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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 남자를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을 직감했으면서도 그렇게 비 내리는 신촌 거리를 몇 바퀴 무작정 걸었다. 거리에는 나만큼이나 비에 신경이 무딘 몇 잔 걸친 청춘들이 넘쳐났기에 그들을 피하느라 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그 남자는 내가 다른 남자를 ‘오빠’라 불러서 화가 났다. 이 골목이나 저 골목이나 이름만 다른 비슷비슷한 삼겹살집, 호프집, 민속주점들이 빼곡한 골목 몇 개를 지나자 점점 마음이 가라앉았다. 첫 골목을 걸을 때는 그랬다. ‘이 일관성도 없는 인간… 강일이 오빠를 오빠라 부를 땐 아무 말도 없더니… 그 흔해 빠진 ‘오빠’라는 대명사가 그리도 거슬릴 일인가…’ 하지만… 두 번째 골목의 두 번째 비슷한 민속주점 앞을 지날 때 깨달았다. 그는 내가 오늘 부른 ‘오빠’는 대명사가 아니었어야 하기에 화가 났다는 사실을… 그 문맥에서 ‘오빠’는 고유명사였어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가 이해가 가기도 했고,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이 남자는 아마 본인도 모를 만큼 내게 빠져 있었다. 그래서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거라면 좋은 일이다…라고 애써 비 오는 겨울밤에 그를 찾아 헤매는 것을 체념하고 늘 그렇듯 익숙한 내 냄새들로만 가득한 내 오피스텔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나… 아니면 나흘일까…
열 번은 참았다가 남자한테 전화를 해 보았고, 남자는 전화기는 켜 두었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다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를 고민하다… 오히려 수화기 너머로 반응이 있을까 봐 불안해하다 음성 메세지 안내로 넘어가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식이다. 내가 전화를 했다가 두 시간쯤 지나서 남자가 부재중 전화를 보고 다시 답 전화를 걸어온 적이 몇 번… 하지만 그때마다 회의에 들어갔거나, 서버실에 갇힌 상태거나 하여 이래저래 그와 연락을 못 한지 사나흘이 흘렀나 보다. 그도 나도… 어쩌면 같은 마음인지 서로 간에 일방적인 메세지는 남기지 않았다. 그 마음은 복잡했다. 그리우면서도 만나기가 두렵고, 궁금하면서도 막상 건 전화가 불발되기를 바라고 부재중 전화 알림은 아직도 그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큰 의미로 안도감을 주면서도 그가 껄끄럽게 음성 메세지 따위는 남기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더해질수록 어색하고 피하고픈 마음은 점점 불안하게 깊어졌다.
“김 대리 미안해서 어쩌지? 연애할 시간도 없겠어. 하도 매일 야근이라…”
“뭐, 야근 안 하면 이 들뜬 연말에 제가 뭐 할 일이라도 있겠어요? 붙어 다니는 바퀴벌레들 보면 박탈감에 소외감만 더 해서 우울하다 못해 목매달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이것이 나의 상태다.
요 며칠, 갑자기 별 말도 아닌 데 발끈해서 쓸데없이 말이 마구 많아지기도 하고 또는 하루 종일 내키면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 그런 변덕을 부려대고 있는 것이다.
“… 왜 저래? 만담이야 뭐야? 요즘 저 여인네가 제일 무서워… 눈에서 고드름 쏘겠어.”
어차피 진심은 전혀 담기지 않았어도 예의상 말 한 번 건넸다가 해파리 독 같은 말에 쏘인 안 부장이 뒤에서 누군가에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완전히 정신이 딴 데 팔렸잖아요. 얼마에 팔았는가는 아무도 모르지만 하하. 얼마나 속세에 관심을 끊었으면 한 사무실에 맨날 있던 경미 씨 없어진 것도 모르잖아유. 그나저나 부장님 그냥 속닥대지 마요. 어차피 담배를 어찌나 펴대셨는지 목에 가래 끓어서 더 잘 들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 다채로운 주사의 주인공 경미 씨가 안 보인다.
“아… 진짜네… 경미 씨 … 없네…요? 휴가예요??”
연말에 경리가 휴가를 쓴다는 것은 집에 무슨 큰일이 있거나(주로 나쁜 일) 혹은 잘렸거나…
“아니, 뭐 어차피 경미 씨는 관리 업체에서 파견된 계약직이기도 했고… 뭐 좀 우리 사무실의 뭐랄까, 필라소피와는 여러모로 상충이 있었다고나 할까…”
“우리… 사무실의 필라소피가 있어요??”
이건 또 뭔 현학적인 소린지…
내 아무리 앉으나 서나 밤이나 낮이나 불편하기 짝이 없는 연애사로 고통받는 중이긴 하나 몇 달을 맨날 열 시간 넘게 얼굴 마주대고 있던 80명 중 단 하나의 여성 동지가 없어진 것에는 잠시 고통스러운 연애사를 잊을 정도로 신경이 쓰인다.
“아니… 그게… 흠… 잠깐만. 상무님, 상무님… 뒤에 상…무…”
“내가 뭐 죠스나 네로냐? 왜 이리 호들갑이야. 김 대리 어찌 된 일인지 모르는 거 같은데 잠깐 커피나 한 잔 하면서 설명해주라. 내일 면접 김 대리도 들어간다이가. 여직원은 또 여직원이 잘 보니께. 우리 회사 아니지만서도 마 내일 면접 볼 때는 꼭 들어와야 된다이. 안 부장, 빨리 설명해주라카이. 뭐하노.”
‘죠스’ 나 ‘네로’라니… 대체 몇 년도에 마지막 영화를 본 것인지 매우 궁금해진다.
“아, 네네.”
대충 알 것도 같은데 설마…
빨리 전말을 알고 싶은 마음에 휴게실을 향해서 경보하다가 갑자기 또 다른 깨달음… 인간의 호기심은 때로 슬픔이나 우울함을 이긴다… 슬프고 부끄럽게도.. 주로 남에 대한 호기심.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궁금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벌써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휴게실을 향하는 그 짧은 복도 경보중 추리가 되었지만 그래도 설마… 이런 막판 상황까지 치달은 것으로 보아 그녀는 하지 말았어야 할 ‘직장인으로서 가장 정신 나간’ 주사를 부린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눈에 뵈는 거 없어서 상사한테 시비 걸기… 아비 어미 몰라보는 호래 자식보다 더 위험한 호래 사원 짓을 한 것임에…
“대충 눈치채지 않았어? 경미 씨 잘렸어. 계약직이니까 소속 회사랑 바로 얘기 끝난 거지. 그런데 지금 연말이라 공석은 안되니까 바로 내일 면접 한 다섯 명 볼 예정인데 어차피 우리 사무실 인력이니까 상무님, 나, 한 대리, 김 과장, 그리고 김 대리 이렇게 면접관 해야 돼. 면접관 수당으로 상무님이 내일 점심 거하게 쏜다!”
그래도 그렇게 맨날 보던… 얼굴도 예쁜 경미 씨가 사라졌는데도 이들이 매우 낙담한다던지, 섭섭해하는 기색은 찾기가 힘들다.
“별로 안 섭섭하신가 봐요? 맨날 그놈의 회식 때문에 경미 씨는 일도 없는데 야근하고 그랬는데…”
“아… 물론 서운하지… 그런데 그날 경미 씨는 … 뭐, 그냥…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거야.”
뭐 안 들어도 대충 상상은 가는 바다. 잠자코 커피를 마시는데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누가 조르지도 않았는데 아저씨 둘이 매우 난감하다는 듯 헛예의를 차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어차피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아도 저 인간들은 대답을 이미 준비했기에 말 안 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이다.
“아, 그래 뭐. 김 대리도 우리 식군데 알아야지, 알건. 그날, 김 대리 가고 나서 한 20분인가 있다가부터 난리도 아니었어. 그날 회식에 김 과장이 좀 늦게 떴거든. 근데 경미 씨가 김 과장 온 줄 모르고 김 과장 *새끼, &새끼… 해가면서 욕을 욕을… 목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귀가 완전히 꽉 막혀서는… 근데 김 과장이 인사 관리하는 데다가, 얼마나 또 우리 김 과장이 기억력이 좋게. 그런 푸닥거리를 김 과장이 잊기엔 거의 불가능하지. 그다음 날 김 과장이 바로 경미 씨네 회사랑 얘기했잖어. 그리 된겨. 내일 면접에 김 대리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김 대리가 예산 DB에서 회계 쪽 관련 시트 뽑아 주면 그거 우리 자체 개발한 액셀 프로그램 있잖아. 그걸로 돌릴 수 있는지 기술적인 거 좀 물어봐줘야 해서 그런 거야. 그라고 상무님이 김 대리 안목 믿는다고, 이번엔 좀 주사 없고 야무진 경리 한 번 모셔보자는 취지, 뭐 그런 거지.”
경미 씨가 그만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또 이 핑계로 내일도 이 기름집은 알코올 회담을 할 빌미를 마련한 것이다.
띠링.
제길… 여기도 그 소리군. 그날 이후로 웬간한 상점마다 다 달린 그 차임벨 소리가 짜증스러웠다. 겨울 우기인가… 그날 이후 자주도 겨울비는 추적였다. 배가 불러 터지겠는데도 간식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는 것처럼,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느라 눈이 빠질 것 같으면서도 집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만화방을 찾았다. 사랑처럼 불안하지 않고 사랑처럼 변덕스럽지 않은 우정을 주는 강일이 오빠를 보러…
“뭔데, 네 요즘 억수로 바빠서 잠이 맨날 부족하니 어쩌니 하더니… 밤 9시 반에 뭔 만화방인데… 백수 남자 친구한테 바빠서 채였나?”
“얼굴은 억수로 반가워 죽기 직전이구만 말은 왜 그리 하는데?”
“아… 그라믄 그렇지. 우리 김 대리 기분이 마 지옥이구만. 그라니까 지옥 같은 만화나 읽을라고 왔지… 알았다 알았다. 고만할게. 쥐포나 먹어라.”
어차피 정신 상태도 골골한데 저 조미료 범벅인 쥐포 먹어서 몸도 같이 골골하다고 더 나쁠 것 같지도 않았다.
“가시나야, 우아하게 먹어라. 무슨 쥐포를 반이나 뜯어서 입에 우겨넣노. 내 말 할라 했는데 맞다. 좀 있으면…”
띠링.
그놈의 벨이 또 울렸다.
쥐포 반을 욱여넣어서 안면마비 온 사람처럼 볼따구니가 흉측한데 무심코 들어오는 손님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이 순간에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재난, 재앙, 천재지변이야…’
본능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면전에서 토하는 꼴을 보인다 해도 아무렇지 않을 사이인 강일이 오빠를 필사적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고향 선배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고 의지 할 데 없는 서울에 혈혈단신 혼자 사는 지방녀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다. 강일이 오빠는 일초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손바닥을 쫙 펴서 턱 밑에 가져다 댄다.
“빨리 뱉아라. 가시나야.”
“우와, 언제부터 냅킨 같은 거 챙겼는데? 없던 센스가 생기는 병도 있나?”
“… 내 손 아이다…”
급히 베트남산 왕 쥐포 반을 뱉어내자마자 센스 있게 냅킨이 옆에서 펄럭였다.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