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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은 집중하는 예의

(2)

by Hazelle

“회의실… 이 기름집 자주 와 봤을 테니 어딘지 아시죠? 오 선임님? 이 복도 끝에 두 번째 방. 저는 자료를 마저 복사해서 들어갈게요. 참, 설탕 안 넣어 드시는 커피 원하시면 경미 씨가 만들기 전에 얼른 말해야 해요.

무조건 디폴트로 설탕 두 스푼 넣고 커피를 만들거든요.”


이 와중에 사귄 것도 안 사귄 것도 아닌 전 남자 친구의 커피 취향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참 헛웃음이 난다.


“오, 노우! 댓츠 낫 굿!”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그러니까 저렇게 화려하고 코믹하게 영어까지 섞어가면서 말로 사람 혼을 쏙 빼놓는 희한한 필살기를 발휘해서 딱히 만나지 말자는 소리를 못 하게 하는…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그런 신기한 남자라고나 할까.


“김 대리, 오늘 회식은 산이야, 바다야? 어차피 저 선임 들어오면 회의 길어지니까 경미 씨한테 미리 예약해 두라 하게.”


“대리님도 오 선임님 아세요?”


“작년 정보계 엎을 때도 저 인간이 컨설팅했잖아. 아.. 오해는 마. 나 개인적으로도 쟤랑 동문이라 좀 알아. 일은 잘하는데 진짜 말 많아. 했던 말 돌려서 또 하고, 또 하고… 아 참, 조심해라. 워낙 바빠 여자 만날 시간이 없다고 좀 괜찮다 싶은 여직원 만나면 바로 결혼 전제로 들이미니까.”


어차피 나에게 한눈에 반했다거나, 뭔가 엄청난 인연의 힘을 느껴 적극적으로 나를 원했던 것은 아니란 것쯤이야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에게 이런 정보를 들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나라서’가 아니라 ‘너 정도면’의 마음으로 적극적이었던 거라면 굳이 많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다.


원래 어느 회사건 제일 일 많은 사람들이 대리들이다. 과장 전 대리… 사원 다음 대리… 일을 가장 잘하게 되는 연차에 적당하게 찌질한 직함 하나 줘서 더 일을 많이 시켜도 사명감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지위 ‘대리’. 대리라는 직책은 그렇다. 과장보다는 한 없이 낮고 사원과는 거의 동무… 그리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대리쯤 되면 결혼을 해야겠다 생각한다. 대리는 뭐랄까… 한 인간의 인생에서도 한 고개 올랐다는 이정표쯤 된다. 한 대리는 그런 평범하고 훌륭한 대한민국 보통 대리 중 하나다. 한 대리도 그렇고 선임 컨설턴트 오 정훈 씨도 그렇고… 그들은 보통의 건강하고 성실한 대한민국 대리들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보이지 않는 주인이 주는 세경을 받기 위해 청춘을 저당 잡혔지만 그 와중에 장가는 꼭 가고 싶은… 지극히 정상적인 대한민국 청년들이다. 마음이 급한 대리들은 본인이 정한 몇 가지 기준에 맞으면서 적당히 마음 설레는 여인을 보면 얼른 장래를 타진해 보곤 한다. 이런 삼십 대 초반은 많이 봤다. 그런데… 우리… 장 선생님은…? 알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평범한 ‘대리’들과 다른 그를 떠올리니 갑작스레 우울해진다. 분명 나도 그 앞에서 단호히 ‘결혼 생각은 없노라’고 했으면서… 혼자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가 아니다. 저 네 번 만난 청혼남의 결혼 욕구가 장 선생한테로 옮았으면… 이런 생각을 하다가 흠칫 멈춘다. 가뜩이나 풍선 같은 남자… 결혼 운운했다가는 진짜 블라디보스톡으로 날아가버릴지도 모르니까…


프로젝트를 하면 갑과 을, 그리고 을, 또 을… 이렇게 모여하는 회의가 하루에 몇 번이고 있다. 을의 종류에는 나처럼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 매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갑과 함께 해야만 하는 붙박이 을이 있고, 오 선임처럼 필요할 때마다 들어와서 이것저것 야무지게 간섭을 해대는 보따리 을들이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갑과 을의 관계는 매우 가식적으로 좋고, 을과 을들은 혹시나 다른 을이 나한테 일을 더 갖다 붙이는 건 아닌가 매우 예민하게 서로를 대하곤 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오늘 회의에서 저 애매한 전 남자 친구께서 나를 물 먹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명실공히 큰 그림, 밑그림을 그리는 비싼 ‘보따리 을’ 컨설턴트이고 나는 그의 그림을 채색해야 하는 페인트공, 엔지니어기 때문이다.


왜 비겁하게 끝맺음을 제대로 안 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사실 그것조차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연히 만난 나와 꼭 선 봐서 만난 목적성 있는 사이처럼 급진적으로 연애 건너뛰고 무조건 결혼을 강요했다고나 할까…

회의자료는 다 준비가 되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껄끄러운 만남에 자꾸만 회의실 앞에서 거북이걸음을 하는 중이다.


“김 대리! 다 준비되었지? 얼른 들어와. 부장님 찾으신다.”


한 대리가 회의실 바깥에 나와 재촉을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들어서자 오 선임이 이미 프로젝터 기를 켜 놓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진짜야? 둘이 결혼할 뻔한 게?”


“네??”


“아니, 아니. 부장님. 그게 아니고, 제가 결혼하자고 적극적으로 대시했는데 김 대리님은 전혀 호응하지 않다가 그냥 말도 없이 도망갔다니까요. 아하하하.”


“아이고야… 우리 오 선임 같이 일 등짜리 신랑감을 그렇게 차갑게 끊다니. 역시 우리 김 대리!”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김 대리 나이가 얼만데… 무슨 벌써 결혼은…!”


회사는 분명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집단인데 희한하게 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 안에서 프라이버시 또한 없다. 일을 같이 하면 동료의 인생에도 자꾸 관여를 하게 되는 이상한 직업병도 존재하는 한국사회. 몇 년 이렇게 지내 대리가 된 자들은 대충 이런 상사의 오지랖에 허허 웃으면서 넘기는 게 최고라는 처방전도 탑재하게 된다.


“제가 진짜 결혼하고 싶은 남자 있으면 부장님께도 보고 드릴게요. 절대 걱정 마세요.”


미쳤나 보다. 그저 실없는 농담인데도 순간 장 선생을 떠올렸다. 전 남자 친구라고 하기에도 애매모호한 전 남자 친구가 말실수를 했다는 건 잘 인지하고 있는지 연신 내 눈치를 살핀다. 만난 것도 몇 번 안 되지만 이렇게 같이 일을 해보는 건 또 처음이다. 프로젝트 총괄기획자인 갑과 설계자인 컨설턴트, 개발자인 프로그래머 삼위일체가 한꺼번에 모여 진행하는 전체회의는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모두 각자의 이익에 입각하여 첨예하게 곤두서기 때문이지만 결국엔 주머니를 열지 않으려는 자와 그 주머니 어떻게든 열어서 프로젝트를 기왕이면 확장하려는 자, 그리고 그 설계자의 원대한 계획에 의하여 야근의 개수가 달라지는 일개미 프로그래머가 어떻게든 생존권을 세워보려 촉각을 곤두세우는 전방이기 때문이다.


회의는 지지부진 큰 진전 없이 몇 시간째 계속되고 습관적으로 커피를 어찌나 마셔댔는지 속이 쓰릴 지경이다. 중간중간 잠깐 쉬는 시간이면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그럼 잠깐 쉬고 다시 모여서 결론짓지. 십 분 후에 다들 다시 회의실로! 이젠 마무리할 거니까. 마무리하면 회식 겸 저녁 할 예정이니 경미 씨 예약했나 확인해 봐.”


한 시간이 넘으면 니코틴 금단 증상을 보이는 부장이 휴게실로 남자 대리와 사원들을 데리고 사라진다. 벌써 저녁 7시가 넘었다. 부장이 언제까지 배고픔을 이길 수 있는지를 아는 베테랑 경리 경미 씨가 시계를 흘끗 보더니 회사 앞 녹초 먹인 돼지 집에 예약 전화를 걸고 있다. 대체 몇 잔 째인지 모르겠는 커피를 습관적으로 붓다가 짜증이 밀려온다. 대체 왜 기다리고 있는 거지? 그냥 하면 되잖아.


그래서 그의 연락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기하게도 그럴 거라 예상했듯 남자는 받지 않았다. 분명 현재 상태 백수인데 내가 큰 마음먹고 전화를 할 때마다 연결이 제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고 보니 사귀는 사이는 맞는 듯한데 전화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인간 중 하나에 속하면서도 또한 상대가 전화를 하지 않는 것에만 신경이 곤두설 뿐 먼저 적극적으로 그렇다고 연락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본다. 전화는 걸었지만 그렇다고 음성 사서함에 굳이 남기고 싶은 말은 또 없다. 그래서 한 번 더 걸까… 생각 중인데…


“됐어. 받을 인간 같으면 두 번 걸면 받아야지. 그리고 똥 싸러 가느라 못 받은 거면 냅두면 본인이 전화할 텐데 뭐.

김 대리… 섭섭해. 그렇게 신경 쓰는 모습 처음인데?”


커피를 두 잔 마시면 화장실은 네 번 가기로 유명한 한 대리가 그새 옆에 다가와서 안 해도 될 참견을 꼭 한다. 일전에 말했듯 회사라는 2차 이익집단에서 프라이버시란 없다는 것.


“섭섭한 건 전데요?

님이 있나 보네… 흔한 우연 속에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났던 나를 두고…”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는 오 선임이 동창이라면서도 한 대리에게 갑을 대하는 공손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가만 보니 제가 이 험난한 밀레니엄 프로젝트계에서 여왕 벌인가 보네요? 일벌님들 그럼 어서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실까요? 여왕벌의 애정사에는 관심 좀 꺼주시고….”


추워 죽겠는데 눈 피해서 건물 밖으로 나가 오들오들 떨면서 전화할 수도 없고… 이놈의 직장 생활에 비밀이란 없다.


아니… 사실은 전화를 받지 않는 그 남자에게 가장 화가 났다. 거는 순간부터 어쩌면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도 허무하다. 그것은 마치 헤어질 줄 알면서 만나는 것과 같은 그런 공허함과 닮았다. 걸었으니 혹여 다시 답하지 않을까 기다리게 되는 것이 싫어 핸드폰을 자리 서랍에 넣어두고 마지막 회의를 하러 갔다.


“… 자, 그럼 2차 회의는 킥 오프 시점에 부서별로 다 모여서 개발자 파트 나누는 것부터 하기로 하고. 오늘은 시간도 늦고 다들 한 잔 생각 중이니까 여기서 적당히 마무리하지?”


법인카드를 호기롭게 흔드는 안 부장은 술 피리 부는 사나이.

회의 시작 때 보다 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회사원들.

신입사원들은 입사를 하면 하나같이 시시 때때 자주도 있는 회식에 넌저리를 낸다. 그러다 구력이 쌓이면 ‘저 짠 밥에 왜 싫다는 소리도 못하는 거야.’라고 욕했던 대리가 되고, ‘술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회식이 그리 좋으면 장가는 왜 간 건가!’ 했던 과장이 되어가고, ‘차라리 회사에 뼈를 묻어라!’ 놀아도 사무실에서 노는 가정 왕따 부장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신 똑바로 박혔던 신입사원은 어찌하여 안 부장이 되었는가… 그것은 사회의 탓인가, 결혼이라는 제도의 탓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인간은 그저 나약한 습관의 동물일 뿐인가…


최대한 느릿느릿 자리를 정리하면서 그 와중에 핸드폰을 한 다섯 번은 만지작 거렸나 보다. 혹시 회의 들어간 사이 부재중 전화가 와 있지 않을까… 했지만 무심한 남자는 조용하다.


“좀 할 줄 아는 남자 만나. 애 끓이지 말고…”


늑장을 부리고 있으니 혹시 새나 싶어 잡으러 온 한 대리다.


“네?”


“전화 기다리는 거잖아. 아까부터… 할 줄 아는 남자를 만나라고. 연애든, 사랑이든. 전화든.. 그런 무심한 초짜 말고… 그 자식 사람 만나는 법 몰라. 자꾸 궁금해하면서 마음 지옥으로 만들지 말고 얼른 가자.”


한 대리가 남의 가방을 먼저 낚아채고 앞장을 선다. 알고 있다. 마음에는 내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없는 방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방이다. 잠그는 것도 여는 것도 사실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데… 잔뜩 속상한 뒷모습의 저 남자도 그걸 알면서 자신에게는 곁을 내주지 않다가 갑자기 엉뚱한 이에게 허물어져 안절부절 중인 내게 화가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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