기사가 중간중간 필름을 갈아 주어야 하는 불편함도 이에 한 몫 했을 것이다(그래서 고전적 필름 영사기는 2대 세트로 운용된다-한 영사기가 끝나기 전 다른 것을 켜고, 두 번째 필름이 돌아가는 동안 첫 번째 영사기의 필름을 다시 교체하는 식. 이 교체 시기를 정확히 알려주기 위한 펀치 모양의 마크를 큐 마크cue mark라고 부른다. 상영기사가 이 큐 마크를 유심히 보고 정확한 시간에 필름을 교체하는 식. 그러나 현대식 필름 상영관에서는 이런 번거로운 과정이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나가며
이번에는 두 개의 글을 통해 카메라의 역사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그 과정에서 사진과 미술이 주고받은 영향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으며, 어떻게 현대미술이 고대의 카메라 옵스큐라까지 이어지는지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알지 못했던 연결 고리를 알아가는 것은 늘 놀랍고 재미있는 일이다. 다음에는 이 연결 고리를 더욱 확장한다. 세상에는 카메라와 매우 비슷한, 그러나 자연이 빚어낸 '도구' 가 있다. 우리의 안구, 눈이다. 눈 먼 시계공이 어떻게 눈을 만들어 내었는지에 대하여 다음 글에서는 카메라와 대조해 가며 살펴본다.
1. 이 렌즈가 조합되어 현미경 그리고 망원경으로 만들어지며 일구어낸 역사에 대해서는 이전에 적었던 글을 참고하라(망원경과 현미경이 역동적으로 만들어지던 시기에 마침 철학적, 과학적으로 역동적 논의가 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위대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도 안경 렌즈를 세공하며 생계를 잇던 사람이었다-이 렌즈 세공 시 발생하는 미세한 유리 가루가 그의 사인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참고로 렌즈의 역사는 의외로 매우 오래되었는데, 기원전 이집트에서도 수정을 둥글게 깎아 만든 렌즈가 있었으며 역시 기원전 그리스에서도 비슷하게 렌즈를 이용했다. 로마 시대에서는 현재 사용하는 것처럼 시력 교정을 위해서 쓰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렌즈의 어원은 콩에서 왔다. 우리가 아는 렌틸콩이 그 기원인데, 볼록하고 둥근 모양이 꼭 닮았다.
2. 이러한 카메라 회사들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크게 성장하였는데, 첨단 전쟁 기계들은 정교한 광학 기구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총기류에서의 조준경, 정탐에 있어 빠질 수 없는 망원경, 폭격을 위한 폭격조준기, 잠수함에 쓰이는 잠망경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광학 기기들이 전쟁에 가용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 광학 회사(안경이나 현미경으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인 칼 자이쯔도 이 시기에는 독일군의 의뢰를 받아 연합군의 조준기를 연구, 복제하는 등의 일을 하기도 했었다.게다가, 이런 회사들이 현미경과 같은 아이템도 다루는 것은 당연히 렌즈를 다루던 회사들이기 때문이다.
3. 우리가 흔히 폴라로이드 사진이라고 부르는 즉석 사진은 근본적으로는 같지만 기계적으로 다른 원리를 가진다. 일반적인 필름 카메라는 사진을 찍으면 필름에 빛이 닿고, 이것이 할로겐화은의 할로겐 이온에서 전자를 내보내게 만들어 감광핵을 형성함으로써 나중에 현상 과정에서 감광핵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원리인데, 폴라로이드 사진은 두꺼운 필름 밑바닥에 들어 있는 현상액을 사진을 찍는 순간 롤러로 쭉 밀어내며 즉각적으로 찍힘과 동시에 현상해내는 원리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사진이 서서히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광핵이 만든 잠상이 현상액에 의해 발달되는 것.
4.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필름은 통 안에 돌돌 감겨 있는 상태에서, 위아래에 구멍이 뚫린 직사각형 모양이다. 이 구멍은 왜 존재하나?필름의 이송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영상의 원리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가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진들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움직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인데(대략 초당 24장 이상) 이것이 가능하려면 정확한 속도로 , 정확한 위치에 필름을 이동시켜야 한다. 이것을 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톱니바퀴에 필름을 걸어 돌리는 것이고, 이에 따라 톱니가 걸리기 위한 구멍을 만들어 둔것이다(퍼포레이션이라고 한다). 여담: 그렇다면 영화는 왜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롤을 일정한 속도로 돌린다면, 차를 타고 스쳐가는 풍경처럼 이동하는 것이 보일 텐데 말이다. 그 답은 영사기에 있는데, 영사기는 정교한 기계식 셔텨를 이용해 아주 짧게 단속적으로 필름을 움직이고 멈추게 하며 멈춘 순간에만 빛을 내보내는 구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