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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는 별 첨언 없이 시계를 한 번 더 보더니 면접 내내 밖에서 마당쇠 노릇을 하던 한 대리를 급하게 불러댔다.
“자, 5번 면접자분 봉투 챙겨 드리고, 4번분은 잠깐만…”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5번 아가씨는 그때 이미 본인은 떨어진 것을 알았을까… 아니면 마지막 센스 문제의 정답을 맞혔으니 일단은 연락을 기대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을까…
오케이 바리를 자신 있게 외치고 면접을 마무리한 4번은 5번의 정답을 듣고서야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뭐 그런데 그 애사심 기본 문제는 그야말로 로또 보너스 번호 내지는 점수 없는 맛보기 문제였던 모양 당락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5번 탄 엘리베이터 내려갔으면은, 정아 씨 경미 씨한테 얼른 소개시키라. 그래야 버섯집 어딨는지 알아서 뛰지. 아, 빨리. 시간 없다.”
본인이 뽑힌 것인지도 아직 모르고 어리바리한 신입 경리를 데리고 한 대리가 바쁜 걸음으로 움직인다. 나는 그와 다른 동선으로 가서 얼른 엘리베이터를 부른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지나가는 길에 원형 탁자가 있고, 그 원형 탁자는 업무 중 회의나 조율을 할 때도 모이는 용으로 사용되지만 이 사무실에서 11시 50분만 되면 열리는 희한한 경기의 경기장이기도 하다. 국영기업 시절 현장 근무했던 관리자 출신의 늙은 부장들은 아직도 공장에서 하던 ‘계산기 게임’을 해서 진 사람이 점심 내기를 하는데 그 계산기 게임은 실제 목도하지 않으면 그 경이로움을 헤아릴 수 없다. 경기 규칙은 매우 간단한데 주어진 엄청나게 긴 숫자들을 누가 빨리 쳐 넣어 답을 구하느냐 이다. 심판의 ‘시~~ 작’ 소리가 떨어지면 거의 동시에 계산기를 거의 한 손으로 한꺼번에 치는데 그게 한꺼번에 아무렇게나 치는 것 같지만 거의 한 번에 다섯 숫자를 다다다닥 입력하는 기술이다. 50분이 좀 넘은 모양 이미 아저씨들이 계산기가 부서져라 두드리고 있다.
“오늘 경기 나가리!! 상무님이 쏘세요.”
게임을 무산시킴과 동시에 바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러 날랐다. 층마다 서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를 보니 아무래도 신입 경리는 이 엘리베이터 탈 일진은 못된다… 고 생각하는 중인데 이미 한 대리가 비상구 문을 여는 게 보이고 오 분 전에 뽑힌 정아 씨가 9센티 힐을 신고도 날기 시작했다. 걱정은 안 된다. 사람이 언제 초인적인 힘이 나오게? 다급할 때? 맞지… 그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딱 하나 더 있다. 너무 기분이 좋아 미칠 때… 20대 젊은이에게 가장 신나는 순간은 면접 붙었을 때다…
내가 미리 엘리베이터를 불러둔 덕에 상무는 몇 초 기다리지 않고도 편하게 점심시간에 가장 귀해지는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원래 직장생활은 직급이 낮을수록 엉덩이가 가벼워야 사랑받는다. 체면과 기품을 잘 챙기면서도 예약시간에 전혀 늦지 않은 적절한 시간, 18분쯤에 상무, 안 부장 그리고 그들을 보필하는 내가 근처 건물 지하에 있는 버섯전골 맛집에 들어서자 중앙의 넓게 트인 방에 기름집 직원들을 위해 미리 붙여 놓은 상 다섯 개가 보이고, 이미 벌써 도착한 신임 경리 정아 씨가 식당 아줌마들 사이에 껴서 수저들을 놓고 있었다.
“아따, 마! 우리 4번! 억수로 빠르네. 임 춘애네, 임 춘애.”
어떤 쌍팔년대 소리를 해도 누구나 알아들어야 하는 농담, 상무의 농담이다.
“근데 왜 이 식당 수저를 놓고 있노? 이기서 월급 받으끼가?”
또한 이래서 만만하지 않은 인간, 상무다.
제일 맞추기 힘든 인간이 털털하고 호탕한데 한편 머리카락 홈 파는 꼼꼼함을 가진 상사라는 인간이라는 것에 동의할 직장인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사의 눈 밖에 나면… 거두절미하고… 매우 피곤하다. 조금 좋은 소식이라면, 이런 상사는 의외로 명확한 타입이기 때문에 알아서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조금 쓰면 쉬워지기도 한다.
그런 까다로운 상무를 꽤 잘 아는 나는 바로 상무 옆 자리에 앉지 않고 잠깐 안면이 있는 아줌마를 찾는다. 조용히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보여주면 아줌마가 앞치마 세 개를 내준다. 내가 회식자리 전 직원을 챙기면 과해지지만 적어도 ‘우연히’ 내 테이블에 함께 하는 상사 둘을 챙기는 건 예의가 된다. 얻어 온 깨끗한 앞치마 중 하나를 잘 털어서 이미 자리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는 상무의 목덜미에 휘릭 걸어준다. 그의 내 월급만큼이나 비싼 제냐 와이셔츠에 함부로 버섯전골 국물이 튀면 안 되니까…
“아이고… 우리 김 대리 센스! 깜짝이야. 그렇게 뒤에서 앞치마를 걸어주시면 내사마 심장이 콩닥거린다이가. 하하.”
애교보다는 옅게, 적당한 살가움은 언제나 플러스다.
“그라몬, 경미는 이제 오전 근무만 2주간 하는갑지?”
“뭐 서로 껄끄러운데 인수인계를 뭐 2주나 할거 있겠습니꺼, 일주일이면 뭐 충분하지예.”
그렇다.
전임자 경미 씨는 같이 점심을 안 먹나 궁금했는데… 김 과장이 들어설 때 이미 경미 씨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보통은 때린 놈이 다리를 못 펴고 잔다는데, 회사 생활에선 쫓겨나는 하급직원이 언제나 다리를 못 편다.
“맞다, 내 오늘 이사회에서 내년 유가 관련해서 발표해야 되는데… 김 대리야, 한 대리한테 그거 미리 뽑아놨는가 물어봐라.”
한 대리는 바로 옆 테이블 앞쪽에 앉아 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차피 상무가 말하면 한 대리도 다 듣는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상무는 늘 이런 식의 화법을 즐겼다. 옆에 주로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통역관으로 사용했는데 뭐랄까, 본인의 말에 더욱 위엄을 싣고 스스로를 더욱 높이는 전략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한 대리님, 들으셨죠? 유가 변동 예측 자료 미리 뽑아 두셨어요?”
“네! 잘 준비해 두었습니다!”
“상무님, 한 대리님이 잘 준비해 두셨다고 합니다.”
“오케이~!”
그때였다. 아무래도 헛소리를 들었나 싶었던 건…
상무의 오케이!가 끝나기 무섭게 말단 직원 석인 끝 테이블 쪽에서 누군가 우렁차게 ‘바뤼!’라고 외친 것이었다…
“흠… 살짝 불안한데?
쟈 지금 지가 말한 답이 기가 차서 뽑혔다고 생각하는 거 아이가? 그라몬 곤란한데… 딱 그 부분에서 짤릴 뻔했었구마, 저리 눈치가 없어서 쓰겄나.”
상무는 자기가 배고파서 대충 뽑아 놓고는 초고속으로 후회를 하는 낌새였다.
“마 그래도 공부는 제일 오래했응께, 함 믿어보시지예.”
“영 불안한데…”
그거였구나…
이 대학은 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듣도 보도 못한데라고 하더니만 그래도 그 와중에 가방 끈 길이를 가장 염두에 둔 거였구나…
“슬슬 밥 볶아야 되는 거 아이가? 점심에는 아줌마가 안 볶아주나?”
버섯전골 집의 시스템마저도 완벽히 꿰고 있는 상무다.
“아이고, 상무님. 점심시간에는 느무 정신이 없잖아요. 거 여직원이 좀 볶아야겠구만.”
지금 돌아보면 속이 터질만한 소소한 남녀 차별은 채이도록 흔했고, 그런 차별에 밉살스럽게 은근 앞장서는 자들은 알고 보면 ‘아줌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