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래 원조는 상추에 싸서 물김치랑 같이 먹는 거라며? 다 넉넉하게 챙겨 오라 했는데…”
“… 누구한테?”
“…응? 우리.. 집에 일해 주시는… 근데 왜? 그게 중요해?”
남자가 살짝 기분이 상한 듯 굵은 눈썹을 한쪽만 슬쩍 움직인다.
“… 아니, 전혀 예상을 못 했던 거라서… 그냥… 오빠… 어디 … 갈 거야?”
“…. 응? 아니! 어딜 가, 내가. 하하하…”
남자는 이상하게 당황하더니 가짜 웃음을 웃었다.
“… 그냥 … 맛있게 먹으면 안 돼?”
말을 잘하던 남자가 할 말을 못 찾는 것이 더 불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남자가 바라는 대로 그렇게 먹고 싶던 마산 아귀찜을 실컷 먹기 시작했다.
“와인 한 잔 할래? 아구도 생선이니까 원래는 화이트 와인을 준비했어야 했나?”
“와인을 제대로 마셔본 적도 없어서 하얗든 빨갛든 별 상관없어.”
“그래? 그럼 이 비싼 와인의 출생 연도나 이름 따위는 생략할게. 그런데 좀 억울하긴 하다. 네가 그런 걸 잘 알아듣는 편이면 오늘 내가 얼마나 정성을 쏟았나 알아줄 텐데…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성이 쓰는 돈에 많이 비례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실컷 쓰고 인정 못 받는 경우는 좀 억울한데…”
사실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냥 돈이 갑자기 쏟아진 졸부집 아들이 아니라, 개화기부터 대대로 사람을 구하는 의원 집 종손이라 내가 이래 저래 많이도 뒤쳐지는구나, 아무리 공부 나름 해서 알아주는 여대를 나와봤자 내가 배워 익힐 수 없는 어떠한 벽은 만나게 마련이구나, 그래서 나는 그에게는 기본기인 것조차 갖추지 못해 매력이 하나도 없는 가로수가 되는구나… 그렇게…
“입시를 하지 않을 거면 말라고 해서 피아노를 그만둔 지 십 년 도 넘었댔지. 오랜만에 한 번 쳐볼래? 저번에 그랬잖아. 네가 피아노 만화를 보다가… ‘나도 그랬다고… 나도 피아노를 칠 때면 자유로웠다고… 열두 시간을 해도 피곤하지 않은 건 피아노 하나… 그건 열정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 한 번 쳐봐. 오랜만에 자유로워져 봐.”
그가 가리키는 동그란 스테이지 위에는 백 스타인의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가 예쁘게 앉아 있었다.
“아까 걔, 내 친구. 걔가 원래 피아노 전공이야. 잘 치지만 천재는 아니라서… 그래서 지금 슬프게 와인 바 사장을 하고 있지. 아무거나… 하나 쳐 봐… … 그냥 아무거라도… 기억하게…”
그때,
사실 알았었다.
남자가 자꾸만 이별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꾸만… 모르는 척을 했다. 아니… 남자가 말하는 대로 피아노를 치면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제기랄… 다 떠나서… 그냥 하나도 몰랐다. 대체 왜 저따위 소리를 지껄여 대는 건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나한테 쳐 주고 싶은 곡 아무거라도… 기억하게.”
남자가 기억하고 싶다는 말에 주저 없이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곡을 쳤다. 쇼팽의 야상곡 55 op1.
그 곡에…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저 내가 그 순간에 생각했던 거라곤, 내가 그나마 할 수 있으면서 그다지 시시하지 않은 곡, 무난하면서도 초보티가 나지는 않는 곡… 쇼팽 정도면 적당하겠고 이 분위기에 왈츠보다는 야상곡이면 좋겠다… 그 정도였다. 다행히 그다지 어긋나는 음 없이, 뜸 들이는 곳 없이… 무난하게 잘 마쳤다고 생각하고 돌아보는데 남자가 울고 있다… 대체… 왜…
“… 내가 그 정도로 잘 치는 건 아닌데… 대체 왜…”
“어, 분명히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런데 그냥 눈물이 나네. 그냥 무언가가 느껴져서.. 그래서… 아니다.”
남자는 앞에 놓인 와인잔을 막걸리잔 마시듯 한숨에 들이켰다. 그저 동네 신동 소리 듣던 수준의 내 피아노가 누군가를 울렸다는 것이 조금 희한했었지만 그보다, 다짜고짜 와인바를 빌려놓고는 피아노를 쳐 보라는 남자 친구는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눈치 없었던 것 같던 그날 밤을 다시 돌이켜보면… 어쩌면 나는 알았다. 그는 그날 이상했었으니까. 그는 처음부터 이상했던 사람이지만 그날 더 이상했었다. 그는 많이 초조했고, 그는 많이 어설펐고, 앞뒤가 안 맞았지만… 그는 그날 나를 사랑하는 것도 들켰었다.
“뭐 나 만나기 전에 이미 한 잔 하고 왔어?”
“아니.”
“그런데… 왜 이래?… 이상하잖아…”
“… 네가… 나를 자꾸 이상하게 만들잖아…
자꾸 망설이게 만들잖아. 나는 살면서 망설여 본 적 없는데…”
“내가.. 뭘.. 망설이게…”
그가 갑자기 얼굴을 포개 와 그다음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나를 모든 것에 망설이게 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너 때문에 망설이고 있어.’
그가 속삭였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던 그 말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또한 그 말을 되새기며 그 후로 많이 망설였었다…
“지금은 진짜 다른 다리 같네…”
낮 시간 대부분 주차장만큼 막혀 있는 잠실대교를 나르다시피 하는 택시 안에 나란히 앉았다. 남자는 아까 내가 굳이 쥐어 주었던 오백 원을 다시 내 손에 가만히 쥐어 주었다.
“잘 모으고 있지?”
“그럼! 아무것도 안 사 먹고 잘 모으고 있지!”
“참 착해요.”
남자가 유치한 칭찬을 하더니 갑자기 진지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투덜대면서도 하라는 대로 잘하고 살아온 우리 김 대리님.
힘든 길은 가는 거 아니다, 그치?”
“아 또 뭔 소리야!”
“… 아니, 고속도로, 경사 없고 막힌 데 없는 길만 걸으시라고요. … 우리 고모가 그랬어. 너무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덕담하는 거라고… 너는… 내가 말 도 안 되는 ‘오빠’ 트집을 잡아도 그럴 수 있다고, 내가 맞다고… 그러잖아. 너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덕담해 주는 거야. 와인 한 병에 취한 걸 수도 있고… 술이 왜 좋은지 아니? 조금은 솔직하게 만들어. 밤 껍데기를 깔 때, 겉껍질쯤은 해체된 상태로 만든달까… 어떤 사람들은 술이 사람을 과장되게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과장으로 보이는 그게 우리 진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사실 많이 눈치 보고 사니까. 그러니까, 김 대리야. 내가 지금… 딱 한 번만 말할게.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데…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자면서도 생각이 나고… 이렇게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이 사랑이라면… 난 너를 사랑한데이. 딱 한 번만 말한다… 아마 내가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은 너 하나일 거라고… “
그 와중에 택시 아저씨가 개인사가 있는 모양 뉴스조차 틀지 않은 적막한 택시 안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사랑 고백 따위에 전혀 관심조차 없는 것은 다행이었달까… 나는 분명 그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막연한 두려움 혹은 자신감 결여 따위의 이유로 고백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 와중에 하루에도 수십 번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들리지도 않을 혼자만의 사랑 고백을 했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나 무심하게 내 속을 태우더니 오늘 이후 다시 보기 힘든 제삼자 택시 기사 앞에서 뜬금없이 고백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