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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May 29. 2024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호기심…

(4)

“그니까 저 벨소리 저거 우리가 좀 있다가 또 들어야 하는 거지? 생 라이브로다가? 근데 저 엄마는 왜 짜장면이 싫다고? 우동판가? 으하하”


“민첩하게 대처하겠습니다. 상무님. 그나저나 요즘 중국집에 우동 파는데도 잘 없어요…”


“그래, 김 대리만 믿네. 아주 그냥 들을 때마다 눈물 나서 분위기 잡쳐. 울다가 울면 먹을 참이야. 으하하”


“.. 아… 하하하.. 하하.. 네… 울면… 하하하…”(인정받는 직장인이 되려면 사실 연기학원 끊어야 하는 거 아닐까 깊이 고민할 찰나다.)


“야!”


상무가 옆에 있어서 잔뜩 도둑놈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한 대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헉… 한 대리… 저렇게나 남자다웠단 말인가… 상무의 썰렁함에 지금 독립운동가 같은 처연함으로 반항하는 것인가?? 한 대리… 저기 용 두 마리 기름집에서 스카웃 제의 받은 거야? 사람이 다들 양심은 있는 모양 상무도 썰렁한 농담을 했다는 것을 잠재적으로는 알고 있는지 끔쩍 놀래는 것이 보인다. 


“야, 너 왜 실컷 전화번호만 물어보고는 전화를 안 하냐?… 뭐?? 상무님은 왜 찾아! 뭐?? 이 정신 나간 백수가…”


아… 아니구나… 역시… 우리 다소곳한 한 대리님이 그럴 리가 없지…


“누군데? 누군데 나를 찾아? 인사부야?”


“아뇨, 상무님. 제 이종사촌인데요, 장 대만이라고.”


“아아아!! 장 선생!! 아이고 웬일이래.”


장 선생? 상무도 아는 걸 보니 명실상부 확실히 선생은 맞나 본데… 잠깐.. 미용실 헤어디자이너? 그러고 보니까 그의 헤어스타일은 마치 일본 학원물 만화에서 방금 빠져나온듯한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요 근처에 왔는데 상무님 괜찮으시면 잠깐 와도 되냐고… 미친 거죠. 남의 회사 회식에…”


“아 뭐 어떻노!! 얼른 오시라고 해라!! 우리 장 선생이 오데 보통 사람인가… 얼른 오라고 하시게. 어딘지 모르겠다거나 주차하기 힘들다 하면 한 대리가 나가서 알아서 좀 돕고, 알겠지?”


“…네…

그래, 자식아. 와도 된다 하시네. 아니 왜 남의 회사 회식에 온대, 정신 나간 놈아. 아 몰라. 여기 사리원. 아냐?… 넌 대체 서울 시내에 모르는 식당이 어디냐? 주차? 아 몰라. 와서 술 마실 거면 아예 밤샘 주차되는 데다가 넣고 오던가.”


“… 한 대리, 거 참 무례하네. 상사의 가족에게 큰 도움 주신 선생님에게 그게 뭔 태도인가? 나 좀 빈정 상하네?”


뭐지… 생식 선생이 이 집 비만을 퇴치해 줬나? 그러고 보니 상무 배가 예전보다 좀 내려간 거 같기도 하고… 분명 늙은 호박만 했는데 지금은 좀 큰 수박만 하니까… 아니면 진짜 헤어디자이너 샘? 상무네 가족 담당?


“… 나가서 데려… 아니 모셔 오겠습니다.”


“진작 그랬어야지. 혼자면 돌아오지 마. 자네 없어도 돼.”


“상무님, 흑… 무슨 그런 말씀을…”


내 보기에 분명 한 대리 삐졌는데 다들 신경도 안 쓴다. 삐진 한 대리가 그의 사촌을 데리러 출동했다… 갑자기 화장실을 한 번 가야겠다. 대체 이게 뭔 정신없는 사태란 말이지? 도대체가 정리가 안된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나 보려고 남의 회사 회식에 무작정 껴들겠다는 거?? 아니지… 진짜 회식이란 것이 너무 하고 싶어 환장한 백수일 지도 모르지… 그렇든 어떻든 내 이미지는 소중하다. 일단 한 대리가 나가면 나도 은근슬쩍 화장실 가서 상태 점검을 좀 할 테다…


“김 대리! 걔 온대. 화장실 가서 딱분이라도 좀 두드려야 하는 거 아냐?”


세상에는 말로 돈 버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숫자의 말로 매 버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오호? 김 대리도 우리 장 선생 아나?”


“아.. 그냥.. 좀…”


“거 둘 다 바쁜 사람들인데 용케도 어찌 만났네? 우리 김 대리 아무래도 널널한가 본데 내, 일 좀 더 줘야겠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로 매 버는 인간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수두룩하게 널렸다.


“아이,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시나이까, 소녀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잠시 눈물 좀 닦고 올게요.”


“눈물 닦는데 가방은 왜 갖고 가? 우리 안 훔쳐.”


한 대리랑 상무는 환상의 커플, 소울 쌍둥이들…


내가 벌써 몇 년간 아저씨들만의 세상에 껴 지내보니까 그렇더라. 아저씨들의 낙은 주로 남을 놀리는 것이며 그 놀림을 받아주고 말고 간에 그들은 올곧게 직진한다는 것. 최선책은 그저 슬그머니 피하는 것이라는 것.


회식을 좋은 데서 하면 덤으로 또 좋은 점은 화장실이 깨끗, 널찍, 근사하다는 것이다. 조금 낮추어 와인 통삼겹 집 정도도 괜찮다, 일단 남 녀 화장실 분리니까. 그런데 그 밑의 일 인분 1800원 하는 대패삼겹살부터는 공용에 더러운 화장실인 곳도 많고 마지막 코스인 포장마차 같은 경우는 이탈하여 바깥 어딘가로 한참 가는 모험을 덤으로 겪고야 화장실을 찾곤 하는데 문이 부실한 경우 많아서 일행 지참은 필수다. 


관리가 너무 잘된 화장실 거울에 붙어 서서 잠시 상태 점검을 한다. 이런 예고 없는 깜짝 만남 증오한다. 자고로 매사에 준비가 철저해야 마음이 놓이는 법인데… 역시나 무방비 상태로 아침에 대충 찍어 바르고 나온 티가 나는데 이 상태에서 트윈케익 덧두드리면 찰흙 느낌 물씬 돋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샤부샤부 집 형광등 너무 새것 아닌가 하며 슬그머니 화가 난다. 입술이라도 좀 어떻게 손을 보니 약간 인간 같아 보인다. 돌이켜보니 한우리에서 국수 먹을 때도 이거보다 그다지 나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눈은 왜 이리 흐리멍덩해 보이지 싶어 다시 보니 마스카라라는 마법을 오늘은 생략했다… 아뿔싸… 마스카라는 참 중요한데 말이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모니터 뚫어지게 보고 나면 눈에 진물 나서 하도 번져대니까 아침에 그냥 생략했던 게 생각난다. 순간… 이 시간에 문 연 화장품 가게 있나 생각하다가 내가 진짜 미쳤나 화들짝 정신을 동여매 본다. 


“김 대리님 오늘 많이 피곤하시죠.”


“왜요! 티나요??”


경미 씨가 당당하게 화장품 파우치만 옆구리에 끼고 들어섰다. 가방 채 들고 화장실로 온 나와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저 여인은 하루 종일 수시로 두드려대서 피부가 아주 고무마냥 완벽한데 뭐 하러 또 고치러 온 건지 모르겠다. 


“에이… 대리님이야 요즘 제일 바쁠 때잖아요. 눈 밑이랑 좀 피곤해 보이긴 하네요. 홍홍홍”


팔자 좋은 너랑은 다르다고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갑자기 다시 나를 잠재우는 비굴함… 그녀의 파우치 안에… 있다. 마스카라… 아이라이너… 볼터치… 보소… 아지매요… 내 좀 빌리 씁시데이…


“역시 마스카라는 랑콤이지?”


빌린 마스카라를 열려다가 마침 나와 같은 브랜드를 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랑콤만 써요. 전 라인 다! 강남 젊은 사모님들은 한 브랜드로 쫘악 쓰는데 본인 이미지랑 맞는 브랜드가 하나씩 있대요. 저는 그래서 랑콤으로 하려고요. 홍홍홍”


“그런 것도 있어? 마몽드로 쫘악 세트 쓰고 그러는 거야?”


“에이… 대리님, 떨어지게 마몽드라뇨. 아모레라뇨. 랑콤, 디올, 바비브라운… 이런 거 말하는 거죠. 피부라인은 라프레리, 데콜레르, 끌레드뽀… 이런 거요.”


“왜? 마몽드나 랑콤이나 둘 다 불어 구만.”


줄줄이 잘도 읊어대는 그 불어들의 뜻이나 아는지 궁금한 풋내 나는 그녀의 촌스러운 허세보다도 대체 이 기름집은 경리도 억대 연봉인가… 그러고 보면 항상 비싸다 싶은 것으로만 치장하는 이 여인의 팔자가 슬쩍 부러울라 한다. 참 웃기지… 근의 공식, 피타고라스의 정리, 위치에너지, 벡터 그걸 발견한 위대한 물리학자 이름 이런 건 줄줄 외워도 남에게 그걸 자랑삼아 말하는 이는 거의 못 보았는데, 희한하게 브랜드 이름 희소한 거 많이 아는 여자들은 그걸 꼭 자랑한다는 것. 굉장한 지식이요 그런 이름들을 줄줄 외우는 본인이 이미 너무도 세련되어 미칠 지경이라는 거… 그런데 그 아끼는 브랜드 원어로 써 보라 하면 또 가관이라는 거…


그래도 마스카라의 요술로 눈이 조금 또렷해졌다. 요즘 하도 잠 못 자고 피곤해서 각시탈 같이 허옇다 못해 퍼런 피부색도 좀 가려졌다. 상태가 비교도 안 되게 안 좋았던 나도 마무리했는데 완벽하다 못해 왁스 인형 같은 경미 씨는 아직도 찍어 바르고 뿌리고 난리도 아니다. 저 파우치… 완전 요술 보따리… 향수도 나오고, 헤어스프레이도 나오고, 프랑스 어디 온천에서 퍼서 만들었다는 미네랄워터 스프레이도 나오고… 파리도 없는 한겨울 화장실에서 뭘 저리 뿌려대는가…


“난 경미 씨가 이렇게나 불철주야 미모에 신경 쓰는 줄 몰랐는걸? 흔한 회식인데 왜 이렇게 힘을 주는 거야요?”


희한하게 신경이 쓰이니까 조금 비꼬게 되는 것을 양해해 주길 바라며 결국 한 소리 했다.


“어머? 대리님. 제가 미쳤다고 저 아저씨들한테 잘 보이려 내 랑콤이를 찍어 바르겠어요?(내가 좀 전에 말했던 외국 브랜드 빠삭녀들의 또 다른 특징. 너무도 사랑하여 그 아이템들을 다 친구처럼 부름.) 좀 있다가 한 대리님 이종사촌분 온대잖아요. 한 대리님네 빵빵하잖아요. 마침 저 남자 친구 없어졌잖아요.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 거 모르시나요? 어떤 분이 올지도 모르는데 만반의 태세를 갖춰야지요. 저는요, 돈 잘 벌고 착한 남자 만나서 사모님 될 거예요.”


오히려 시원하다. 얼마나 시원해. 저렇게 당당히 말하면 그만인 것을. 돈 잘 벌고 착한 남자 싫은 여자가 어딨어. 그리고 자아실현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사모님이 장래희망. 안될 건 뭐며 그게 자이실현보다 낮은 거라고 누가 정해. 사실 어쩌면 사모님 되는 게 자아실현보다 더 어려울걸. 사모님이 되는 건 그야말로 랜덤이요 운이요, 미모가 90프로 팩터니까 말이다. 결론은… 좋겠다 지지배야. 예뻐서. 그나저나 다른 테이블에 앉았던 이 여인은 장 선생이 상무와도 안면 있는 사이란 것 까지는 모르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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