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게 하는 남자(1)

by Hazelle

그 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다.

평소보다 배로 시간을 들이고 옷을 고르는데에도 한참을 고민했다. 유치하게도 나는 전남편과 그의 전 내연녀이자 현 아내를 만나러 나가는 것에 사활을 걸고 있다. 솔직히 말해 그 어느 때보다 멋지고 싶었다.
8구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 ‘라브뉴’에 아이들과 도착했다. 철저히 예약손님만 받는 곳이라 붐비는 적은 드물다 해도 자리가 빈 적은 한 번도 없던 곳인데 의아할 정도로 레스토랑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할 일 없는 웨이터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윗옷을 받아주고 인사를 건네며 맞는다.

어리둥절한 기분에 이끄는대로 한 가운데에 잘 세팅된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놀랜 애들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왜 이렇게 레스토랑이 텅텅 빈거냐’고 혹시 내가 통째로 빌리기라도 한 거냐는 우스갯 소리를 했다. 솔직히 ‘혹시 아랄도가 통째로 예약을 했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안 떠올려본건 아니지만 절대 그럴리 없는 인간이라 금새 지워버렸다.

미리 예약했던 디너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 같은 식전 음료와 애피타이저들이 조금씩 끝도 없이 나온다. 아랄도 일행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내 주는 음식을 먹으며 애들과 그다지 편하지 않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끝까지 나오지 않겠다던 맥스를 겨우 달래서 데리고 왔는데 아이는 오늘 누구와 꼭 한 번 싸울 태세로 사납다. 생일 당사자인 고프레도는 내어오는 애피타이저들을 동생 몫까지 다 먹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중 가장 속이 편해 보인다.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샴페인을 세 잔째 비웠을 무렵 늦고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남자가 본인만큼 키 크고 덩치가 좋은 미국 여자를 데리고 들어섰다.

“마리나! 당신 정신이 있는거요? 이렇게 비싼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다니... 당신의 그 사치는 여전하군.”

신경을 거스르는 탁하고 시끄러운 목소리가 드디어 들린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온 레스토랑이 떠나가라 불평을 늘어놓으며 다가오는 남자를 쳐다보는데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기본적으로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남자. 본인만 편하다면 세상 어떤 시선도 신경쓰지 않는 남자. 그 남자가 조금이나마 궁금했다는 것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정말 무슨 생각으로 애 생일날에 레스토랑을 빌린거지? “

옆에 달고 온 커다란 미국 여자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한걸음에 달려와 자리에 앉으면서 재차 다그친다.

물론 아니다. 레스토랑을 빌릴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쓸데없는 사치라고 방방 뛰고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잊었던 사실들이 떠오른다.

백원을 벌어도 만원을 벌어도 십원짜리 바지만 사 입는 그의 싸구려 취향때문에 얼마나 많이 싸웠었는지를... 내가 부르는 ‘격식’과 ‘교양’을 ‘사치’와 ‘허영심’으로 치부하는 그의 무지함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를...

몇 해를 괴롭히던 그 망령이 눈 앞에 앉아 있는데, 분명 내가 알던 그 남자 그대로인데 갑자기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한 양 생소하고 무관심하다. 그래... 정말 관심이 가질 않는다. 오히려 이 순간 호탕하지만 경박스럽지 않고, 취향이 없다 하지만 타고난 기품이 있으며 아픈 말을 할 땐 치료할 약도 같이 준비하는 그 남자, 디노가 떠올랐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드디어 내 마음의 방에 들어 앉아 내내 나를 괴롭히던 그 망령을 깨버렸는데 그 남자는 이제 없다는 것이...

이미 초반부터 흐트러진 분위기에 그저 한 자리에 있을 뿐 각자 다른 생각 중인 사람들... 내 얼굴을 내내 흘끗 거리던 쟈넷이 마지못해 잘 지냈느냐고 말을 걸어온다. 한껏 모양을 낸 흔적이 역력한 여자는 간단한 인사중에도 목소리를 떨었다. 그녀를 보는 내 시선은 차가왔지만 생각만큼 그녀가 그리 미운것만도 아니었다. 어리석고 불쌍한 여자... 아마 자신은 나를 그리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눈에 그녀는 불쌍하다. 세상의 많은 남자를 두고 굳이 이미 누군가와 짝을 이룬 다른 남자를 선택할 만큼 멍청하니 얼마나 불쌍한가.

빵과 푸아그라가 또 다른 애피타이저로 차려졌다.

그 와중에 웨이터를 붙잡고 오늘 여기를 빌린 비용이 대체 얼마나 되냐고 묻는 아랄도에게 웨이터가 매니저와 이야기하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나는 통째로 예약을 하지 않았고 오랜 친구인 삐에르가 그 말을 못 알아들었을리도 없다. 그리고 이상하게 삐에르는 도착 이후 내내 보이질 않고 있다. 설마 본인 레스토랑도 아니고 매니저 직급인 삐에르가 레스토랑 황금 시간대를 온전히 다 내어주었다고는 납득이 되질 않는다. 아랄도의 닥달에 난감한 웨이터에게 삐에르가 보이면 나에게 좀 데려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쟈넷이 푸아그라를 처음 보는 듯 ‘대체 이 색이 희한한 버터는 무엇이냐’고 아랄도에게 묻는다. 맥스가 일부러 기침을 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무식한 미국년’이라고 욕하는 걸 듣고 살짝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랄도가 가는 귀가 먹어 다행이다. 아랄도가 푸아그라를 설명하자 쟈넷이 호들갑을 떨며 들었던 스푼을 내려놓는다. 푸아그라의 원료로 쓰이는 거위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사육당하는지 아느냐고 흥분하길래 조용히 ‘칠면조를 즐기는 당신이 채식주의자인줄 몰랐다’고 말하자 잠잠해졌다.

“ 형 생일선물인 차는 언제 줄건가요? 그 조건으로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걸로 아는데...”

턱으로 쟈넷을 가르키는 행동에 아랄도의 얼굴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스스로 가라앉히고 어색한 미소를 띄며 한 눈에도 낡아보이는 차 키 하나를 꺼내 고프레도에게 건넨다. 못지 않게 어색한 미소를 띄고 있던 아이도 별 기대 없었는지 시큰둥하게 금방 테이블 위로 전해진 차 키를 집어들 생각을 안하고 있다. 가족이던 시절부터 아랄도가 가끔 쓰던 닛산 픽업 트럭이다. 파리 근교 창고에 처박아 둔지 오래라 시동은 걸리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대체 왜 선물을 금방 받지 않는거냐!”

그런 부끄러운 선물을 하고도 당당한 그의 일침에 아이가 하는 수 없이 두 손가락으로 성의 없이 열쇠를 집어 올렸다.

“흠... 아랄도. 얘는 아직 법적으로 80킬로미터가 최고 속도인 차만 몰 수 있다구요.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거 아닌가?”

결국 솟구치는 짜증을 참지 못해 아이의 손에 마지못해 담긴 그의 낡은 트럭 키를 뺏어서 던져주다 시피 그 앞으로 밀고 내가 준비했던 푸조의 새 차 키를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숨길 수 없는 환한 미소로 차 키를 덥석 받더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서는 거푸 뽀뽀를 퍼부었다.

아랄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여전히 좋은 차’라고 중얼대며 차 키를 다시 호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냥 저 남자와 저 남자가 데리고 온 교양없는 저 여자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정말 지옥만 같다. 하지만 내 아이에겐 또 아빠인 인간인지라 크나 큰 인내심으로 견디는 와중에 연신 삐에르를 찾아 눈을 바삐 움직이게 된다.

애피타이저들의 향연이 끝나고 메인이 나올 차례인데도 한 참 뜸을 들이며 나오질 않는다.

흡사 블랙코메디가 한참 상영중인 연극무대에 주인공으로 앉아 있는 기분이다. 자리엔 수시로 적막이 흘렀고, 모인 인간은 겨우 다섯인데 각자 한 장소에만 있다 뿐 전혀 유대감이라곤 없는 모임이다. 맥스는 아까부터 팔짱을 끼고 쟈넷을 내내 째려보고 있고, 고프레도는 나오는 음식들을 깨끗히 비우더니 메인이 한참 나오지 않자 빵 접시들을 비우고 있다. 아무리 뻔뻔한 미국 여자라도 이 자리가 편하지 않을 쟈넷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같이 살던 시절 여느 일요일 브런치를 동네 레스토랑에서 함께 하던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표정, 분위기로 음식을 먹고 있는 아랄도는 분명 내가 굉장히 잘 아는 남자인데 또 한편 처음 보는 양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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