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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날씨가 좋은 것이 흔하지 않다지만 겨울비가 내리는 건 정말 싫다. 비가 오는 날은 뭘 하는데 한 세 배쯤의 노력이 더 필요할 만큼 나는 비가 싫다. 조심해도 젖어드는 그 찝찝함이 싫고, 멀쩡한 기분도 처지게 해서 더 싫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비가 오는 일요일이면 무조건 하루 종일 이불속에 숨어 소일을 하는 게 낙이었는데 생전 좋아하지도 않던 유행가를 흥얼거리면서 열심히 단장을 하고 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어떤 것도 귀찮지 않게 만들고, 삶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하며 그 어느 때보다 살면서 열심히 거울을 보게 되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세상에 만 가지가 넘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움직이게 하고’ ‘숨 쉬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평범하고 게으른 여자의 조금 다른 일요일 아침이었다.
현재 백수인 남자는 새벽에 일어나 가락시장을 들렀다. 졸리지만 졸리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저절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도 생각지 않았다.
그 시간에 여자는 그 남자가 준비할 음식을 가장 예쁘게 먹기 위해 단장을 했다. 그리고 준비가 끝나자 남자를 기다렸다. 남자가 도착하기 전 20분 동안 아마 시계를 200번은 보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20분은 꽤 길다는 것을 처음 느끼게 된다. 그래서 고칠 것도 없는 화장을 자꾸만 고친다. 사실 남자는 이미 여자가 사는 건물 밖에 비상등을 켜고 정차 중이었다.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고 배웠다. 늦지 않는 것만큼이나 너무 일찍 상대의 동의 없이 시간을 당기는 것도 무례한 것이라고 배웠다. 살면서 시간이 남아 본 적 없었던 남자는 차에 둔 만화책을 꺼내 읽었다. 우스꽝스러운 그림 속에 꽤나 깊은 철학. 여자를 이해하는데 그녀의 취향을 들여다보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보다 보니 처음보다 더 재미있었다. 어느새 애벌레가 된 기분으로 여왕님이 나오는지 그녀의 오피스텔이 있는 건물 입구를 흘끗 흘끗 보다가 다시 만화책으로 시선을 떨군다.
“뭐래, 왔으면 전화를 하던지… 우리에겐 핸드폰이라는 문명이 있는데 말이죠. 장 선생님?”
약간 뾰로통한 목소리지만 새어 나오는 미소를 못 참고 선 여자가 보였다.
“낭자도 시간이 꽤 남았었나 보오. 화장이 두꺼운 걸 보니…”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왔으면 제까닥 전화를 하던지. 남는 시간 어쩔 줄 모르게 만든 너 때문이라고 하려는데…
“나를 만나기 위해 준비한 시간이 넉넉했다는 것은 기분이 좋은걸? 시간이 남아 내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너무 일찍 만나자고 해서 좀 그런가 했는데…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같이 갈까 아니면 먼저 들렀다 올까 고민하다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괜찮지?”
“그래. 그러면.”
“어디냐고 안 묻니?”
“설마 어디다가 갖다 버리진 않을 테니까 뭐. 한 번 가보쇼.”
이런 점이 좋다면 이상할까.
이 여자는 치밀한 듯하면서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믿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누군가가 나를 믿는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가슴 한켠이 불을 지핀 듯 뜨뜻해지는 그런 포만감을 준다는 것도 알았다.
“일요일엔 다리들이 별로 안 막히는 것도 좀 그렇지…”
“왜?”
“월요일 아침에 다시 꽉 막힌 인생을 살아야 하니 일요일엔 다들 숨어 있는 거 같은 느낌이니까.”
“회사를 그만둔다면, 꼭 하고 싶은 거 있어?”
“… 아니…”
예상 못한 질문인지 창밖을 보던 여자가 약간 놀란 눈을 하고 바라보더니 이내 시무룩하게 답했다.
“그럼 계속 다니는 거야. 인생은 그런 거야. 대책 없이 멈추는 건 아무 의미도 없어.”
인생 허무주의자인 듯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게 기본인 남자다.
“안 막히니까 이렇게 금방이네.
일요일 서울은 생각보다 좁다니까…
딱히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그건 마치 배는 고픈데 땡기는 건 없는… 그런 상태나 마찬가지인 거지. 입맛이 없어도 살긴 해야 하니까 되는대로 부른 것들을 찾아 먹는 것처럼… 하고 싶은 게 없어도 인생은 굴러가야 하니까 일단은 입맛 없는 상태에서 살아. 그러다 보면 갑자기 너무 땡기는 게 생길 수도 있어. 억지로 먹고 싶지도 않은 걸 찾아 먹으면 체하기도 하는 거야.”
속에 한 팔십 노인이 들었나.
흔해빠진 연예인 이야기나 한참 뜨는 영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고도 이 남자와 하는 이야기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아마 듣고 나면 오래오래 머릿속에서 자꾸만 메아리쳐 다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분명히 언젠가 남자는 잠실 어느 아파트에 혼자 산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대학 때부터 과외를 하느라 서울 시내 드러난, 혹은 숨은 부촌을 많이도 다녔음에도 조금 생소한 동네의 단독주택 앞에 남자는 차를 세웠다. 남자가 차를 세우자 기다린 듯 까만 양복을 잘 갖춰 입은 아저씨가 나와 차를 인계받았다. 한옥을 개조한 고풍스러운 저택의 문이 열리고 대체 저런 몸가짐은 어느 학원에서 배우는 것일까 잠시 궁금하게 만드는 노련한 아줌마가 자연스럽게 핸드백을 받아 들고는 앞장을 섰다.
“전주 아줌마가 그러는데 오늘 요리하실 거라고… 장은 다 봐서 아이스박스에 이미 포장해 뒀습니다.”
“고마워요. 역시 아줌마는 한 수 위시라니까요. 참… 맞다. 아들내미 이번에 대학 들어가죠? 잘 키우셨다니까 하여간. 핸드폰 좋은 걸로 하나 해주세요.”
“아이고… 왜 이러세요. 이미 사모님이 충분히 주셨어요. 못 받아요.”
저 아줌마는 지금 진심으로 사양을 하는 걸까… 싶게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결국 그녀의 단정하고 새하얀 앞치마 주머니에 봉투 하나를 얼른 집어넣었다.
“진짜 왜 이러실까… 아줌마 말고, 정훈이 사주라는 건데? 이번 여름방학 때 내가 약속했었어요. 대입 잘 보고 나면 핸드폰은 내가 해주겠다고. 그러니까 편하게 받으십시오.
어머니 뒤뜰에 계시나요?”
“안 되는데… 매번… 참… 고집하고는.
아니 병원도 지금 관두신 백수 양반이… 홍홍홍.”
웃음이라곤 없을 것 같던 근엄한 그녀의 입이 어쩔 수 없이 활짝 벌어진다. 그런 그녀가 유치하다던지, 속물스럽다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호의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베푸는 이에 반해 나름 전문가 다운 태도를 유지하던 그녀가 숨길 수 없는 기쁨에 살짝 흐트러지는 모습이 대조적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 여전히 송구해 어쩔 줄 몰라하는 아줌마를 두고 남자는 먼저 성큼성큼 정원의 돌계단을 올라갔다. 너무 오래 고마워하게 하는 것도 무례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가씨, 이쪽 별채 응접실에 좀 앉아 기다릴래요? 장 선생이 사모님 모시고 올 거예요.”
아줌마는 다시 전문가적인 태도를 찾았다. ‘사모님은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당황스러워하시니’ 여기서 기다리라는 완곡한 표현. 성북동, 구기동,,, 자하문 터널 근처의 동네에서 과외를 해보면 안다. 이런 아줌마의 습성도… 그들은 친절하지만 쌀쌀맞다. 이 새 손님의 정체가 명확하게 정립될 때까지… 고용주와 관련 있다 하여 무조건 친절하지 않다. 그 고용주와 이 새 손님의 관계가 그들의 태도를 정하는데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인상에 비슷한 말씨의 아줌마들은 그 동네에도 집집마다 있는데 일단 나를 처음 대하는 그녀들의 태도는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이다. 가진 게 덜한 사람일수록 남의 차림새, 아니 그전에 나이로 먼저 자신의 태도를 반 정도 결정을 하는데 어린 여대생은 그다지 호감형이 아닌지 다들 존대를 하면서도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짓다가 새로 온 ‘과외 선생님’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태도는 돌변하곤 했다. 부의 정도에 상관없이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란 존재는 숭고하니까. 주인이 깍듯이 대하는 이는 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아줌마도 전문인답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내 존재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댁은 커피를 안 드셔서… 어떻게, 매실차 괜찮으실까?”
이거 봐라. 살짝 말을 잘라 붙이는 반말 아닌 반말.
“네, 감사합니다.”
“우리 사모님이 편하게 남을 만나는 스타일이 아니시라… 조금 기다려요. 아마 옷 갈아입고 오실 테니…”
“…”
“우리… 장 선생님이랑은…?”
본인의 집이 아니란 것을 정확하게 ‘이 댁’이라는 관찰자 시점의 단어로 표현하면서도 ‘우리 사모님’, ‘우리 장선생’ 이란 지칭을 통해 본인이 그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측근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는 전문인 아줌마는 내가 생각보다 붙임성도 없고 무뚝뚝한지 조금 어색해하다가 결국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글쎄요… 저도 애매해서…”
상냥하지 못한 대답을 할 때는 한껏 상냥하게 웃으며 말하면 된다. 사실 아침 댓바람부터 본가에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이 상황에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 남자가 나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라 기뻐야 하는 건지도 아직 감이 안 잡히는데 이 처음 본 전문인 아줌마가 본인 궁금증에 혼자 몸살을 내는 것도 불쾌하다.
“아, 내가 초면에… 이런 실례를… 하도 없는 일이라서 그만…”
내 눈에 스치는 겨울 삭풍의 기운을 전문인 아줌마가 감지했다. 눈치라는 센스를 작동해 조용히 자리를 비워준다. 옛 한옥을 기본 구조는 유지하면서 현대식으로 세련되게 리모델링한 집은 길게 ‘ㄱ’ 자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끝쪽에 있는 이 별채라는 공간은 아마도 사랑채였던 것 같다. 필요한 가구들과 잘 관리된 난들이 배치되어 있고 겨울 아침인데도 채광이 좋아서 부족한 아침잠이 쏟아질 만큼 따뜻했다.
혼자 한 5분 정도 있었나… 가끔 정원에서 들리는 새소리만이 적막을 깨는데 이 집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집에선 쓸쓸한 냉기도 같이 느껴진다. 가만… 아주 희미하지만 그것은 그날 밤 강원도의 그 집의 그것과 닮아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장 선생에게서 가끔 느껴지는 그 서늘함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