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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은 집중하는 예의

(7)

by Hazelle

급히 베트남산 왕 쥐포 반을 뱉어내자마자 센스 있게 냅킨이 옆에서 펄럭였다. 그 남자였다…


대체 이 민망한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남자가 옆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걸터앉는다.


“가시나야, 그리 좋아하는 ‘여왕님 여왕님’도 사줬는데 왜 또 만화방을 기웃거리는데.”


키에 비해 유독 긴 다리를 가진 남자는 낮은 만화방 소파에 묻듯이 앉자 무릎이 이 만큼이나 솟았다.


“이 성의 없는 만화 또 보나.”


“… 봤던 거 또 보는 거 아이다. 신간이다…”


“내 잠깐만… 뒷간 좀 다녀올게. 오늘 한남대교 너무 막혀서 차 안에서 오줌 쌀 뻔했다이가.”


남자도 어색한 게 뻔했다. 일부러 어떻게든 덜 어색해보려고 더 열심히 사투리를 쓰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피식 웃음이 났다.


“오빠야 니가 불렀나?”


흠칫.

또 ‘오빠’라는 남자가 민감한 호칭을 썼다. 저도 모르게 혹시 남자가 듣지는 않았나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그는 이미 화장실로 사라졌다.


“뭐 죄 지었나. 왜 이라는데. 눈치를 보노… 참… 낯설다. 요즘. 김 윤조. 니 뭐 빙의라도 됐나? 이틀 전에 니네 본사 회식하고 여의도에서 내한테 전화한 거 기억 안 나나. 울고 불고… 아무 사이도 아닌 인간한테 오빠라고 불러서 장 슨생이 뚜껑이 열리서 그냥 갔다나 뭐래나… 그라고 나서 연락도 없다고 울고불고 전화 안 했나. 가스나야. 시끄러워서 그날 고막 나가면 내 니 고소할라 했어. 그라고 오늘은 만화방 가자 해 쌌길래 내가 불렀다 마. 근데 저 슨상님 전화 억수로 안 받더라이. 그래도 내가 니를 너무 아끼는 심정에 아주 그냥 불굴의 의지로 계속 했다이가. 공강 시간마다 아주 근면 성실하게. 결국은 받긴 받더만은 왜 그리 다 죽어가는 도둑놈 목소리로 받으실꼬? 오데 엄청 조용한데 같던데… 어디 상갓집 뭐 이런덴가… 하여간 참 소곤대시더만… 귀 간지럽게…”


강일이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가까이 왔음을 알았다. 웬 오지랖이냐고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마웠다. 오늘 만화방 계단을 오를 때 했던 생각은 이러다가 그냥 내가 오 정훈에게 했듯 흐지부지 끝이 나는 시시한 연애 중 하나로 남겠다… 였으니까.


“오늘은 우리 지방 출신 신촌 루저님들이 무엇을 읽으시나?”


“에헤이… 행님, 섭섭하구로. 이래 봬도 둘 다 멀쩡한 사회적 타이틀은 있다 아입니까. 학생, 직장인.”


“하긴… 여기서 백수는 현재 나 하나니까. 하하.”


남자는 강일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밝게 웃고 있었다. 그 망할 ‘오빠’ 사건은 굳이 누군가가 사과를 해야 하고, 용서를 해야 하고 그런 류의 해프닝은 아니었기 때문에 더 애매했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은근슬쩍 동조를 할 수밖에.


“여기.. 후배님 어디… 아 저기 있네, 우리 쥐포 한 여섯 마리 넉넉하게 잘 구워주고, 여기 맥주는 안 되죠? 오, 됩니까? 마, 쥑이는 만화방이네! 세 캔만 일단 갖다 주소.

맥주는 시원한 것이 생명이니께.”


맞다… 나흘 만에 만난 남자 친구를 처음 맞는 순간 나는 쥐포 반 마리를 뱉어내는 중이었었지… 남자는 잊지 않고 충호에게 새 쥐포를 다시 주문했다.


“그런데 행님, 오데 매우 진중한 장소에 계셨습니꺼? 엄청 조심스레 전화를 받으시던데…”


충호가 쥐포를 올려놓은 채 만화를 한 권은 읽은 모양 반은 탄 숯 쥐포를 뜯으며 궁금한 건 못 참는 강일이 오빠가 운을 뗐다.


“오빠, 그 탄 거 먹지 말라니까. 암 걸린다고!”


전을 먹어도 가장자리 탄 데를 일부러 떼먹고, 쥐포도 유독 탄 쥐포를 좋아하는 고향 오빠를 걱정하는 마음이 여과 없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 여인은 남자 친구가 연락도 잘 안 되고, 전화도 수상하게 받았다는데도 지금 고향 오빠야 암 걱정이 먼저네? 또, 또 오빠라 해쌌지!”


아, 맞다. 나흘간 마음고생을 했던 이유가… 그놈의 ‘오빠’… 였지.


“아… 입에 붙어서. 그렇다고 갑자기 선배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어색한데…”


“에이, 행님.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오빠를 오빠라 부르지 말라니요. 동방 예의지국에서 그 무슨… 행패십니꺼…”


“내 여자 친구니까.

그리고 나는 그녀가 부르는 ‘오빠’라는 말이 너무 좋으니까. 그러니까 난 그 호칭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야. 어쨌건, 이제부터 오빠라는 호칭은 장 대만이라는 이름만큼 고유명사야. 오케이?”


이 남자는 진정으로 그 ‘오빠’라는 호칭에 집착하고 있었다.

순종적인 연애를 지향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맞춰줄 수는 없더라도 싫어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하는 것이 연애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오빠’라는 살가운 호칭은 이 남자만을 지칭할 것이다.


“아… 그리고 ‘우리’라는 대명사도 반드시 장 대만과 김 윤조에만 해당돼.”


별 것 아닐 수도, 또 별 것일 수도… 특히 강일이 오빠와의 사이는 좀 그렇다. 대부분 내용을 생략한 매우 함축된 ‘오빠!’ 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굳이 길게 주저리주저리 하지 않아도 그냥 ‘오빠!’라고 한 번 부르기만 하면 ‘뭐, 가방 들라고?’ 라던지, ‘뭐, 라면 먹자고?’ 등 내가 부른 이유 자체를 잘도 알아듣기 때문이었다.


“흠.. 그러면 뭐, 아메리칸 식으로 이름 부르지 뭐. 강일! 이렇게…”


“미친나… 엄연히 위계질서가 있고, 내가 니 보다 생일밥을 더 챙겨 받은 연장잔데… 안된다! 불허하노라! 정 아메리카노 식으로 이름을 처 부를라면 아예 영어로만 내한테 앞으로 대거리하도록 하여라. 험.”


유치한 것 같은 해결책인데 사투리를 쓰는 두 선후배는 나름 신촌 파고다와 ELS를 대표… 하는 건 절대 아니고 그저 영어학원을 매우 오래 충실하게 다닌 문법 영어 강자들로써 쓸데없는 자신감을 보였다.


“영어로 대화하기로 하고 나서 둘이 무슨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애들 같네? 만화 보는데 서로 말을 한마디도 안 하잖아. 그 ‘오빠’라는 소리 끊기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닌 거지?”


내 남자 친구는 오늘은 내 추천으로 ‘비천무'를 골라 들었다. 한몇 권 보고 나니 현실세계의 여자들이 하나 같이 너무 못 나 보이는 부작용이 있다고 투덜대면서…


“아냐, 그럴 리가…

강일?! 쿠쥬 패스 미 더 코카?”


“왓? 코카? 아이 돈 노우 왓 이즈 코카. 아, 메이비 유 민 코크?”


“유 원 미 투 스피크 프렌치 레더 댄 잉글리쉬?” (영어 멀고 불어로 얘기해 줘? - *유럽에서는 coke를 코카라고 말한다)


“호.. 아이 돈 띵크 유 캔 스피크 인 프렌치 몰 댄 10 세컨즈. 유어 프렌치 레벨 이즈 저스트 하이스쿨 레벨!”(내 생각엔 네가 불어를 10초 이상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네 불어 수준은 딱 고딩 수준이잖아)


“아 진짜, 둘이 또 왜 이라는데. 내일 학교 안 가나? 회사 안 가나? 얼른 들어가서 발 닦고 자라! 아침에 늦잠 자서 돈 내고 다니는 학원도 수시로 빠지는 것들이 야밤에 만화방에서 뭔 짓이고”


구박을 하면서도 서비스 한치를 구워 온 충호가 한심한 두 선배의 작태에 혀를 찼지만 대체 왜 우리가 이러고 있는지는 차마 다 설명할 수 없다. 후배가 나를 쩔쩔매는 여자로 볼까 봐 두렵다기보다는 … 그냥 … 귀찮기 때문이다.


“김 대리! 기브 미 넥스트 북, 노노 낫 떨틴, 폴틴!”


“잠깐만. 니는 왜 내 김 대리라고 부르는데?”


“야 씨, 니 지금 오빠야 한테 니라고 했나?”


“영어로 할 거면 대리 직함도 영어로 붙이거나, 아님 이름을 불러야 원칙이지.”


이 갑자기 시작된 영어 회화 연습에 룰이란 것도 있었나. 모른 체 비천무를 열심히 넘기던 남자 친구가 그 와중에 깨알 같은 잔규칙을 정한다.


하긴 저 고향 오빠도 난감할걸. 대체 나를 이름으로 제대로 불러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나를 ‘젓가락’이라고 불렀고, 대학 오고 나서 붙어 다닐 땐 항상 3초 거리에 있으니까 ‘야’, ‘가시나야’ 혹은 ‘여시’라고 마구 불러대다가 내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아주 안정적으로 내 직함을 붙여 ‘김 사원’, ‘미스김,’ ‘김 대리’ 따위로 불러대고 있으니까…


“흠흠… 행님, 룰이 은근히 복잡시럽네예? 호칭은 고유명사 아닙니까?”


“아니지. 김 대리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아. 예쁜 이름 있는데 왜 안 부르는 거야.”


“아.. 진짜 어색한데… 윤조! 유 알 낫 타이어드?… 아 잠깐만. 나는 근데 굳이 영어 안 해도 되는 거잖아?”


이게 다 오빠라는 지뢰 호칭 피하려고 시작한 건데 사실 시작할 때부터 저 인간은 영어로 대거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윤조, 말해봐. 이 세상에 또 네가 ‘오빠’라고 부르는 남자들이 있는지…”


희한한걸 골똘히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오빠들’은 대중없었다. 그 기준은 그저 나보다 나이가 많다… 였는데… 어쩌면 이 남자가 남은 인생의 오빠들을 다 없애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진지하게 듣다 보니 혈연이 아닌데 불러대는 ‘오빠’는 사랑까진 아니라도 가벼운 애정을 남발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세뇌가 되었달까.


“가자, 데려다줄게.”


벌써 자정이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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