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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lle Jun 02. 2024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호기심…

(5)

물론 내가 그 이론에 동조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그것에 동조를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도 않은 한 가지. 사람이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남녀뿐 아니고 면접까지도… 외모는 큰 무기요 필살기니까. 예전에 우리 하숙집 오빠 중 염세스럽기로는 세상 두 번째라면 서러운 인간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술이 취해서 그랬다.


“야, 정숙아, 소미야, 느그 학교 다닐 때 공부 윽수로 잘했제?”


“좀 했지예. 근데 왜! 서울 오는 아 중에 그만큼 몬한 아도 있나, 어디.”


“아니다. 느그는 그중에서도 날고 기었을 끼다. 분명하다. 내 안 봐도 안다.”


“아 또 뭔 말할라고 이상한 칭찬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앉았는데, 빨리 말해라 마!”


“느그는 공부 분명히 잘했다. 그래야만 하고 그랬어야 하고 앞으로 돈 마이 벌어서 기본 와꾸 개선 안 하면 계속 공부 마이 해야 한데이. 그니까 과외 열심히 해서 하나씩 야곰 야곰 좀 시정해봐라. 고마.”


“이 머시마가 돌았나. 술 처먹고 다구리 당해서 비명횡사하고 싶나… 뭐라케쌌노!”


“말이가 똥이가. 입이가 똥구멍이가!!”


지적당한 장학생 둘은 무척 화가 났었다.


“아니 지 얼굴은 어디서 한 세 번 야무치게 지대로 밟힌 거처럼 해가지고는 어디서 남의 얼굴 지적이고. 키도 내만한기!!”


인신공격이 레벨업 되어 간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싸움 구경이다.


“잘 들어봐라! 나도 안다! 나도 못났다이가!! 

그래서 내가 우쨌노. 합천 바닥에서 내 보다 공부 잘 한 놈 몇 없다 아이가. 내 꿈이 뭐였는가 아나? 천문학자다. 내 별을 그리 좋아하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이기다. 시도 마 좀 썼다. 근데 우리 아부지가 니는 돈이라도 없으면 그 꼬라지로 장가는 물 건너갔다더라. 그래서 내가 의대 간 거 아이가. 내가 다 느그 오빠야 같은 심정이라 말해주는기니까 고깝게 듣지 말고. 내 한 몇 년 더 살아보니까 그렇더라꼬. 아 써글… 공보의 때 내가 저기 인천 근처 섬에서 했다이가? 내보다 학벌도 찌그러진 새끼는 맨날 생굴에 회에 난리도 아닌데 나는 맨날 보는 환자도 할매들 뿐이고 할매들이 자꾸만 김치만 갖다주쌌고… 김치 넘쳐나서 끼니마다 참치김치찌개나 처 묵고… 맨날 오데 섬에 엠티 온 것도 아니고 천날만날 참치김치찌개에 깡소주… 느그 아나? 몬 생긴 서러움? 


아 맞다! 느그는 잘 알제? 

…아아아악악! 정미야, 니는 참 힘도 쎄네? 그 와중에 그런 장기 보유한 거 참말로 다행시럽데이, 악!! 아야!! 쫌, 가시나야!!


잘 들어봐라. 그리 감정에 휩싸이가 화부터 낼 일이 아이고, 원래 진리는 아프다 아이가. 악!! … 마 사는 게 그렇타꼬. 그런 줄 알고 잘 들어놔라 마.”


“마 시끄럽고. 안 듣고 싶고. 니 오늘 밤에 자발적으로 취침할래, 기절할래.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회 준다이.”


그 기억의 밤을 슬쩍 끄집어내고 혼자 피식 웃는 적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라 씁쓸하다. 지금 이 기름집 사무실에서도 그녀는 예쁜이 나는 똑똑이니까. 그리고 대부분은 똑똑이를 필요로 하지만 예쁜이를 더 보고 싶어 하니까… 이 여인이 갑작스레 경쟁마로 등장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자 전투력이 바로 꺾인다. 도술 부려 남자를 사로잡을 의지까진 없으니 전적으로 대만 씨의 행보를 살펴볼 수밖에…


뭐 어차피… 만섭이 오빠 말대로(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이름들은 왜 이리 연식이 오래된 스타일이지…) 외모가 무조건 이기는 거라면 오늘 나는 승산 제로임. 괜히 애 태우지 말자고 마음을 비워본다. 냉정히 생각해 볼 때, 그 남자와 나는 꼴랑 한 번 본 사이다. 그렇긴 해도… 야밤에 만났는데… 같이 밥도 먹었는데… 택시도 같이 탔는데… 안된다. 냉정해질라 했는데 잘 안된다… 만섭이 오빠야… 나는 우짜면 좋노…


경미 씨와 같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한 대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경미 씨는 확실히 나하고 레벨이 다르다. 이미 한 대리 이종사촌이 온다는 정보를 상 건너편에서 입수했으면서도 예상과 달리 우리 테이블로 오지 않고 다시 있던 자리에 가서 앉는다. 경미 씨가 앉은 상에는 삥 둘러 모두 대리급이다. 대부분이 싱글인 대리들. 회사에서 대리라는 직급은 흔하다. 대충 연수 채우면 자동 달게 되는 직급이기도 하고, 알고 보면 굉장히 피곤하면서도 중요한 자리다. 개미군단에서 일개미들 십장쯤 된다고나 할까? 일단 계급으론 말단 인턴, 사원보다 위인 것이 분명한데 일단 그들도 바로 위 상사인 대리는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으며, 아니 사실 만만한 게 대리고, 과장이 부장한테 깨지면 자동 깨지는 인간들이며 밑에 것들이 뻘짓 하면 뒤치다꺼리 전문. 회식의 주춧돌로써 적절한 주문과 수급을 원활히 관리함과 동시에 정신 나간 신입이 소고기 쪽으로 자꾸 기웃되면 은밀하게 정신교육을 시켜야 하고 부장급 이상의 관리자들이 선호하는 노래방 리스트는 머릿속에 구구단 처럼 입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회식의 일 번 코스, 술과 그리고 밥을 마구 채우는 그 첫 번째 리그장에서 그들은 상사들이 포진한 테이블 하나씩을 마크하여 사원이 끊임없이 굽는 고기를 상사들에게 티 나지 않게 상납하고, 알코올이 떨어지면 이모님과의 밀접한 컨택을 통해 수급의 평정을 이루고 적절한 시기를 틈타 밥, 냉면, 죽 등의 마무리 작업을 진두지휘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 하지만… 회사도 회사지만 그들은 장가가야 한다. 그들에겐 멀리 서울에서 혼자 사는 아들 아침 굶을까 봐 불철주야 노심초사하는 그다지 안 늙었는데 희한하게 아직도 조선시대인 엄마들이 있다. 그래서… 경미 씨 테이블엔 싸그리 다 싱글 대리들이 싱글벙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말했듯 대부분 회식의 중춧돌이라 회식자리에서 굉장히 시리어스하며 바쁜 게 일반인데 저기 저 상에 있는 대리들은 이미 경미 씨의 마법에 사로잡힌 두꺼비들이다…


괜히 한 대리 찾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괜히 관심도 없는 안 부장한테 말을 붙인다.


“부장님, 우리 그럼 내년에도 미시간 가나요?”


안 부장과 예산팀의 한 대리, 나는 9월에 한 달간 미시간으로 교육 연수를 같이 다녀온 사이다.  더 이상 아무도 쓰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 프로그래밍 언어 코볼(코볼은 초창기 프로그래밍 언어의 한 종류로 대부분 C언어나 Java로 대체되었지만 기름회사는 유공 시대 개발되었던 프로그램 계속 업그레이드해서 쓰는 뚝심 발휘하는 중이라 담당자 바뀔 때마다 본사 교육을 가야 하는데 내년에 한 대리가 회사에서 보내주는 MBA 연수를 떠나므로 또 교육 출장을 가게 생겼다. 미시간에는 내가 속해 있는 외국계 회사의 본사가 있다. 기름회사에 꽤 좋은 가격에 신정보 시스템을 판 조건에 이 오래된 골칫덩어리 예산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쓸만하게 업그레이드해준다는 조항을 떠안았고 본사 프로그래머들이 다 사표 쓴다고 학을 떼는 와중에 동향 출신인 사장이 나를 얼르고 달래고 도전정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리하여 나는 급기야 여자 혼자서 아저씨 둘 데리고 미국 출장도 한 달이나 다녀온 인재중 인재다.)로 짜인 예산 프로그램 교육 때문에 간 출장이었다.


“가도록 내가 추진해야지. 암. 올해 한 달간 집이랑 좀 멀리 있었더니 어찌나 삶의 질이 좋은지… 우리 마누라한테는 비밀이다잉.”


많은 싱글녀들이 결혼에 대한 회한을 품게 되는 순간 중 대표작이다. 집에 가기 싫어하며 그것을 아주 재미있다는 듯 자랑하는 중년의 유부남 상사.


“차돌 말고 꽃등심 한 판 시켜 주시면 사모님 전화번호를 내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보도록 합죠.”


이런 게 바로 윈윈 시추에이션.

어차피 나도 사모님한테 진짜 전화해서 가정 분란 만들 생각 없고, 내가 한번 일러준다고 뭐 저 안 부장이 바뀔 것도 아니겠고, 그러나 은근한 겁박으로 나는 이 밤 내 뱃속에 찬란한 꽃을 피워줄 꽃등심을 득할 수 있으니…


“이 여인네는 진짜 마케팅을 했어야 한다니까. 아줌마!! 여기 마블링이 아주 그냥 눈처럼 내린 꽃등심으로 3개만 가져다주세요.”


“부장님은 남자다!!”


진심이다. 

일 인분만 시켜줘도 멋쟁인데 3인분 턱 시켜주는 거 보소. 아무리 자기 카드 아니고 법인 카드라도 상무 옆에서 이런 행보는 상남자 중 상남자임…..


“니 오늘 좀 혼자 통크다?”


“앗! 상무님… 2인분으로 수정할까요?”


“뭘 또 시킨걸 그라나. 쪼잔하게… 우리 김 대리가 잘 묵으니까 좋네. 그래도 상사가 그 테이블에 있을 때는 상사에게 결정권을 주는 그런 미덕을 우리 안 부장은 가끔 까묵드라고.”


“시정하겠습니다…”


상남자이거나… 혹은 술이 취했거나…

진주 출신인 상무는 철저하게 여러 인격의 소유자인데 그중 호탕한 인격체는 적어도 소주 이병은 장전한 후에 서서히 드러난다는 것을 안부장은 아직도 간파하지 못했다. 상무는 아직 한 병도 들이키지 않아 상당히 맨 정신인데… 내가 언젠가 사모님이랑 통화하게 되면 다른 거 보다 이런 답답한 면을 일러줄 테다. 부장 세월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극적이지만 사소한 이유들…


“오늘 꽃등심이 제대로 핀 놈이다? 살짝만 익혀서 소금만 살짝 적시듯 해서 드셔 봐. 김 대리, 땡초도 좀 갖다 줄까?”


“네네!! 너무 매워서 눈이 확 빠질 것 같은 놈으로 몇 개 주시어요!”


“오홍홍. 피곤하구나? 그래도 너무 매운 건 안 좋아.”


대충 종로 맛집도 내 손바닥 안에 있다. 바쁜 회식 중에 테이블 사이사이로 아슬아슬 땀을 흘리며 뛰는 이모야들을 은근히 그러나 매우 효과적으로 도와 나는 고깃집 이모야들 에게 인기가 많았다.  좀 전에 말했던 일개미 십장 대리들 중에서도 나는 더욱 일 잘하는 십장. 그다지 내게는 많은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니다. 이모야가 안쪽 테이블 치우느라 술 취해서 질서 잃은 아저씨들의 질펀한 엉덩이를 요리조리 피해 힘들게 들어오지 않도록 근처 테이블 정리를 수시로 해서 그냥 한꺼번에 수거하게만 하면 되게끔 해놓는다던가, 고기도 웬만하면 우리가 굽겠다고 미리 선수 쳐서 아줌마에겐 휴식을, 마음 편한 옆자리 한 대리에겐 작업을 선사하는 등의 일련의 작은 행동들을 했을 뿐이지만 이모야들은 따로 혼자 사는 나를 위해 양념게장을 싸주거나 만두를 챙겨주는 등의 매우 가슴 따뜻한 애정을 보여주시곤 했다.


“땡초 같은 자극적인 걸로 위를 자꾸 놀래키면 뱃살이 더 안 빠지지롱… … 


안녕하셨습니까! 상무님!! 지난번에 보내주신 안동소주 잘 받았습니다! 인사드리려 전화했었는데 출장 중이시라고… 얼굴 뵙고 직접 인사드릴 수 있어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이모야가 가져다 주신 소중하고 아름다운 눈 내린 꽃등심을 한 번 제대로 구워볼까? 집게를 어디… 얼른 집으려는데 낯선 손이 천천히 그러나 나보다 한 발 빠르게 집게를 들어 올린다. 


그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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