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더 좋은 주인이 되고 싶게 해 - 04
연이은 이삿짐 싸고 풀기에 나가떨어져 잠만 잔 것이 꼬박 하루다. 이 이상은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강아지 하쿠는 아주 길쭉길쭉한 강아지인데, 사정상 1년 정도를 나와 함께 좁은 집에서 버텨야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해맑게 웃고 지내는 녀석이었지만 내 마음은 늘 편치 않았다. 마음껏 뛰놀기를 좋아하는 하쿠가 한눈에 구조가 훤히 보이는 집에서 얼마나 갑갑했을지. 새 집은 하쿠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해서, 큰 개를 받아주는 몇 없는 집 중에서 가장 큰 곳으로 골랐다.
서울에 온 지도 벌써 15년이 다 되어 간다. 이사도 여러 번, 지역을 옮긴 것도 두세 번이 되지만 이번에는 괜스레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이사 전날 하쿠와 추억이 있는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하쿠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산책을 길게 해서 행복한 표정이었다.
집에서 하쿠를 내려다본 모습. 보통은 돌아오는 인간을 하쿠가 창에서 맞이해주곤 했지만, 가끔은 이렇게 산책 나가는 하쿠를 불러보기도 했다. 하쿠는 내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했다. 하쿠가 나를 보는 모습은 여기에서.
집 앞의 골목. 하쿠와 산책 연습도 많이 했고, 가장 자주 걸어다닌 길이다. 담 너머로 드리운 꽃나무가 지난 주까지만 해도 몽우리가 져 있어 떠나기 전에 꽃이 피려나, 생각했는데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예쁘게 피어 사진도 남기게 되었다.
하쿠가 가장 좋아하던 골목 끝 카페. 사장님의 강아지와 너무 친해져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다만 하쿠의 관심은 강아지보다는 사장님에게 안기기여서 늘 민망한 건 주인의 몫. 어린 시절부터 하쿠를 봐서 강아지는 대형견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맹한 강아지로 자라났다고 한다.
동네의 도예 공방. 산책하는 하쿠를 보고 달려나오셔서 SNS 계정이 있는지 먼저 선뜻 물어 주시고 하쿠를 너무 예뻐해 주셨다. 단골 카페와 같이 하쿠의 최애 장소가 되어 문이 닫겨 있을 때에도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몇 번씩 맴돌던 하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산책 장소 마을마당. 처음에는 여기까지 걸어서 나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새 산책이 익숙해진 하쿠는 줄을 끌지 않고도 마을마당까지는 제법 거뜬해졌다. 그다지 깨끗하지 않아 나중에는 자주 찾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양이가 반겨주는(?) 아담한 쉼터.
조금 걸으면 나오는 어린이 공원. 뒤쪽 수풀 탐색을 즐겨 했다. 강아지들이 많이 지나다녀 인사를 하겠다고 얼마나 투정을 부렸는지 모른다. 흰 진돗개도 만나서 냄새를 맡고, 어린 아이들이 놀다 말고 브로콜리가 나타났다며 소리치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동네 근린공원. 근처 어린이들이 너무 많아 나중에는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풀숲이 많아 하쿠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었다. 벤치에 앉아 좋은 날씨에 음료나 도시락을 먹으면 하쿠는 지루해했지만 나에게는 즐거운 휴식이었다.
조금 나중에 발견한 또다른 어린이 공원. 인적이 드문 때가 많아 횡단보도 건너는 연습 겸 하쿠와 자주 나와서 시간을 보냈다. 계단을 뛰어올라 자연스럽게 입구에서 제 흔적을 남긴 뒤 위풍당당하게 공원을 거닐던 모습이 참 귀여웠다.
강아지가 너무너무 많아서 강아지 공원이라 불렀던 드넓은 공원. 가끔 같이 달리기도 하고 산책도 길게 할 수 있어서 하쿠가 정말 좋아했던 곳이다. 30분 정도 걸어야 해서 예전에는 가기까지 큰 마음을 먹어야 했는데 어느새 한 발짝씩 걷다 보면 도착해서 하쿠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
하쿠는 이 동네를 정말 좋아했다. 집은 넓지 않았지만 이전과 달리 주민들이 개를 무서워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 주고, 가끔 알아봐 주고, 먼저 다가와 손을 내미는 이 곳에서 하쿠는 행복한 미소를 띠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평소라면 사진도 많이 올리지 않고 건조하게 마무리했을 테지만 하쿠가 철이 들 무렵 지내면서 정이 많이 들어 남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록 하쿠는 빨리 제 발로 걷고 싶어서 눈은 게슴츠레하게 뜨고 표정도 굳었지만 하쿠와 발자국을 남겼던 이 곳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하쿠야, 작은 집에서 고생 많았어. 새 집에서도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