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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은 집중하는 예의

(5)

by Hazelle

내가 사는 오피스텔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 2층의 커피숍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간단한 인테리어에 크리스마스트리는 11월부터 3월이 넘도록 구석에 놓여 있고, 평범한 맛의 커피와 주전부리를 파는데 어쩌다 보니 누군가가 집까지 데려다주는 날이면 집에 들이기는 뭐 하니 내 사랑방처럼 이곳에서 감사의 커피를 나누곤 했었다. 건물만큼이나 오래된 커피숍 문에는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잘 알기 위해 흔한 풍경 종을 달아놓았는데 들어설 때의 소리와 나갈 때의 소리가 같지만 희한하게 나갈 때 울리는 저 ‘띠링' 소리는 거슬린다. 특히 누군가에게 이별을 고하고 나설 때의 저 소리는 무심하고 찌릿하게 ‘잘 가’라고 하는 것 같아 잠깐 신경이 곤두섰다.


일단은 먼저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할 말을 다 쏟아내니 이제 진짜 끝인가 싶고 상처까지는 모르겠으나 거절을 당한 사람의 기분을 존중하는 마지막 방법은 실망한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는 배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누가 떠민 것도 아닌데 급히 나오다 아까부터 내리고 있던 겨울비를 잊었다. 건물 밖으로 발을 딛는 순간 오래된 간판 모서리에 고였던 제법 크게 모인 빗방울이 이마에 부딪혀 흐른다. 다급히 닦아내는데 검은 물이 손에 배는 걸 보니 마스카라가 같이 녹았나 보다. 가방 앞지퍼에 늘 두는 티슈를 꺼내 닦으려는데 그 신경 쓰이는 차임벨 소리가 연달아 나는가 싶더니 결국 미련 많은 오 정훈은 다급하게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만… 난 아직 할 말이…”


팔이 붙들려서 돌아보는데 말을 하다가 멈춘 남자가 내가 아닌 나를 넘어 어딘가를 보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가니까…


“회식자리에선 먼저 갔다는데 집에는 안 오고…

얼마나 더 기다려볼까 하는데 거기서 나오네.”


고작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하루 종일 대체 어디 있는 걸까 궁금했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게 내내 전화를 기다렸으면서 막상 그 남자가 코 앞에 있는데 걸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잠깐의 망설임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비는 오는데 우산도 없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 반쯤 걸쳐 서서 한 팔은 잡힌 채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 순간은 멈춘 듯 아득했다. 결국 건너편의 남자가 움직인다. 남자가 길을 다 건너자 그제사 어정쩡하게 붙들고 있던 팔을 어색하게 놓는 또 다른 남자… 그 복잡한 와중에 엉뚱하게도, 일 년간 만난 횟수가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만난 횟수보다도 적은 남자가 훨씬 편하다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지금 내가 하루 종일 기다렸던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는데 왜 자꾸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것은 아마 가끔 우울하고 어두운 얼굴은 보였어도 화가 난 얼굴을 보인 적 없는 남자가 처음으로 매서운 눈을 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남자 친구?”


그 짧고 별 것 아닌 한 단어는 두 남자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어? 어…”


같은 시장통에 단골집을 둘 두면 어떻게 되냐면 그 두 집중 어느 곳에서도 단골 취급을 받지 못한다. 가만… 그런데 나는 지금 그런 양다리가 아니다. 연락도 안 하고 지내던 전 남자 친구를 우연히 만난 날이 하필 내 남자 친구가 하루 종일 잠수를 타다 뒤늦게 깜짝 출연을 한 날과 같을 뿐…


“굉장히 불편한 순간이지만… 또 그렇다고 여기서 각자 해산. 이럴 순 없는 상황이니까… 일단 비는 안 맞는 데로 가지?”


결벽증 혹은 정리벽을 가진 사람들은 그 기질이 꼭 주변 정리에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저 깔끔한 성격에 이 지저분하고 찝찝한 상황이 마음에 들리 없다. 장 선생이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나란히 서 있는 오 정훈과 나를 훑어보더니 앞장을 서서 다시 방금 나온 2층 커피숍으로 들어간다.


띠링.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지나면, 젊은 피가 끓는 신촌은 술집의 시간이다. 밤에 커피숍을 오는 사람들이란 대부분 귀가 전에 조금이라도 술을 깨려고 들리거나 혹은 술을 못하는데도 굳이 신촌을 찾은 사람들이다.


“어서 오세… 어…”


피곤한 기색으로 앵무새 같은 인사를 읊던 아르바이트생이 그나마 인사도 멈춘 채 방금 나갔던 두 남녀가 새로운 남자와 함께 들어서는 것을 보고 눈이 커진다. 그의 눈동자에는 꽤 볼만한 새 연속극을 발견했을 때의 작은 흥분이 서려 있다. 가사를 귀담아듣지 않아도 절절한 서러움이 묻어나는 발라드는 시끄럽지 않아서 이 상황에 더욱 거슬린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두 번째, 또 누군가에게는 첫 번째 유자차 세 잔이 테이블에 올랐다. 유자차가 준비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 누구도 유자차가 도착하기 전에는 입을 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유자차는 삶을 요량 아니라면 그렇게 끓는 물을 붓는 게 아니죠.”


입을 연 것은 장 선생이었다. 유자차의 온도까지 따지는 걸 보니 이 남자는 지금 심기가 불편하다.


“아… 다시 내어 올까요?”


“아닙니다. 두면 식을 텐데요 뭐.”


평생 누군가에게 모난 소리 못했을 것 같은 오 정훈이 오히려 당황한 아르바이트생을 안심시켰다.


“그래요. 두세요. 어차피 마실 것 같지 않으니…”


우리의 목적은 유자차가 아니므로 그만 우리 자리에 대한 관심을 접고 볼 일을 보라는 강력한 메세지가 잘 전달되었다. 우물쭈물하던 아르바이트생은 새로 등장한 남자가 깃발을 쥔 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유독 하얀 얼굴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운 아르바이트생이 카운터 뒤 주방 쪽으로 사라지자 그 무겁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적막이 다시 드리워졌다.


“이제 설명 좀 해보지? 나는 알아야 할 게 있는 것 같은데…”


억울하다.

사실 오늘 하루 종일 화가 났던 사람은 나였다. 그렇게 내내 붙어 있을 것처럼 굴던 주말 이후 컴퓨터 리셋되어서 꼭 실컷 쓰던 보고서가 사라진 것 마냥 세상 답답하게 만들었던 인간이 예고도 없이 야밤에 불쑥 집 앞에 나타나서는 허락도 없이 나의 전 연애의 마지막 장을 같이 넘겨다 보고 듣기도 전부터 화가 잔뜩 나 있는 것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그럼에도 눈치가 보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무엇을 그리 잘못했을까.


“처음 뵙겠습니다.

오 정훈이라고 합니다. 한 대리 중학교 동창입니다.

한 대리 이종사촌 동생이지요? 어려서부터 명성은 자주 들었…”


“친하게 지낼 사이 아니니까 서로 통성명이나 그런 건 생략하시죠. 간단하게 저는 이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이해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의 전 남자 친구는 예의 바르고 침착하다.

그리고 나의 남자 친구는 누가 봐도 지금 예민하게 날이 서 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아르바이트생은 그다지 취하지도 않고 멀쩡하게 말쑥한 차림의 세 남녀가 혹여라도 치정 문제로 몸부림이라도 할까 불안한지 자꾸만 우리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


“이 오빠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야. 오늘 같은 프로젝트 때문에 우연히 마주친 거고…”


“아니, 나는 오늘까지 끝나지 않았던 사이라니까.”


빵에 우유, 주옥같은 설명으로 잘 마무리했는데 이 인간이 제대로 재를 뿌리기로 작정을 했다.


“자꾸 왜 이래. 난 이미 예전에 끝났었는데 오빠가 마침표가 필요한 사람이라 오늘 여기서 같이 마침표 찍었던 거잖아.”


치사하고 창피하게 질척거리는 옛 인연을 가뜩이나 어려운 새 남자 친구 앞에서 반복하여 정리해야 하는 것이 짜증스럽기 시작했다.


“넌… 도대체 오빠가 몇 명이니? 너의 그 오빠 소리가 설렜었는데… 오늘은 그 오빠 소리가 질리네. 아직도 둘은 마무리가 안 된 것 같으니까… 마무리는 원래 둘이서 하는 거지, 셋이서 하는 거 아니잖아. 오늘은 내가 실수로 찾아왔나 보다. 먼저 일어날게.”


그렇게 그가 황망히 일어섰다. 이 상황이 정말 역겹다는 듯…


“잠깐만, 오..”


오빠라는 말을 하려다 삼키게 된다.

그놈의 ‘오빠’. 나는 애교스럽지도, 아양을 떠는 편도 아니라서 그 단어가 그렇게나 살가운 단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여대를 나왔으니 ‘선배’라는 이름으로 부를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는 없었다. 사석에서 알게 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와 친해지면 대부분 자연스럽게 흔해빠진 대명사 ‘오빠’의 작위를 내리고 편하게 불렀을 뿐인데 이 남자는 그 흔한 호칭에 진짜 화가 난 걸까…

난 아직 제대로 설명도 못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따라나섰지만 아까보다 거세진 빗줄기가 그를 금세 어디론가 데려가 버린 듯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띠링.

다시 그 거슬리는 차임벨을 울리고 들어선 커피숍에는 어색하고 황당한 표정의 오 정훈과 식어빠진 유자차 그릇을 언제 치워야 하나 고민 중인 아르바이트생이 오늘 밤 이 일대에서 제일 피곤해 보이는 여자가 예상대로 혼자 들어서자 놀래는 기색 없이 다시 맞았다.


“… 그대로 사라진 거야?… 그 양반… 속도 좁고 성질도 급하네. 굉장히 피곤한 스타일이야. 너 고생해. 나한테 오면 냉장고에 잘 모셔두는 우유지만 저 인간한테 가면 너 속 다 문드러져서 치즈 될 판이야. 알지?”


“오빠, 아니… 오 선임님. 우리는 끝났다구요. 어쩌면 제대로 시작한 적도 없다고요. 아니, 알고리즘 설계는 기가 차게 하시는 분이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애정관계의 프로세서는 모르시나요.”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속 시원하게 퍼붓고 싶지만 우리는 지성인이니까. 그리고 언제나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니까… 하룻밤 사이에 두 남자를 적으로 두고 싶진 않다. 최대한 공손하게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다. 일단은 갑작스레 나타나서는 뒤늦게 미련이 철철 넘치는 전 남자 친구를 제대로 마무리해야 잔뜩 화가 난 채 빗속으로 떠나버린 님을 찾아 헤매기라도 할 수 있을 테니…

저 쨍하고 촌스러운 차임벨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일 없을 것이다. 쉽고 편했던 집 앞 사랑방을 잊기로 한다. 또렷한 이별의 이유 없이도 결국은 맺어야 했던 전 남자 친구와의 이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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