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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Oct 28. 2024

그 남자가 선물한 클라이막스

(4)

“… 왜 이러는 거야?”


“… 그냥…”


“아니… 왜 이러냐고. 내가 그렇게나 연락을 기다리는데 안 하잖아. 내가 해도 안 받잖아. 그러다가 불쑥 나타나서 와인바를 통째로 빌리지를 않나, 택시 안에서 사랑한다고 하질 않나… 왜 그러는 거냐고… 그렇게 홀려서. 오빠가 결국 바라는 건 한 번 자거나 … 그런 거야?”


“에이… 한 번 잘 거면 그렇게 거창하게 안 나오지.”


개인사가 심란해 보이던 택시기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치 아침 드라마를 보다가 결국 사견을 떠들어야 속이 시원한 중년 아줌마처럼…


“내가 했던 말 잊지 마.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사랑고백이야. 남이 있는데서 말해서 미안한데… 그래야 괜히 너무 슬플 것 같지 않았어. 알았지?”


“에이… 남자 친구분이 많이 취했네. 원래 술 먹으면 막 갑자기 철학자도 되고, 로맨티시스트도 되고, 막 민주주의자도 되고 그런 거지 뭐. 내 친구 놈은 술 처먹으면 갑자기 막 정치가가 돼. 혼자 막 100분 토론 찍는다니까. 원래 택시기사 하면 하루 종일 뉴스를 얼마나 처듣는지, 웬만한 기자보다 더 빠삭해. 하여간에 아가씨 남자 친구는 날도 춥고 많이 취했네. 보니까 와인 마신 거 같은데 그 과실주가 은근히 취해. 그거 취하면 그다음 날 해장도 잘 안된다니까. 콩나물 갖고는 택도 없어. 선짓국 정도는 한 사발 딱 마셔줘야 좀 갱생될까 말까 하지… “


약간 정신없는 택시기사의 목도 아래 남자가 사랑고백을 느닷없이 했다.  들으면 자다가 이불을 한 열 번을 찰 만큼 신나는 고백인데…. 찝찝하지? 왜 그래야 괜히 너무 슬플 것 같지 않다는 둥… 그런 쉰소리를 하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수 십 가지의 질문을 던지는 중이었지만 그저 남자가 내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 눈은 이상하리 만치 서늘하게 슬펐다.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내 눈은 열심히 그런 그의 눈을 쫓았다. 그의 눈은 연신 멍하게 나의 머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거 알아? 사람들은 다 다른 냄새가 있다는 거?”


“… 그.. 래?”


남자의 갑작스런 말에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대꾸를 할 뿐이었다.


“응. 사람들한테서는 다 다른 냄새가 나. 그런데… 그 냄새가 좋고 나쁘고 가 아니다? 그냥 그 사람이 좋으면 그 냄새가 그냥 좋은 거야. 우리 아빠한테서는 항상 안전하고 냉정한 병원 냄새가 났어. 그건 깔끔한 냄새와는 다른 거야. 어떤 사람들은 그 냄새를 무서워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 냄새였던 병원 냄새가 좋았어. 그건… 그래, 그때는 살리는 희망의 냄새라고 믿었으니까… 언젠가부터 그 냄새는 깔끔한 죽음의 냄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내 가족에게선 언제나 그 냄새가 나. 병원 냄새… 나는 그 냄새를 무서워하기 싫어서 그 안으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그 냄새가 끔찍해. 


너한테서는 그 냄새가 안 나.

너의 냄새는 그냥 적당한 냄새야. 그게 무슨 냄새인지 궁금하게 해. 그리고 그게 궁금해지는 내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어. 그래, 너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거야…”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좀 배웠다는 인간들이 술을 많이 마시면 부리는 현학적 주사쯤이라고…

그리고 어쩌면 그는 맞았고, 또한 틀렸다.


나는 오랫동안 대체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고, 또한 아주 오래 흐른 후에 결국은 그가 한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별 보험



 “어제 그렇게 누군가가 눈을 기다리더니만… 결국 내리네…”


잔뜩 흐린 하늘을 인 종로 한복판에 눈이 정신없이 내리고 있었다. 오전 업무를 하다 말고 잠깐 서서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와인바, 아귀찜, 피아노…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아주 오래전 일인 양 아득한 느낌은 아마도 저 내리는 눈 탓일지도 모른다. 


“눈이 참 사납게도 내리네. 퇴근할 때 길바닥 볼 만하겠어.”


직장인은 퇴근할 때 내일 출근 걱정하고,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 퇴근을 신경 쓰게 마련이다.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감상에 젖은 사무실 인간은 없었다. 하나 같이 흘끗 밖을 쳐다보고는 퇴근길 걱정을 한 마디씩 하다 바쁘게 업무로 돌아갔다. 한 대리가 커피를 들고 옆에 섰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커피를 국처럼 후루룩 거리는 것은 직장인이 되면 드는 습관인 걸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어제 데이트는 잘하고?”


“어떤 거 같아요?”


“음… 애매한 분위긴데? 어제 퇴근길에 둘이 택시 타는 건 봤는데… 어디 갔었어? 가만 보자… 걔가 좋아하는 데가… 청담동 무궁화? 아니면 고 위에 오마카세 잘하는 집? 아… 남산 쪽에 쁘띠 프랑스? 아 뭐 먹었는데! 나는 누가 뭐 먹었는지 제일 궁금해.”


“깜짝 놀라실걸요, 마산 아구찜. 것도 청담동에서.”


“청담동에 마산 아구찜 집이 있었나? 그건 신사동 쪽 아냐?”


“아뇨, 청담동 와인 바에서 마산 아구찜 먹었어요.”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와인바에서 마산 아구찜도 먹고, 피아노도 치고…”


“아! 걔 중학교 때부터 붙어 다니던 놈이 하던 와인바 갔구나? 걔 이반이잖아. 한 때 걔랑 붙어 다니니까 이모가 같은 성향인 줄 알고 걱정했던 게 생각나네. 뭐 다행히 대만이는 그쪽은 아닌 것 같지만 말야. 어쨌건 김 대리, 축하해. 그 자식이 그 친구까지 소개한 거면 진짜 보통으로 깊게 생각하는 게 아닌 거니까.”


보통은 그렇지.

남자가 오래된 친구 앞에 데리고 간다는 것은 꽤 여자를 깊게 생각할 때 하는 일련의 행사쯤 되지… 그런데 왜 불안할까. 퇴근 시간 맞추어 추운 길바닥에서 기다려주는 것부터 어린 시절 친구를 보여준 것, 와인바를 통째로 빌려 한풀이를 하게 해 준 것… 그리고… 택시 안에서의 갑작스러운 고백까지… 나는 어쩌면 지금 꿈속을 걷는 양 기분이 날아갈 듯해야 정상인 것 같은데… 그냥 불안하다. 밀리기 전에 해치우는 숙제를 하는 것처럼 보였달까… 그래, 나는 남자가 어젯밤 너무 애를 쓴 것 같아 불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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