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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이 Sep 16. 2021

대학병원 인턴이 코드블루(심정지) 방송을 들었을 때.

코드블루, 심정지, 심폐소생술, CPR

< 네 번째 대학병원 인턴 이야기 >


근무 3개월쯤 되면 인턴은 콜(인턴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것) 전화가 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아, 또 콜오네. (젠장.)

네 인턴입니다.

네 선생님 15분 안에 갈게요.

하지만 말턴(인턴 기간이 끝나갈 즈음의 인턴을 이렇게 부름)이 되어도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드는 콜이 있다.

심폐소생술 (CPR) 알림 방송.


병원 내 방송 시작음은 대부분의 아파트 단지내 방송 시작음과 유사하다.

방송은 90% 이상이 환자나 보호자를 찾는 내용이다.

딩~딩~딩~딩~ 62병동 임하윤 환자분 62병동 임하윤 환자분 자리로 돌아와주세요.

CPR 알림 방송은 시작음을 다른 방송과 다르게 구분해 놓았는데, 리듬이나 음조가 다른 방송 시작음보다 다소 긴장감 있다.

다른 방송 시작음은 딩~딩~딩~딩~ 한다면 심폐소생술 방송 시작음은 띠링띠링~! 띠링띠링~! 한다.

띠링띠링~! 띠링띠링~! 62병동 CPR. 62병동 CPR.


병원마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우리 병원은 심폐소생술 상황이 생기면 내과에 배정된 인턴들은 무조건 CPR 현장으로 뛰어가도록 되어 있다.

내과가 다른 과에 비해 인턴들은 상당히 여유가 있기 때문에 당직실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거나 당직실 불을 끄고 쪽잠을 잘 때가 많다.

다들 핏이 구린 회색 당직복을 입고 낡은 2층침대 여기저기에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다가 하나 둘씩 잠에 들면 낮잠 타임도 갖는다.



한 병원의 당직실 모습.


그러다 누구 한 명에게 콜이 오면 그 인턴은 아쉬운 한숨을 푹 쉬면서 일을 하러 가고, 남은 인턴들은 얼른 하고 와, 하며 북돋아준다.

낮잠 타임에 콜이 오는 경우에는 콜을 받은 인턴만 일어난다.

도가 튼 인턴은 본인에게 온 콜에는 귀신같이 깨면서 남의 콜이나 병원 내 방송에는 왠만해서는 깨지 않는다.

그런 내과 인턴들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소리가 바로 CPR 방송 시작음이다.


띠링띠링~! 띠링띠링~!

담소가 뚝 끊긴다.

잘 자던 인턴들이 커튼을 걷고 허겁지겁 신발을 신는다.

얘들아 가자 일어나

어디래 어디래?

뛰자 뛰자


회색 옷을 입은 인턴들이 다같이 뛴다.

엘리베이터 안내원에게 부탁한다.

CPR 가요. 4층이요. 감사합니다.

안내원의 조작으로 엘리베이터가 다른 층들을 모두 건너뛰고 CPR 장소로 인턴들을 데려간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인턴들은 다시 뛴다.


CPR 장소에 도착하면 거의 항상 누군가는 먼저 와서 가슴압박을 하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안 와서 10개 층계를 뛰어내려온 인턴, 옆 병동에서 드레싱(소독)을 하다 말고 환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달려온 인턴, CPR이 난 해당 병동을 담당하는 인턴, 근무시간이 끝나 사복을 입고 퇴근하다가 다시 달려온 인턴.

침대에서가 가장 많지만 병동 바닥에서도, 병원 복도에서도, 외래에서도 CPR 상황이 터진다.


CPR을 주도하는 레지던트 선생님이 CPR 시작부터 시간을 재며 모든 상황을 진두지휘하고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은 가슴압박으로 거세게 흔들리는 환자의 허벅지에서 신중하게 검사를 위한 혈액을 뽑고

또 다른 선생님은 보호자에게 현 상황을 전달하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간호사 선생님들은 환자의 사지에 달라붙어 혈관을 통해 약을 주입할 정맥 경로를 확보하고

다른 간호사 선생님은 온갖 모니터링 기계를 가져와 환자에게 연결하고

또 다른 선생님은 모든 상황을 기록한다.

마취과 선생님은 환자의 기도를 확보하기 위해 기관지로 관을 넣는다.


인턴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손에 장갑을 끼고 머리를 질끈 묶고 환자의 양쪽에 줄을 선다.

CPR을 주도하는 레지던트가 킨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 차례로 환자의 가슴을 압박한다.

우지끈,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이 손에 생생한 감각으로 느껴진다.

갈비뼈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한 세트, 두 세트 지날수록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심폐소생술을 지속해도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보호자가 울부짖는다.

어떻게 이래, 어떻게 이렇게 돼. 이건 아니잖아.


얼마 전에 다른 인턴 동기 언니와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어제 CPR 3번이나 났는데 다 내가 가슴압박하니까 살아나더라."

"와, 언니는 진짜 의사 해야겠다. 신기하네."

현대의학의 정점에서 하기에는 우스꽝스러운 발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언니가 와줬으면 좋겠다.

언니가 와주면 환자가 살까.

입술을 꽉 깨물고 더 세게, 더 깊게 가슴을 압박한다.



제 글을 좀 더 가볍게 웹툰처럼 읽고 싶으신 분들!

인스타에도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이디는 baby_doctor_ha 입니다.

https://www.instagram.com/baby_doctor_ha/

많이 놀러오세요!

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제 글을 읽어 주시는 것만으로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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