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런 게 어딨어. 왜 마음대로 규칙을 바꿔. 오빠, 나 보수적이야. 자꾸 뭐 바꾸고 이런 거 안 좋아해. 그러니까 원래대로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한 마리씩 주는 걸로 해. 천 번을 왜 못 만나냐?! 그게 뭐 그렇게 대빵 큰 숫자도 아닌데… 맨날 만나도 꼴랑 3년인데… 내가 결혼 안 해준다 했지, 헤어져 준다 한 적 없거든?”
“왜 이래… 누가 헤어져 달랬다고. 그냥 너 빨리 부자 되게 해 줄라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기분 풀고 가자. 나 예약 다 해놨는데…”
“웃기네… 오백 원짜리 천 개, 오십만 원이면 부자냐?”
“당연히 부자지. 너 오백 원 천 개면 만화를 몇 권을 보겠냐. 그만큼 만화 보면 네가 만화가가 될 수도 있어. 그래서 그 만화 대박 나면 오십만 원으로 부자 되는 거지.”
“시답잖은 소리 또 하면 진짜 다시는 같이 밥 안 먹어준다?”
“엇… 그거 안 되는데… 난 너랑 밥 먹을 때 제일 행복한데…”
남자가 진심으로 시무룩해지는 걸 보니 마음이 좀 풀린다. 그래… 그 ‘오백 원’… 희한하게 그 ‘오백 원 증정’은 은근히 믿는 구석이었다. 그리하여 천 번 만나면 절대 너와 헤어질 수 없다고 할 테지… 그런 주문을 걸어뒀던 말이다…
농담처럼 던진 그의 말은 화살처럼 심장에 박혀 생각보다 많이 에려왔다.
그리고… 화가 났다.
뭐가 이렇게 어려울까, 이 남자는. 그렇게 몸 사릴 거면서 왜 연애는 하자고 했을까. 연애는 하는데 같이 호적에 남을 생각은 하지 말란다. 그러니 나는 이미 끝이 보이는 연애를 시작했고, 그래도 끝은 끝이 되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라는 희망을 잘 부여잡고 있는데, 이 남자가 자꾸만 어디론가 도망갈 구멍을 뚫는 것 같다. 그래서 바람은 찬데 속에서는 자꾸만 상쾌하지 않은 열기가 차 올라 답답하다.
“알았어, 알았어. 학은 매번 헤어질 때 곱게 쥐어 줄게, 참, 쥐어 주면 잘 쥐고. 알지? 날아가니까? 하하… 이제 가자. 아, 손을 안 잡아줘서 못 걷는구나?”
남자는 과장된 말투로 웃기지 않은 농담을 했지만 안 웃길뿐더러, ‘학은 새니까 날아갈 수 있지…’라는 생각이… 큰일 났다. 남자가 하는 모든 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상대가 하는 모든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짓… 질리게 하는 지름길인데… 애써 신경 쓰지 않는 듯 괜히 더 차가운 표정을 하고 못 이기는 척 택시에 같이 올랐다. 그러면서도 날아갈까 겁나는 학은 다시 남자의 손에 쥐어 줘 버렸다.
보통은 강남중에서도 강남역이나, 논현동 포차 골목, 압구정 갤러리아 건너편 동네에서 노는 게 일반인데 이 남자는 유독 청담동 뒷골목이나 외려 북악 스카이웨이 쪽을 좋아했다.
“보면 취향이 좀 나이 있는 스타일이야.”
“맞아, 난 원래 또래랑 안 놀고 엄마, 이모, 할머니들이랑 주로 놀았거든. 그런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게 너무 신나서 미칠 것 같은 청춘들이 모이는 곳은 정신이 사납다 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아는 맛집은 다 그쪽에 있지. 그런데 오늘 가는 데는 나한테 참 드물게 있는 ‘친구’라는 놈이 하는 곳이야.”
“오, 그래? 오빠, 친구도 있어?”
“응… 기댈 데가 필요할 때면 스윽 나타나서 어깨를 내놓는 놈이야. 나는 내가 콩쿨에서 일등을 했을 때 기립 박수를 쳤던 박 상진 보다 내가 졌을 때 갑자기 나타나 나를 안아줬던 박 정호를 더 친구라고 보고 있는데… 그 박 정호가 하는 술집이야. “
나는 처음 가는 그곳은 꽤 유명한 골목인 모양 택시기사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 장 대만 씨가 친구라고 여긴다는 몇 안 되는 놈 중 하나인 박 정호 씨가 하는 재즈 바는 청담동의 은밀한 작은 골목 중에서도 더욱 좁은 어느 곳 중간쯤에 있었는데, 그나마도 간판이 없어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는 수수께끼였다. 빼꼼, 지상에 겨우 턱을 걸치고 있는 간판 같지 않은 간판에는 겨우 ‘,’가 작게 찍힌 자그마한 정사각형 문양이 다였고, 아마 한 이십 년쯤은 지나 생각해 보면 그게 얼마나 세련되고 함축적인 간판인가 감탄할지도 모르겠으나 어쨌건 그때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만큼 시시했다. 대체 주 종목이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냥 그 성의 없이 작은 정사각형 안의 쉼표를 보면서 했던 생각이란, 또 어떤 돈이 넘쳐나는 집안의 자식 놈이 백수라는 타이틀은 싫어서 폼이란 폼은 있는 대로 잡아넣은 웃기지도 않는 유러피안 아메리칸 재패니즈 썸띵을 표방하는 대한민국 서울 땅 어디쯤에 있는 짬뽕 술집이겠구나… 란 선입견이 막아서는 그런 곳에서 우리는 내렸다.
당연하듯 재즈바는 지하에 위치해 있다.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는 계단은 발을 디디자 하나하나 불이 들어온다. 별 것 아닌 신문물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부정하기도 힘들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파아란 불이 발 밑에 켜지는 것을 하나, 둘… 그렇게 한 오십 개쯤 세었더니 인기척 없이 썰렁하면서 깔끔한 바 스타일의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벽면에 각종 위스키며 와인이 뽐내듯이 라벨을 가지런히 하고 누워 있었고, 또 맞은편에는 작지만 꽤 공을 들인 스테이지에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와 스탠드 마이크가 놓여 있었다. 참, 그 옆에…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도 보인다.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것이 누가 보아도 이 바의 사장인가 보다.
“피아노 좀 쓰게 가게 좀 비우라고 아침에 다짜고짜 전화 더니… 아가씨를 데려온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장난하냐?”
“… 그게 중요한가?”
아마 박 정호 씨인 듯한 남자가 장 선생에게 퉁명스럽게 화를 냈다.
“중요하지, 새끼야. 네가 막 가겠다는 건데… 계획에도 없던 데로…”
박 정호 씨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후 그냥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 버렸다. 장 선생도 그다지 친구가 나간 쪽을 바라보지도 않는 편이었다.
“이상하지? 그러려니 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고자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정신적인 고자, 즉, 사랑을 하면 안 되는 혹은 못 하는 고자와 그냥 말 그대로 태어나길 신체적으로 못 하는 고자가 있어. 이랬거나 저랬거나 고자는 이방인이거든. 여자도 남자도 반기지를 않아. 정상이 아니니까… 알고 보면 세상에 정상은 원래 없는 건데도 사람들은 쉬운 거부터 이상하다고 쳐내니까… 어쨌건 고자는 제일 쉬운 거거든. 그런 고자 둘이 만나면 그냥 친구가 되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중학교 때 그렇게 쉽게 친구가 되었어. 그런 이방인 둘이 친구가 되면 그들이 세상을 따돌릴 수도 있는 거야.”
그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다. 이방인들의 규칙에 연애는 금지였나… 그래서 처음 마주친 남자 친구의 친구는 심기가 불편한 걸까… 그래, 내가 사랑하기 시작한 이 남자 친구는 참 복잡한 사람이다.
“일단 먹을래? 너… 저번에 그랬잖아, 신사동을 아무리 헤매도 마산 아구찜을 이기는 집은 한 군데도 없다고… 그래서 내가 마산 초원 집에서 포장해 오라 했어. 바빠서 아무리 아구찜 먹고 싶어도 집에 못 간다며. 몇 인 분 이런 게 없더라? 그래서 특 대 자로 가지고 왔어.”
나는… 사실 오늘도 그랬었다. 하루 종일… 아무리 오늘 저녁에 만날 거라지만 내가 보고 싶다면,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별 할 말이 없이도 그냥 전화 한 번 할 수 있을 텐데… 밥은 먹었냐고, 아님 그냥 심심하다고, 오늘 저녁 너를 만날 생각에 설렌다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이라도 그냥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그 사이에 어떤 재주를 부렸는지 서울에서 먼 마산에서 아귀찜을 구해왔다… 그러면 사실 나는 감동… 해야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가 식어가는 느낌이다. 이 남자는 왜 이러는 걸까? 갑자기… 꼭, 언제고 아무 때고 떠날 거라 미리미리 해 두는 것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