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레스토랑 입구쪽이 소란한 듯 하여 드디어 삐에르가 나타난 것인가 반가운 마음에 상반신을 일으키다 나도 모르게 다시 주저 앉아 버렸다. 입구에서 홀 쪽으로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는 이는 다름아닌 디노였다. 꼭 어제 본 사람처럼 변함 없는 스타일과 변함 없이 온화한 표정, 알 듯 말 듯 가벼운 미소도 그대로다. 우선은 놀랍도록 반가왔는데 이내 내가 보낸 그 편지가 떠올라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고프레도!! 드디어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축하한다!! 내가 늦었구나. 미안하다. 취리히에서 곧장 오느라 시간이 조금 어긋낫지 뭐니. “
흡사 장례 끝나고 유산분배를 위해 모인 웬수같은 가족분위기를 내고 있던 장내를 디노는 순식간에 혼자서 왁자지껄하게 만들고 있었다. 웬만해선 요동하지 않는 아랄도 마저도 모두 일어나서 디노를 바라보고 있다. 이 두 남자도 서로 직접 보는건 처음이나 서로의 존재를 잘 알고 있다. 디노는 아이들과 반갑게 끌어 안고 볼키스를 나눈 후 먼저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고 있는 자넷은 무시한 채 아랄도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드디어 내 쪽으로 돌아섰다.
한 달이 넘게 신경쓰이던... 아니, 그리워하던 남자가 바로 눈 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죽은 사람도 아닌데 마치 봐선 안 될 사람을 본 양 심장이 방망이질치고 숨도 고르지가 않을 지경이다. 꼭 이런 나를 다 꿰뚫어보는 것 같은 짓궂은 눈빛으로 그는 나를 그윽히 바라보다가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어깨를 독수리처럼 벌리며 다가와 으스러지게 끌어 안았다.
“ 왜 그사이 살은 더 빠진거요. 이제 내가 옆에서 당신을 내내 먹여야 할 차례군. 이렇게 잘생긴 아들을 잘 키워줘서 고맙소. 이미 이 아이들은 내 아들들이니 수고한 그들의 엄마에게 먼저 선물을 줘야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그는 다짜고짜 수트 포켓에서 에머랄드 목걸이를 꺼내 걸어주었다.
“ 밀라노에서 발견했소. 당신 눈과 꼭 닮았길래 두 번 생각하지 않았지. 잘 어울릴줄 알았다니까...”
여전히 말 한 마디 못 하고 있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목걸이를 걸어주고 내 머리결을 살짝 쓰다듬으며 흡족한 듯 웃었다.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아랄도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마리나. 당신이 재혼 계획이 있는지는 몰랐군.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도 다 계획된건가?”
평소대로 별 반 다를 바 없는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난 그의 말속에 잔뜩 솟은 가시를 느낄 수 있어 이상하게 통쾌했다. 그래. 굳이 그 앞에서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이젠 당신이 좀 기분이 상할 차례 아니겠어?
그토록 찾아도 보이지 않던 삐에르는 사실은 디노를 마중 나갔던 것인지 어느 새 디노 옆에 서서 서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메인을 들여와도 되겠소. 뭐 음식이야 훌륭하단 것을 다들 알고 있을테니 천천히 즐깁시다. “
준비되어 있었던 듯 어느 새 테이블에 한 가득 음식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산지에서 공수 받았다는 은대구 구이며, 홍합요리, 연어 샐러드는 마치 바닷가에 앉아 있는 착각이 들만큼 신선했고 송로버섯과 함께 졸인 남부 프랑스식 소고기 요리도 훌륭했다. 직접 샴페인을 고프레도에게 따라준 디노가 물었다.
“ 가장 중요한 차 선물은 이미 받았겠지? 아마 엄마가 줬을테고... 르노나 푸조쯤 되니?”
디노는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나는 아이에게 정말 스스럼이 없었고 놀라운 것은 아이도 눈 앞에 앉아 있는 본인의 친부 보다 더 다정하게 디노를 대하고 있었다. 디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프레도는 좀 전에 내게서 선물 받은 차 키를 꺼내 자랑스럽게 보였다. 디노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차 키를 덥석 집어 호주머니에 넣으며 어안이 벙벙한 아이에게 말했다.
“16세에 골라탈 차가 두 대나 있는건 좀 과하잖니? 자... 둘 다 가질 수 없을 땐 준 사람을 보고 고를 수도 있겠지만 더 나은걸 고르는게 더 솔직할 수도 있지.”
그는 혼자 뭔가 굉장히 재밌는 모양 소리까지 내어가며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다른 차 키를 꺼내 아이의 손바닥에 얹어 주었다.
금세 당황하여 소리를 지를 태세이던 아이가 이내 환호성을 지른다.
“얏호!! 벤츠!!! 이제 내가 우리동네에서 프린스 챠밍(*가장 인기 있는 남학생)이야!!”
“당장 내려 놔!”
잠시 존재를 잊고 있었던 아랄도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남의 아들을 망칠셈이요? 그 나이에 벤츠라니... 가뜩이나 일하는게 미안하다는 핑계로 엄마가 부족한거 모르게 키워 엉망이라구. 호의는 고맙소만 차 키는 얼른 넣어두세요.”
그는 제법 단호하고 서슬 퍼렇게 애비의 위엄을 잔뜩 담아 선언했지만 좌중은 그저 조용하다. 어리석은 그는 아직 모르고 있다. 이미 아이들에게서 그는 이름 뿐인 아버지란 사실을...
“아저씨가 사려 깊게 생각해 고른 선물이니 받아도 좋겠구나. 얼른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렴.”
머리속으로 생각해 나온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아랄도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도 일단은 아이에게 너무 심한 사치라고 반대했을것은 자명했다.
“ 당신 정말 심하군. 아이를 망칠셈이야... 이 정도로 개념이 없는 줄은...”
십 수년을 그래왔듯 아랄도는 그의 특기인 ‘아무렇지 않은 투로 상대방의 가슴에 가볍게 비수꽂기’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는 이번엔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디노는 달랐다.
“ 본인이 하는 말을 부끄럼 없이 들을 수 있다니 놀랍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