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zelle Oct 30. 2024

이별 보험

(1)

“장 슨생이랑 알콩달콩 잘 지내는갑지? 내사마, 어려운 장 선생보다는 거 옆에 복학생 그 청년 참 개안트만… 뭐, 젊은 여자들한테는 좀 인기가 없을 스타일이긴 하더라만서도… 잘 털면 진주가 되는 게 복학생들인데 말이지.”


복학생 시절 설움을 많이 받았나, 유독 상무는 복학생 편이었다. 눈이 와서 그런가… 바쁜 와중에도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커피 몇 모금을 홀짝 거리다가 이내 자리로 돌아가는 직원들이 꽤 있다. 잠깐 붙어 서 봤자 커피 한 잔을 다 마실만한 여유도 못 부리면서… 나 역시 아직 뜨거운 커피잔을 잘 부여잡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방금 담배 타임을 가진 듯 담배 진 냄새가 역하게 나는 두 아저씨가 은근슬쩍 같이 붙어 섰다.


“오데예, 복학생은 언제 기다려서 언제 키웁니까. 

김 대리, 오 선임이 진국인기라. 오 선임 우째 안되겠나?”


다리 놓아서 내년에 있을 프로젝트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역력한 애사심 최고인 안 부장도 사견을 곁들인다. 


“놓친 버스 쳐다보는 거 아니라카이. 새로 오는 버스를 쳐다봐야지.”


남의 연애사 가지고 아침부터 쓸데없이 심각한 두 아저씨를 살며시 남겨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참이다. 희한하게 아무도 그를 권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는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자꾸만 나도 겁이 난다…


다행히 바쁜 날이었다.

오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날아갔고, 오후에는 버그 수정을 한 프로그램들을 검증하느라 꼬박 몇 시간을 화장실도 못 가고 정신없이 집중해야 했다. 그러다가 저녁 7시가 지나고 언제나처럼 업무 2부, 야근이 시작된다. 빽빽한 정규 수업시간을 마치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되면 괜히 따분해지듯 야근도 그렇다. 사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꼭 야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 할지라도 대리의 야근 유무는 바로 위 과장이나 부장의 스케줄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오후 7시부터의 여자 화장실은 다 내 차지다. 

경리는 회식 제외하고는 거의 야근이 없으니까 이 층의 여자는 나 하나다. 가뜩이나 메마른 입술이 하루 종일 히터에 바짝 건조되어 갈라지다 못해 피가 나려고 해 화장실에서 점검을 하고 왔더니 자리 근처에 한 대리가 서 있다.


“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님한테 전화 왔었어. 얼마나 또 하루 종일 기다렸을 거야. 딱 화장실 갔을 때 전화가 오냐. 얼른 전화해 봐. 데리러 오겠다는 거 같더라. 아니면 걔는 딱지 놓고 나랑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던지…”


한 대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통화버튼으로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그가 전화를 해 온 것이…


“뭐여, 김 대리 오늘도 일찍 들어가는 거야? 

아 우리 김 대리 연애하니까 살짝 불안하네?”


갑은 갑이다. 안 부장이 드디어 한 소리 했지만 뭐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부장님, 좀 봐주세요. 저 이 연애 잘하고 싶어요.”


뇌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그냥 나오는 소리는 마음의 소리다.


“당연하지. 우리 청춘들의 연애 내사마 팍팍 응원하지. 

나는 신세대잖아. 하하하.”


꼰대라는 소리는 싫어서 호탕한 척 금방 수정하지만 그도 이미 마음의 소리를 뱉은 후다. 야근 안 하는 직원이 혹시나 일을 미룰까 봐 불안하시겠지. 사실 나도 야근 안 하면 혹시나 잘릴까 불안해야겠지만, 나는 전화 못 받아서 남자가 만나기를 포기할까 그게 더 무섭다.


“여보세요? 어, 오빠. 나…”


심하게 조용한 사무실에 사생활 방송은 하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귀에 잘 대고 휴게실로 급히 사라지는 중인데 야근 업무 중 수다도 가장 큰 업무인 단짝 아저씨 둘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근데, 김 대리, 올해 초에 거 누구 만났던 거 같은데… 그때 미친 듯이 일만 하고, 야근 빠지라고 해도 안 빠지고 그래 쌌다가 남자가 질려서 때리치운 적 있지 않나? 사람이 저리 달라지네?”


“그래서… 참… 그렇습니다…

워낙 쌀쌀맞은 여자라서 별 걱정 안했더만… 저리 속에 카스테라가 들었는지 몰랐네… 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제가 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더.”


한 대리는 대체 뭐가 그리 걱정이란 건지 모르겠는데 분명 내가 장 선생을 만나는 것이 절대 반갑지는 않은 티를 자꾸만 냈다.


“그러니까 뭐 한다고 그리 오래 뜸을 들였노, 비었을 때 적극적으로 대시했어야지. 은자 마 다 물 건너갔다. 저 봐라, 저 여인네가 핸드폰 저리 귀걸이처럼 애지중지하는 거 봤나.”


남의 자리에 기대 서서는 느긋하게 들으란 듯 수다를 떠는 아저씨들을 피한 뒤 듣고 싶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오빠, 전화했었어?”


“응, 언제 끝나?”


“왜, 어딘데?”


“말해봐. 언제 끝나는지…”


“끝내려면 지금도 끝낼 수는 있는데… “


“그래? 다행이다. 미리 말 안 하고 와서… 만약에 곤란하다면 아직 강남이라고 거짓말 할라 했는데… 하하. 나 지금 회사 근처 주차장이야. 십 분 안에 내려올 수 있어? 그럼 지금 차 빼서 앞으로 갈라고…”


이상하게 어제 만난 이후 불안했던 기분이 좀 사라진다. 어쩌면 제대로 연애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좀 전에 갔었던 화장실을 다시 들른다. 화장실은 화장하라고 있는데라는 유치한 자작곡을 흥얼거리면서…

이전 13화 그 남자가 선물한 클라이막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