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좀 전과 다른 가라앉은 톤으로 심각하게 물어보는 전 남자 친구를 그제야 흘끗 바라본다. 남자는 짐짓 심각했다. 실망이 들어찬 눈을 보니 나를 진정 베필로 생각했었나…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응. 뛰어. 많이…
그리고… 그게 그렇게 좋지는 않아. 울렁증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 이런…”
그는 딱히 할 말이 없는 듯 한숨을 조그맣게 내쉬었다.
“완전히 빠졌다니까. 어쩔라고 저러나 몰라.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데 말야…
아, 참고로 그 남자 친구는 나의 괴짜 이종사촌동생이야.”
“아! 어렸을 때 미국 이민 간 그 사촌? 무슨 8살 꼬마가 대입 수학 푼다고 난리 났던 걔?”
“어, 걔!
그 수학 잘하는 그놈.
얼마나 재미없고 답답하겠어. 그런 놈에게 빠졌으니…”
그들만의 세상에선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자, 그럼 심정이 현재 좋지 않은 사람들끼리 한 잔 하지?”
세상에 술잔을 비울 이유는 항상 널려 있다.
하지만 이 테이블은 위험했다. 눈치 볼 상사 없이 대리 셋에 사원 셋으로 구성된 젊은 피 테이블에는 소주가 가속도를 붙여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진짜, 김 과장! 김 과장 때문에 저번 주에 야근한 거 아시죠? 법인카드를 그따위로 긁고 다니면서 영수증은 왜 제때 안 가져다주는 건지. 그리고 경리라고 막 무시하고 말야…”
시작되었다. 저 여인의 3기 주사… 그녀만이 짊어지는 경리로써의 외로운 애환을 털어놓는 시기가 되겠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가 않는다. 잊으려 해도 핸드폰이 자켓 주머니에서 얌전히 대기 중인 것도 잊히지 않는다. 진동으로 하여 속주머니에 두었으니 전화가 오면 적당한 떨림이 올터이지만 충전이 최고치로 된 핸드폰은 계속 침묵 중이다. 하루 종일 알고리즘 짜던 것보다 더 골치가 아파온다.
“부장님, 저 오늘은 이만 들어갈게요. 몸이 별로…”
“아이고… 저런… 그래도 저녁은 든든히 먹었재? 얼른 들어가 그럼. 잠깐 이리 와 봐, 추운데 택시 타야지.”
어차피 회사 경비로 처리할 거지만 생색을 낼 수 있는 자리, 부장이다.
“아우 김 대리, 이 맛 간 여자 나한테 맡기고 또 가는 거야?”
나는 성만 같을 뿐 저 여인이랑 친구가 아닌데 회식자리에서 저 여인을 감당해 주기를 바라는 인간이 많다는 것도 짜증이다.
“저보다 한 대리님이 더 돈독한 사이잖아요. 둘이 사상도 맞고… 그럼 수고!”
돼지 집을 나와 겨울비가 조금 떨어지기 시작한 종로 한복판에 섰다. 연말의 종로는 그 어느 곳 보다 복잡하다. 택시를 잡는 게 버스보다 어려워 보여 망설이는 중인데 누군가 옆에 붙어서는 게 느껴졌다.
“일반은 잘 안 잡혀, 이 시간에… 내가 모범 불렀으니까 같이 타고 가자.”
애매한 전 남자 친구 오빠다.
“… 왜? 오빠는 강남 넘어가야 하고 나는 신촌인데… 어떻게 같이 타고 가?”
“어차피 따로 시간 내서 만나자 하면 안 만날 거니까, 신촌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라도 얘기를 좀 하게… 끝을 내더라도 얼굴 보고 말하면서 끝내야지… 우리 제대로 끝낸 적 없잖아. 하지만 시작한 사이는 맞잖아… 그러면 끝도 같이 내야지. 난 오늘까지도 끝이라고 생각 안 했거든.”
“아니, 그렇게 오래 연락이 끊겼는데 어째서 끝이라 생각을 안 한…”
사실은 그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런 성격은 아니다. 화장실을 갔으면 뒤처리도 다 잘하고 나오는 스타일이니까… 그가 부른 까만 몸에 노란 모자를 쓴 모범이 점잖게 앞에 섰다.
“아이고, 추운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우선 신촌 연대 앞으로 좀 가주시지요.”
“난 거기서 내리고 오빠는 강남 가야지. 그거 미리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냐?”
“일단은 신촌부터 가자.”
남자는 거슬리게 진지하다.
“… 왜?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니까 택시 안에서 간단하게 브리핑해도 돼.”
“나한테 쌓인 게 많구나? 한 번을 달콤하게 말하질 않네…”
“뭐 쌓일게 많을 만큼 만난 사이도 아니라서…”
그랬나…
하긴 오늘 내내 그 누구에게도 친절하지 않았다. 이유야 정작 딴 데 있지만 내 곤두선 신경을 고스란히 받은 자들은 또한 나를 예민하게 만든 그 자는 아니었다. 결국 그 자는 내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서 또한 나를 잔뜩 메마르게 만들고 있다. 제기랄… 그러니 사랑이 핑크라는 소리들은 다 개소리다. 사랑은 시작하자마자 고통스럽고 불편하고 또한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그래… 알아. 그 쌓일게 많을 만큼 만나지 않아 이렇게 되었다는 거…”
가만…
이 남자도 나도 어쩌면 착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분명 제대로 맺음 하는 날이련만 그럼에도 시작보다 끝을 더욱 간결하고 명확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님… 여기에서 좌회전해서…”
“아냐, 지금 이 시간에 신촌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얼마나 힘든데… 그냥 정문 앞 대로변에 세워 주세요. … 오빠는 계속 타고 갈 거지?”
“네 그게 좋겠네요. 저기 앞 횡단보도 좀 전에 세워주세요.”
바쁜 그도 오늘은 시간을 좀 들여 마무리를 하기로 했는 모양 따라 내린다. 그래, 오늘은 제대로 마침표를 찍어야겠다. 말줄임표도 문장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꼭 마침표가 필요한 듯하니까…
“흠.. 혼자 사는 집에 초대를 할 수도 없고, 술은 안 하고 싶은데… 커피라도 할까?”
“그래, 그러면 그때… 집에 데려다줄 때 앞에 있던 그 커피숍으로 가자.”
이게 이 남자와의 다섯 번째… 혹은 여섯 번째 만남이다. 기억이 흔들리는 것은 그만큼 깊지 않은 마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네?”
대학가의 커피숍에 들어가서는 대추차를 찾는 남자 때문에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당황했다.
“그런 특수차가 여기 있어? 저기 양수리 이런 데 가야지… 유자차는 있죠?”
“네!! 유자차는 됩니다. 유자차 두 잔 내어 오겠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다시 처음의 환한 미소를 찾았다.
“밤에는 아무래도 커피가 부담되니까. 하하.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때, 처음 우연히 강남역에서 샌드위치를 먹다 만났을 때도, 이 남자는 정직한 흰 우유에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어찌 보면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를 많이 배우는데 그중 하나가 ‘빵에는 우유’다. 그런데 우리는, 어른은 우유를 먹으면 안 되는 것 마냥 샌드위치에도 커피, 국밥을 먹어도 후식은 커피, 보드라운 케익을 먹을 때도 영양가는 없는 커피를 곁들여야 더욱 두뇌를 빠르게 회전시켜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뭐 대부분은 그렇다고…
이 남자는 배운 대로 안전한 길로만 걷고자 하는 양지의 신사다. 아마 빵에는 우유가 정석인 것처럼 적당하게 좋은 와이프, 참한 엄마가 될 여자의 조건을 정해두고 거기에 맞는 여자만 골라보다가 나 정도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꼭 빵에 우유처럼…
“그러니까 … 그래. 일단 사과할게. 말만 우리는 사귀는 사이래 놓고 오빠가 너무 무심했지. 그러니 네가 화가 나서 끝났다고 말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그런데 윤조야.. 나는 만남의 횟수가 중요하다고는…”
“오빠 미안해.
우선 오빠랑 비슷한 마음으로 만나봐서 미안해. 오빠와 비슷한 마음으로 만난 거라 두세 번 만났을 때 아니다 싶었는데도 말 못 했어. 사실 아까워서… “
“응? 나랑 비슷한 마음?”
“빵에 콜라도 먹을 수 있고, 빵에 커피도 먹을 수 있는데 빵에는 우유가 제일 어울린다는 정석을 깨지 않는 것처럼 정해 놓은 우유 같은 여자를 고르려고 했잖아. 아마 내가 콜라처럼 쏘거나 커피처럼 자극적이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거잖아. 나도 빵에 우유가 정석이라는 것은 알아. 그래서 나도 오빠를 밀어내지 않았나 봐. 사귀는 사이라기엔 진짜 애매한데도 어쩌다 오빠한테 연락이 올 때마다 시간을 만들었던 이유도 그냥… 오빠가 구하기 힘든 우유라서… 내게도 오빠가 튀는 콜라거나 독한 커피가 아니라서… 몸에 좋고 귀한 우유라서. 그래서 만났어.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알아? 난 우유를 싫어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우유 없어서 금단증상 올 만큼 좋아한 적도 없다는 거야. 그래서 오빠가 연락을 하지 않아도 아쉽거나 궁금하지 않았어. 오빠도 마찬가지일 거야. 아침에 배달받아 냉장고에 잘 넣어둔 우유가 저녁까지 상하지 않을까 걱정할 일 없듯이 그렇게 냉장고 속 우유처럼 나를 보관했잖아. 몸에 좋으니 매일 아침 배달받는 그 우유. 냉장고에 잘 두었으니 상할 염려 없는 그 우유.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또 배달 올 테니 귀할 것까진 없는 그 우유잖아.
내게도 오빠는 안전한 우유였나 봐. 아무리 바쁘대도 일주일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하는 희한한 남자 친구가 불안한 적 없었고, 만나면 결혼 얘기부터 하는 게 싫지 않았고, 그래, 그게 희한했어. 부담스러우면서도 나쁘지 않았거든. 나를 그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그런데 아냐. 내가 너무 소중해서 결혼 얘기를 한 거 아니잖아. 내가 참 적당한 우유라 그랬던 거잖아. 아침에 넣어둔 냉장고 속 우유가 당장 생각나서 안달 난 적 없듯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놓치기엔 아까웠어. 그 냉장고에 숨겨둔 내 우유 누가 먹으면 화나듯… 왜냐면 오빠도 알겠지만 오빠는 참 좋은 사람이잖아. 모든 면에서… 그런데… 그건 마치 아까워서 모셔두기만 할 뿐 쓰지도 못하는 에르메스 백 같은 거였어. 어차피 내 손에 들고 다니지도 못하는데 가졌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야만 할 것 같은… 그런데 그 모셔야만 하는 비싼 가방을 사느라 매일 쓸 수 도 있는 편한 가방을 못 사는 족쇄가 채이는 것도 모르고… 나의 오빠를 향한 감정은 허영심이었나 봐. 적당히 좋은 대학 나와 적당히 좋은 직업을 가지고 살다가 나보다 많이 나은 남자의 간택을 받으면 사는 아파트 평수가 달라지는 현대판 신데렐라. 그런데… 것도 뭐 그릇이 되어야 하는 건가 봐. 나는 몸에 안 좋고 속 쓰리게 하는 커피 하고만 샌드위치를 먹어. 나중에 속이 쓰려서 몸을 기역자로 꺾고 기대야 할지라도 나는 커피가 좋아. 이미 맛본 커피는 단 한 번으로도 중독이 되더라. 우유는 권해야 마시는데 커피는 혼자 찾아 헤매게 되더라. 그래서 오빠. 난 이미 커피 맛을 봐서 돌아가긴 힘들어.”
오 정훈은 항상 말끔하고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성당 오빠 같은 남자였다. 어두운 구석이라곤 없고 세상이 그저 금색인 남자.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입을 굳게 다문채 잔뜩 가라앉아버린 유자차 바닥의 유자를 하릴없이 다시 띄워보려고 휘젓고 있었다.
“… 그러면… 가끔 만나 밥 먹는 오빠 할까?”
너무 바빠 만나지는 못해도 한 번씩 전화가 오면 수다를 떠느라 밤을 새운 적도 있는 사이다. 그래서 이 남자를 모른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는 참 좋은 사람, 반듯한 사람, 잘 배운 사람, 그리고 배려심 많고… 꽤나 우유부단하다.
“그냥… 그럼 안녕…이라고 하면 돼. 이럴 때는. 내가 방금 오빠 찼잖아. 화내도 돼.”
“… 화가 날 게 뭐가 있어. 맞는 말인걸. 하지만 내가 그렇게 너에게 설렘도 없이 그저 좋은 와이프 감으로만 본 건 아니야.”
“뭐 조금 일렁였겠지. 하지만 일을 제칠만한 일렁임은 아니었잖아. 그게 답이야.”
“난 누구에게도 내 일을 접을 만큼 일렁이지 않는데…
그럼 어떡하니?”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그런 남자를 찾아. 야밤에 차가 서면 거기가 어디든 달려오는… 혹은 갑자기 나를 데리고 제주도를 가는… 오빠는 그런 즉흥적인 게 안 되는 사람이잖아.
안전한 사람이니까… 나… 일어날게.”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