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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은 집중하는 예의

(3)

by Hazelle

“내년 7월에 오픈할라면 설계가 2월까지는 나와야 제대로 개발에 들어가지. 가능하겠어?”


“그러면 맨 파워를 조금 더 쓰시면 됩니다. 하핫! 기존 컨설턴트 둘 붙는 거에서 파트타임으로 설계 짤 때 하나 더 붙이시죠?”


“에헤이… 이거 봐라 또. 오 선임 또 이러네? 처음에 가계약할 때랑 슬슬 말이 조금 다르다이. 원래대로 둘 붙는 걸로 하고 봐서 사람 더 필요하면 그거는 오 선임네에서 알아서 해.”


“제가 아직 그 정도 파워는 없어서요, 헤헤”


저 오빠는 연애에서도 그렇더니 매사에 참 넉살이 좋다.


어차피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라 해도 사무실이 아니니 조금은 느슨해진다. 그럼에도 좀 더 노골적으로 하나라도 더 끼워 팔려는 을과 더 이상은 지갑을 열지 않겠다는 갑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여전하지만…


“아 마, 회식은 업무의 연장인 거 모르나? 자자, 다들 핸드폰은 자제들 하드라고!”


안 부장은 유달리 회식 자리에서 핸드폰 쳐다보는 걸 싫어했다. 할 수 없지… 을은 갑의 눈치를 상당히 볼 수밖에…


“김 대리야, 오 선임 말대로 진행하면서 김 대리네에서 맨 파워 하나 더 붙이는 건 어떻노.”


“그건 저희 본사랑 얘기를… 저를 분신술 써서 하나 더 쓰실 생각은 마시고요.”


오늘따라 갑의 치근댐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대체 왜 연락도 없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지쳤기 때문일까…


안 부장과 애매한 전 남자 친구가 여전히 프로젝트 투입 인원수로 옥신각신하는 틈을 타 조용히 테이블을 옮겨본다. 옮긴 테이블에 한 대리가 있지만 갑 부장 옆보다는 나을 듯했다.


“김 대리, 알고 보니 양다리?”


어쩐지 조용하다 했다.


“어머나, 그런 거예요? 김 대리님 남자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응큼하시다아.”


이 여인네는 오늘 이미 반은 달린 형색이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엔지니어는 중성인 줄 아나… 멀쩡한 이십 대 여자가 남자한테 관심이 왜 없겠어요.”


별 말 아닌데도 발끈하게 되는 것을 보니 과연 심기가 불편하긴 한 거 같다.


“그래도… 고민되겠다. 완전 잘 나가는 컨설턴트랑 의사 집안 외아들 의사…”


역시 스펙 사냥꾼답게 경미 씨는 모르는 게 없다.


“저분이랑은 흐지부지 끝난 사이거든요?”


“오… 그런 말 하면 섭섭하지. 난 끝난 적 없는데…”


저 오빠랑 몇 번 안 만났지만 술을 마시는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 고급 컨설턴트래봤자 고급 영업직의 일종이니 하는 수 없긴 하겠지. 술이 세진 않은 모양 혀가 있는 대로 꼬여서 그 와중에 본인 술잔 곱게 챙겨 들고는 옆에 걸터앉는다.


“부장님은 어쩌고 이 테이블로…”


반갑지 않은 내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지만 여전히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짓고 있다.


“나는 우리가 꽤 잘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싸운 적도 없고…”


“싸울 만큼 만나지도 않았고 친하지도 않았잖아요!”


“분기별로 만난 게 사실?”


왜 저 둘은 안 사귀는지 진짜 불가사의하다. 남매같이 붙어 앉아서 둘 다 양손으로 턱을 괴고는 연속극을 보는 양 오 선임과 나를 번갈아가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는 꼴이 여간 밉살스러운 게 아닌데 말이다.


“만난 횟수가 그토록 중요합니까? 마음이 얼마나 자주 닿았느냐! 그게 중요하지.”


“그니까… 몸도 닿은 적 없지만 마음은 더욱 닿은 적 없다고요. 처음에 호감이 간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 우연인지 인연인지를 키워보고자 하는 노력은 안 했잖아요. 특히! 연락도 없는 그런 남자 진짜 진저리 나요.”


마지막 문장은 어쩌면 오 선임만을 겨냥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만나는 그 의원 선생도 연락은 잘 안 하는 거 같더만?”


안 부장이 밉다.

아니, 회식이 너무도 싫다. 애매하게 업무의 연장이면서도 까발리기 싫은 사생활도 꼭 안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연락 안 되는 인간들 조심해라. 분명히 뭔가 있다… 혹시 오래된 여자 친구 있어서 김 대리한테는 자기는 결혼 싫다, 매이는 거 싫다… 이럴 수도 있어.”


나이만 많지 기름집과 술집, 본인 집 이렇게 세 집만 돌면서 이십 년 가까이 지내온 안 부장의 모든 세상사의 가르침은 드라마에서 습득한 것이다.


“나 주말에 아침 드라마 몰아서 보잖아. 삶의 진리는 유치한 듯해도 그 매일 하는 30분짜리 아침 드라마에 다 들어 있다니까.”


“흠.. 내가 뭐 이종사촌지간이라도 그 차가운 놈을 감싸는 건 아닌데, 뭐 그런 케이스는 절대 아닌 걸로. 지금 여자를 만나는 거 자체가 신기한 상황이거든요.”


“뭐여, 사지 멀쩡한 젊은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거 자체가 신기하다니. 별… 내가 순대국밥을 좋아하는 게 신기한 거랑 같은 건가?”


본인이 순대 국밥을 좋아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웃긴다.


“그나저나 맨날 우리 김 대리만 챙기느라 미모가 출중하지만 계속 가벼운 연애 밖에 못하는 경미 씨를 신경 못 썼네.”


대기업 부장 업무 중에 같이 일하는 여직원 베필 걱정도 포함되어 있는지는 몰랐다.


“저는 계약직인데 맨날 붙들어두고, 회식까지 다 끌고 다니시니 제가 이 꽃다운 나이에 누구한테 이 자태를 보여주겠어요. 저 이러다가 혼기 놓치면 부장님이 책임지고 시집보내셔야 해요.”


“거 뭐냐, 요즘 짝 지어주는 결혼 정보 업체도 있던데. 그런데 등록해 봐!”


모르는 척 하기는… 한 대리가 한 달 전쯤, 제일 잘 나가는 결혼정보업체 2위 회사에서 특별 제안받아 공짜로 회원 등록해서 요즘 주말마다 서로의 조건이 딱 맞는 안정적인 선을 보느라 바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 대리님이야 공짜로 프리미엄 회원권 받았으니까 그렇죠. 저는 제 돈 다 주고 등록해야 하구요, 4년제 졸업 아니라서 등급도 낮아요. 저랑 같은 급 만나려고 돈까지 내고 싶진 않다구요!”


너무 솔직해서 당황스럽지만 한편 시원하기도 하다. 적어도 경미 씨는 내숭을 떨진 않는다.


“에이… 무슨 급을 따지노.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부장님… 좋은 사람을 만나는데 가입서를 무슨 취조서 쓰듯이 두 장 빽빽이 쓰고 돈까지 내진 않죠.”


오 선임이 그런 등급 나누기 결혼 정보 회사는 딱 질색이라며 말을 거들었다.


“그럼… 오 선임님… 저는 어때요? 어차피 김 대리님이랑은 물 건너갔잖아요?”


세상에는 여러 주사가 존재한다. 보통은 주사도 습관이라 항상 비슷한 패턴을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자주 만나는 주사는 다양하다. 술만 먹으면 서러움이 폭발하는 통곡 주사, 또는 술만 들어갔다 하면 세상이 우습기 짝이 없는 폭소 주사, 평소엔 하도 말 없어서 저금통인 줄 알았는데 술만 들어가면 만담, 그것도 재미도 없는 넋두리 하고 또 하고 술 깰 때까지 또 하는 독종 주사, 온갖 진상 떨어대다가 한 순간에 갑자기 레드썬 되는 기면 주사, 기면 주사 부리는데 같이 들이마신 지인들 세상 냉정한 인간들이라 결국 길바닥에서 종결되는 노숙 주사…


그런데 이 모든 주사가 갑자기 충격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술이란 것은 들어간 잔수와 시간에 따라 점점 여러 가지 악마의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그 시작은 항상 불변. 갑자기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못 할 말이 없어지는 근본 없는 자신감이 발현되는데서 시작된다. 이 여인은 지금 그 초기단계를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니 뭐, 경미 씨를 이제 두 번 만나지만… 딱히 여자로 본 적은…”


“뭐라구요?? 아까 회의실에선 목소리 제일 크시던데 왜 갑자기 다 죽어가는 목소리세요!”


오 정훈은 경미 씨의 뜬금없는 호통에 당황했는지 귀까지 빨개졌다. 하지만 저 짓 또한 이미 주사의 서막, 주사의 예고편… 가는귀먹고 귓구녕이 잘 안 들리니까 제 목소리도 아까보다 두 배쯤 커진 그런 상태로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굉장히 무례하고 또한 건방져 보이는 효과를 내는 그런 초기 주사의 일종일 뿐이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 주사자는 앞으로 내내 했던 소리 또 하고, 남이 하는 말 못 알아먹고 두 번 세 번 성질을 내며 다시 묻기 시작할 것이며 일행 중 정의로운 인간이라도 끼어 있으면 이 초기 주사에서 싸움이 발발하여 진압될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일행 중에는 그다지 정의로운 인간이 없다. 회식 때마다 보아 오던 풍경이니 처음 겪는 사람이 느끼는 황당함 또는 건방짐에 불쾌감을 급작스레 느끼는 현상 따위는 없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다들 소극적 주사를 떠는 중이다. 다른 이의 웬만한 주사에 무감각한 소극적 주사…


“… 사실은 연락을 계속했었는데… 핸드폰 번호가 바뀌었더라고. 본사에 물어봐도 사생활이라 핸드폰 번호는 못 가르쳐준다고 하고… 하는 수 있나. 그대가 다시 나를 기억해 연락을 취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렸는데… 이미 남의 담벼락으로 넘어간 풍선이구랴.”


유치하면서도 청산유수같이 말을 잘도 하는 이 단정한 오빠는 뭐랄까… 장 선생과 많은 점이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공부를 매우 잘했지만 장 선생보다 조금 덜 잘했고, 구기동의 커다란 한옥집에 조부모까지 삼대가 화목한 집안의 장남이고, 자신감이 넘쳐 말이 없는 장 선생과 반대로 자신감에 사교성도 높아 아무 하고나 말을 잘 섞는다. 저변에는 그 누구도 나를 밀어내지 않을 것이라는 믿는 구석이 단단히 있고, 장래희망은 본인의 호탕하고 강건한 아버지처럼 회계법인의 수장으로서 정숙하고 지적인 아내, 본인을 닮은 아들 셋을 둔 멋진 가장이 되는 것이라 했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면서 웬만한 사람들에겐 다 바뀐 번호를 고지했는데… 거기에 속하지 않았던 걸 보면 우리는 같이 일하는 사이도, 같이 사랑하는 사이도, 하다 못해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거죠.”


“에이…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나는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데…”


“그건 사랑 아니지. 적당하게 골라둔 베필이면 모를까.”


한 대리가 슬쩍 뭉개지기 시작한 교포식 발음을 쓰기 시작한다. 그래도 걱정할 건 없다. 회식 구력 몇 년인가. 중견 대리쯤 되면 저 정도 살짝 맛이 간 상태로 회식 끝까지 견디기가 가능해진다. 매일 근력 운동을 하던 사람이 무게에 익숙해져 계속 중량을 더해가도 가능하듯이, 인간의 간도 개발하면 얼마든지 능력치가 올라가나 보다.


“에이, 형진이. 그건 아니지. 뭐 방금 가라앉게 생긴 타이타닉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것만 사랑인가? 편하게 모시겠다는 김중배 두고 수일 씨를 택한 청승맞은 순애의 순애보만 사랑인가? 은근하게 지펴서 평생 꺼지지 않는 가마솥같이 따뜻하게 모시겠다는데 그만한 사랑이 어딨어.”


한 대리와 오 선임은 중학교 동창이다. 비슷비슷한 학교를 나오고 비슷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타인인데도 어딘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적당히 이기적이면서 예의 바른 전형적인 모범 대리 둘은 많이 닮아 있다.


“됐고!!

사랑인지 아닌지는 심장한테 물어봐! 이건 수학처럼 해답지 있는 거 아니라고! 심장이 뛰어야 사랑! 근데 심장 뛸 일이 잘 없으니까 적당히 골라잡는 건, 것도 또 하나의 비즈니스지!”


‘생각’이라는 프로세서를 거치지 않고, ‘예의’ 기능이 상실된 저 여인의 상태는 이제 2기쯤 되나 보다.


“… 흠… 그러면 하나 물어볼게.

지금 만난다는 그 선생한테는 가슴이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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