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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Oct 18. 2024

그 남자가 선물한 클라이막스

(1)

 “부장님, 저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요.”


라고 한 시각이 8시다. 원래 출근시간 퇴근시간 정해져 있다. 출근 시간은 조금이라도 늦으면 눈치 받고 퇴근시간은 상사보다 일찍 나서면 눈치 받는다. 처음 파견 근무를 시작하면 대부분 갑 상사들이 퇴근시간 맞춰 들어가라며 배려 돋지만 한 두 달 익숙해지면 이미 나도 그들의 병사일 뿐이다. 얼른 친해져서 마음껏 야근시킬라고 그렇게나 초반에 회식을 해대는 이유기도 하다.


“아이고, 벌써 8 시구만, 뭐 일찍이여. 얼른 들어가. 추운데… 집에 바로 가나?”


‘너 보다’ 일찍 들어가서 송구하다 라는 나의 의미를 잘 알아들은 안 부장이 너그러움을 표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사적인 호기심은 절대 숨기지 않고…


“아뇨, 오늘은 남자 친구가 밑에 데리러 오기로 해서…”


“오!! 그 백수 의사 정신 차렸네? 암… 있을 때 잘해야지. 우리 김 대리만큼이나 적절한 규수가 어딨어. 아주 재미있는 시간 되기를 바래. 우리 김 대리 며칠 동안 그 무심한 인사 때문에 얼마나 맘고생했노.”


직장상사는 참 얄궂은 존재지.

일 시켜 먹고 집에 안 보내주고 자기 기분 온 사무실에 투영시킬 때는 원수가 따로 없는데, 연륜은 날로 먹는 것이 아닌지 가끔 인생에 기름칠되는 조언이나 갑자기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위로를 건네 올 때는 가져 본 적 없는 열 살 정도 나이 많은 오빠 느낌이랄까…


“그래도… 너무 어려운 거 같으면 어여 때려쳐. 인연인 사람들은 희한하게 뭘 해도 쉽지, 어려운 건 아니더라고…”


꼭 강일이 오빠 같은 소리를 한다.

나도 안다. 자꾸만 어려운 것이 불안하니까… 그래도 해볼란다. 어렵다고 안 풀면 두고두고 후회하니까… 원래 모르는 문제는 비워둘 바엔 찍어라도 보는 거다…라고… 무모했던 그 시절에는 사랑이 무섭지 않았었다…


정시 퇴근 시각도 아니고, 대부분 야근이 끝나는 10시 무렵도 아닌 8시 경의 엘리베이터는 점심시간과는 사뭇 다른 속도로 빨리 도착했다. 곰곰이 내 스스로 내가 하는 양을 돌아보면 나의 마음이 그를 향해 얼마 정도 깊은지 쯤은 누구나 쉽게 알아낼 수 있는데 사람들은 흔하게도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라며 바보 같은 소리를 부끄럽지도 않게 한다.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게 되면 어떤 중한 일을 앞둬도 그 사람이 언제 마지막으로 내게 연락을 했었나를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있고, 혼자서도 잘하던 그 어떤 일도 시시해질뿐더러 당황스럽게 또한 오히려 별 짓을 안 해도 그 사람만 있으면 갑자기 부는 바람도 신기하고 뭘 먹어도 맛있고 뭘 해도 재미가 나 죽을 지경이 된다. 하루에 몇 번이나 올라타는 익숙한 엘리베이터… 잠깐 멈추었다가 부웅… 내려가는 것도 재미가 있을라 한다. 19…18…17… 숫자가 내려갈수록 심박수가 올라가고 있다. 데이트는 참 좋은 것이다…




눈이 오면 좋겠는데…

서울 종로의 밤은 하나도 까맣지 않다. 온통 불이 환하게 켜진 커다란 빌딩들 사이 그 빌딩에서 하나 둘 피곤한 몸을 끌고 나올 이들을 기다리는 낮은 하늘을 수놓은 음식점들의 요란한 불빛들이 한데 어우러져 거리는 낮보다 더 화려하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돌아보면 찰나 같은 그 세월 동안 가장 많이 한 것은 ‘참기’였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는 같으니 그 하루를 값지게 보내느라 많은 것들을 참았다. 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참았고, 공부가 지겨운 것을 참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할까 봐 아버지를 잃은 내 슬픔을 견뎠다. 아주 오래전부터 했던 각오… 올해 병원을 쉬기로 했을 때 생각보다도 더 덤덤한 자신이 오히려 당황스러웠지만 또한 언젠가부터 막연히 정해 두었던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되는 시점’이라 한편 쓸쓸하게 조금 신이 나기도 했었다… 이 여자를 계획에 없이 만나기 전까지는… 


더 자고 싶은 것은 이제 참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도 억지로 참지 않는다. 그래 봤자 정작 참지 않으려 둘러보니 그다지 미친 듯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여자다. 막상 참지 않고 살려고 스스로 걸어둔 빗장을 열고 나서자마자 마주친 것이… 마치 예보에는 껴 있지 않았기에 생각 없이 길을 나섰다 머리 위로 옴팡 쏟아진 소나기를 우산도 없이 고스란히 만난 것처럼… 젖는 것이 싫었는데 빠진 듯 온통 범벅이 된 것 마냥… 그렇게… 그렇게 그 여자는 만나기 두려웠던 소나기처럼 내게 온통 쏟아져 내렸다. 갑갑한 것은… 또 참아야 할 것이 생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같이 만난 소나기에 조금이라도 덜 젖게 해 주려고 참는다. 온 정신이, 온몸의 감각이, 내 모든 신경이 그녀를 향하는 것을 참는데… 힘들다… 참지 않으려니 후에 그녀가 혼자 견뎌야 할 것들을 배로 남겨주게 될 것 같아 두렵다. 아무래도 참아야겠지. 보고 싶은 것,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 머리를 쓸어 올릴 때마다 코 끝에 머무는 그 향을 계속 맡고 싶은 것, 작고 가벼운 그녀의 손을 마냥 잡고 싶은 것… 그래… 그 모든 것… 사랑을 참아야겠지… 이건 어떨까… 시한부인 내 인생처럼 내 사랑도 시한부로 하는 건…



“눈이 오면 좋겠는데… “


“눈 오면 뭐가 좋아? 직장인 아침에 출근하기만 더 힘들지. 그런 기도하지 마소서, 오라버니! … 오빠, 그 표정 뭐야? 어찌 이 모시기 힘든 김 대리를 보고도 반가움에 펄쩍 뛰지 않는 거지?”


약속시간에서 단 1분도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그녀가 나타났다. 센 척, 무뚝뚝한 척하는 이 바보 아가씨는 아마 로비에 이미 오 분 전에 도착했겠고 빨리 나타나지 않으려고 안에서 기다리다 이제 막 맞춰 나왔을 테지…  해라고 못 보고 사는 모양 창백한 낯빛의 여자가 마음을 숨기는 건 하지 않기로 한 듯 한껏 반가운 것을 감추지 못하고 섰다.


“아… 너무 딱 맞춰서 나오길래… 하하… 우리 김 대리 너무 에프엠인데? 자, 옛다. 정확하게 나왔으므로 오백 원.”


“뭐야, 규칙 바꾼 거야? 만날 때마다 오백 원씩 준다며.”


“… 생각해 보니까, 그러면 너를 천 번이나 만나야겠더라고. 사람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천 번이나 만날지 어떻게 알아? 그래서 좀 헤프게 주고 그럴라고. 뭐, 불만 있어?”


분명히 그녀는 가을 국화만큼이나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일순 어두워져 있다. 걸음을 재촉하던 대만이 의아한 듯 돌아보자 샐쭉한 눈을 하고 그대로 멈춰 선 채 바라만 보고 있다. 마치 여자에게 생각을 들킨 것 같아 겸연쩍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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