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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록 차가운 따뜻함

(2)

by Hazelle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다. 사실 진심을 담아서… 그런데… 남자의 눈빛이 일순 싸늘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완벽한 복지리 앞에서 하는 거 아니지.”


애써 농담 인양 돌리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에이… 그냥 해 본 소리지. 이렇게 전문 요리를 척척 해내는 남자를 보고 어떻게 욕심이 안 나겠어.”


“결혼 안 해도 이 정도는 먹고 싶을 때마다 해줄게. 그러니까 그런 무서운 소리는 안 하는 걸로.”


과민반응을 보이면서도 어째서인지에 대한 설명은 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직장인 김 대리는 상황 파악도 빠르고 또한 전환술도 좋다.


“오케이.

그럼 다음번엔 마산 원조집 스타일의 아구찜을 부탁하겠어.”


“아구찜? 그건 쉬운 편이지. 오케이”


우리는 즐거웠다. 같이 밥을 먹으면.

같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우연히 겹치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 이야기를 할 때면. 실없는 농담을 할 때면. 별 다른 스킨십도 없이 무미건조한 데이트를 해도, 헤어질 때 가볍게 입맞춤을 해도, 아무 말 없이 남산에 올라 야경을 볼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했다. 그와 헤어지고 나면 다시 만날 때까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을 때면. 그리고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오지 않으면. 같이 있다가도 그가 집안사람의 전화를 받을 때면. 아니… 나와 마주 앉아 웃고 있으면서도 멀리 보고 있는 눈동자를 볼 때면… 그래서 나는 함께 하는 세월이 더 깊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더뎌도 흐르는 시간은 더딘 사이도 좀 더 단단하게 해주는 은근한 힘이 있으니까.


“서울 와서 한강 유람선 타 봤어? 아, 맞다. 강일 씨랑 이미 했다 했던가…”


“이 오빠가 저번부터 왜 이래? 남산을 데려가질 않나… 서울 촌놈들도 안 탄다는 유람선을 이 한겨울에?”


“나 한 번도 안 해본 거 너랑 하나씩 하는 중인데?”


“… 가만 보면 안 해본 거 참 많은 인생이야.”


진짜 그렇잖아. 짧지도 않은 인생에 해 본 거라곤 공부가 다 인듯한 이 남자. 삽화 말고 만화라는 장르도 엄연히 문학이란 걸 이제야 안 남자. 클래식 말고 팝송도 찾으면 좋은 노래 많다는 것도 겨우 알아낸 남자… 그래도 안 해 본 것들을 나와 하나씩 해 보는 중이라는 그 말은 좋았다. 아니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래서…”


남자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댔다. 이 남자는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심장 떨어질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짓을 한 적이 많아 이번엔 놀래지 않는다. 그래서 속지 않는다, 의연하게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한번 예상을 엎고 그대로 입술을 포개 왔다.


심장이 뛰다 못해 튀어나오기 직전에 남자는 키스를 마치고 그대로 가까이 눈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사랑도 너랑 처음 해 보려고. 김 대리님, 가르쳐 주세요. 제대로 사랑하는 법…”


착각이었나… 그때 처음으로 남자의 눈이 슬퍼 보이지 않았던 것은. 온전히 빛나고 있던 그 눈은… 그렇게 한참을 나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니다. 그때 얘기할 걸 그랬다. 사실은… 나도 모른다고… 제대로 사랑하는 법 따위…





기본은 집중하는 예의(1)



하루 중 반 이상 컴컴한 겨울이 자꾸만 깊어지고 있다.

늦게 뜨고 일찍 들어가 버리는 게으른 해와 아랑곳없이 거리에는 한 달도 더 남았는데 세기말이라 그런가, 벌써 크리스마스 조명들로 한참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밀레니엄 버그에 바짝 촉각을 세워야 하는 컴퓨터 쟁이들에게 서양의 잔치는 멀고도 무관했다.


“김 대리, 예산팀은 밀레니엄 버그 테스트 완벽히 끝난 거지?”


“네, 그래도 몰라서 계속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체 이 인간들은 프로그램을 짤 때 1999년까지만 지구가 존재하고 이후엔 다 망할 거라고 생각했었나…

노스트라다무스의 후예들인가, 대체 연도 디지트를 왜 두 자리로 맞춰서 이리도 우리를 힘들고 귀찮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가뜩이나 연말은 바쁜데, 이번 연말은 그냥 연말도 아닌 세기말 연말이라 더 힘들어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대한민국 회사원들은 바쁘다. 수술방 의사 아니라도 둘러보면 야밤에 급한 호출받고 바로 출동해야 하는 직업군은 널렸다.


“김 대리, 우리 거 왜 예측 프로그램 로직 컨설팅 회의하기로 했었잖아, 카운터 회계 법인에서 선임 컨설턴트 30 분 후에 도착한대니까 오시는 대로 바로 회의실. 알았지?”


이런 식이다.

좀 전에 예산 프로그램 얘기해서 다시 한번 점검하느라 배치 돌리는 중인데 입으로 일하는 갑, 안 부장께서는 숨 돌릴 틈 없이 다음 스케줄을 공지하고 있다. 대략 자동판매기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은 하루에도 여러 번.


“알았습니다…

여기다가 뭐 하나 더 시키시면 오늘 중에 퇴사합니다잉.”


볼멘소리로 투덜대지만 이미 안 부장이 사라진 것도 알고 있다. 30분 안에 회의 자료 챙기고, 컨설턴트가 일목요연하게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알고리즘 로직도 순서대로 정리해서 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 복사기 옆에서 분주한데 소리도 없이 그림자가 옆에 드리워진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친숙하진 않지만 특이해서 익숙한 목소리. 분명 아는 사람이다. 아니, 사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아는 이름표 있는 목소리. 선뜻 반갑다기보다 어색한 그의 얼굴이 목소리만 듣고도 떠오른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오빠 여기 웬일로? 아… 혹시 선임 컨설턴트가 오빠야?”


오후 시간인데도 마치 방금 공들인 샤워를 하고 새 옷을 꺼내 입은 양 말쑥한 남자가 나 만큼이나 어색한 표정으로 복사기 건너편에 서 있었다. 내가 아는 이 남자는 오 정훈. 작년 내내 만났었다. 내내… 그러니까 분기별로 한 번. 아마 살면서 내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바빴던 사람이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흔한 인연으로 만났다. 가장 흔하게 인연이 되는 방법이 대충 아는 사람 누구누구를 건너 소개를 받는 것이라면 두 번째로 흔한 인연은 오가다가 우연히… 그렇게 만난 경우…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남자를 강남 대로변에 있는 커피숍에서 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때우다가 만났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우연히도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점심 같이 먹고, 같은 날 늦은 저녁도 같이 먹었는데 그 첫 만남은 좀 충격적이었다. 아… 그리고 그날 두 번의 만남이 그와의 총 네 번 만남 중 반을 차지한다.


“혹시 피아노 치나요?”


“그냥… 대한민국 초등학교 공식 과외활동 남만큼 한 정도…?”


“뜨개질은요?”


뭐지… 유모를 구하나?


“것도 뭐 잘은 아니고 할 줄은 아는 정도…”


“아하하… 미안 미안, 내가 늘 상상하는 아름다운 저녁의 모습이 있는데, 까만 밤을 가르고 지친 몸을 끌며 집으로 돌아오면, 어여쁜 아내가 코안경을 걸치고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다 나를 보고 매일 놀랍고 반가운 표정으로 환히 웃어줬으면 하는… 아! 아침 모습도 있어요. 아침이면 그녀의 아름다운 모짜르트를 알람 대신으로 들으며 깨고 싶은… 아하하…”


“어머나… 구체적이기도 하시다…”


다행히 그의 로망에 더욱 상세하게 ‘된장찌개 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이라던가 ‘늦은 나를 위한 야참 냄새…’ 등의 먹는 것에 대한 언급까지는 없어서 식모를 찾느냐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희한하게 듣는데 부담스러웠다.


사실 딱히 매우 끌리는 것도 아닌데 가뭄에 콩 나듯 분기별로 만난 이유란 주위에서 하도 ‘그런 남자를 어떻게 오가다 만났느냐’고 부추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나는 결혼이니 연애니 하는 것에 그다지 대단히 명확한 기준 혹은 계획이나 철학 따위 없는 이십 대 초반이기도 하니까. 나보다 7살 많은 이 아저씨는 상당히 동안이고, 태어나 어디에 끼든 3등 안에는 드는 똑똑이에 직업도 집안도 좋은 하나 버릴 것 없는 참한 남편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 남자는 결혼할 여자를 찾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남자의 생활 중 드물게 시간이 많이 났던 처음 만난 날, 그러니까 그날 우리는 두 번이나 만났는데 무슨 장시간 조사라도 받은 양 피곤할 정도로 남자는 그날 나에 대해 모든 인터뷰를 끝냈다. 가벼운 만남이 미덕인 어린 남자들과 새털처럼 가벼운 만남에 지칠 때쯤, 어쭙잖은 회사 생활에 벌써 진력이 나려던 찰나, 안정되고 바쁜 30대 남자는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남자는 전화는 꼬박꼬박 걸어오면서도 만나자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단연코 내가 만나본 중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숱한 전화통화 사이사이, 혹은 그 '가뭄의 콩 만남’을 하면 반드시 결혼 이야기를 들먹였다. 세 번째던가 네 번째로 만났을 때 집에 인사를 가자는 소리에 정말 농담이 아님을 깨닫고 이후 비겁하지만 잠수를 탔다. 그렇게 찜찜하고 시시한 이별을 한 사귄 것도, 아닌 것도 아닌 남자를 일터에서 만나는 것은 최악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색해서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억지 미소를 띠고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깔끔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응. 사실은 동기가 맡은 건인데 회의 참석자 리스트에 네가 있길래… 잘 지냈지? 우리 끝난 적 없으니까 회의 끝나고 오늘 근처에서 저녁 할까? 징기스칸 잘하는 데 있는데…”


“… 바쁘지 않아?”


“저녁 먹고 다시 강남 넘어가야 하긴 하는데, 그래도 저녁을 같이 할 수 있잖아. 괜찮지?”


언변이 좋은 것도 있지만, 하도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바쁘다고 하는 사람이라 연락을 하고 지낼 때도 내 스케줄 상관없이 그의 시간이 빌 때면 만나는 식이었다.


“글쎄… 회의 끝나면 어차피 회식하자 할 건데 뭐. 같이 먹으면 되지.”


제대로 시작해 본 적도 없는 사이기도한데 상대가 늘 한결같이 우연히 만난 인연 타령을 했고,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희한하게 끌려 다니던 관계의 습관이 남았나. 딱 부러지게 이젠 너랑 분기별로 만날 생각이 없노라고 말도 못 하는 걸까. 사실은 그게 아니다. 그 복국을 대접받은 주말을 보내면서 심장병이라도 난 것처럼 하루 종일 울렁대고 어디를 돌아봐도 장 선생이 보이는 매우 불안한 증상에 시달리는 중인데 정작 장 선생은 오늘 문자 한 통 없다. 퇴근을 하릴없이 하고 나면 계속 전화기만 보던가 결국 못 참고 전화해서 촌스럽게 하루 종일 연락도 없느냐고 일차원적으로 투정을 부리게 될까 심히 불안했던 터인데 이 와중에 나타난 건수가 나의 예전 미묘했던 남자 친구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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